F.A.

어느 날 아침, 길을 나서는데 까마귀 두 마리가 빠른 속도로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두 마리 중 더 빨리 날고 있는 까마귀의 입엔 나무 열매가 물려 있었고, 그 틈을 타 새벽의 주인공 멧비둘기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또 다른 날에는 서울에서 보기 힘든 종달새 두 마리가 영역 싸움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쫓겨나는 종달새는 기분이 상했는지, 두려움을 가득 담은 째진 소리로 울며 부리나케 달아났다.

 

이러한 장면은 모두 내가 경험하는 환경의 일부다. 익숙한 거리를 걸을 때나 도심 한복판에 있을 때도 내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환경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법칙에 의해 우리가 적당히 나누어 쓰고 있는 가치이다. 환경재단에서 주관하는 서울환경영화제(Seoul Eco Film Festival)는 환경, 에코, 오가닉이란 단어가 직관적 또는 단편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축제다.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작품들은 환경에 대한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시각을 논하기 때문에 호기심과 실천 의지 강한 환경애호가들은 이 영화제를 꾸준히 지지하고 응원한다.

 

특히 올해부터는 영화제를 상영하는 영화관에서 일회용품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대신 극장 내 카페에서 텀블러를 제시하면 할인된 금액으로 음료를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무늬만 환경영화제가 아님을 증명하는 착한 캠페인이었다. 지난 5월 23일부터 29일까지 서울극장에서 열린 제16회 서울환경영화제의 작품 중, 특히 인간과 삶의 민낯을 보여주며 강한 인상을 남긴 세 프로그램을 다시 한번 만나보자. 나의 삶, 나의 환경을 어떻게 가꾸며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산을 휘감는 노래>

이 영화는 인도와 미얀마의 국경에 있는 펙(Phek) 마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구가 5,000명 남짓인 이 마을에는 노래하는 사람과 노래하지 않는 사람, 두 부류만 존재한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씨를 뿌리고 경작한 열매를 거두는 역할을 한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온다. 사랑 노래 뿐 아니라 의미 없는 단어들로 이뤄진 노래도 있다. 모든 노래의 공통점은 화음이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로 이뤄진 화음은 산자락을 타고 메아리가 되어 공기를 메운다.

 

펙 마을의 사람들은 노래 없이 살 수 없다. 노래하지 않는 사람들도 노래하는 사람들, 즉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져오는 식량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타 문화권에서 보기 힘든 ‘노래=일=인간관계’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리고 노래, 일, 인간관계는 돌림노래처럼 선순환한다. 고된 농사일 때문에 싸움이 날 법도 한데, 펙 마을에는 비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아마 영화 속 펙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회가 가진 일로 만난 사이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믿음이 꽤 이질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왜냐하면 펙 마을에서는 노래로 이어진 사람들은 단순히 동료가 아닌 친구로서 서로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노래로 연결된 사람들은 서로의 어린 시절부터 사랑 이야기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 그 때문인지, 한 명이 마을을 떠나면 계 모임이 해체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처음에 흘러나온 노래의 가사 번역본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당신 없이 나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어요.

당신과 함께할 때, 고단한 하루도 빠르게 흘러가요. 

당신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상적인 감정선과 안온함이 감도는 이곳은 사실 분쟁지역이다. 근래 발생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서로를 죽였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마을을 순찰하는 군인들, 그리고 담벼락 너머로 그들을 경계하는 주민들의 눈빛을 한 장면 안에 담았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노래하며 일하는 이유는 산을 휘감는 노래가 서로를 위한 정신적 방패나 다름없기 때문 아닐까?

영화<산을 휘감는 노래 (Up Down & Sideways)>, 2017 Ⓒ 서울환경영화제
영화<산을 휘감는 노래 (Up Down & Sideways)>, 2017 Ⓒ 서울환경영화제

<표류자들>

인간의 폭력성을 연구하는 것에 평생을 바친 멕시코의 인류학자 산티아고 헤노베스(Santiago Genovés)는 어느 날 폭력의 산 제물이 된다. 그가 탑승한 비행기가 멀쩡하게 날다가 한순간 테러리스트에 의해 납치되면서 그의 운명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넘겨진 것이다. 극적으로 도착지에 무사히 착륙한 순간, 산티아고는 지금까지 와는 차원이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극한의 과정과 이를 통해 도출된 결과물로 자신의 일생에 한 획을 그을 연구 말이다. 영화 <표류자들>은 이런 산티아고의 신선하면서도 위험한 실험이 배경이다. 산티아고는 부실한 뗏목에 각각 인종, 성별, 배경이 다른 11명의 피실험자를 몰아넣고, 기약 없는 시간 동안 대서양을 가로지르게 한다. 실제 실험 기간은 101일로, 그는 이 긴 시간 동안 극적인 상황에서 어떠한 원인이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폭력성을 야기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 사람들을 가둬두었다.

 

산티아고는 관찰을 위해 뗏목에 함께 탑승한다. 배 안에서 피실험자들끼리 서로 매력을 느끼거나, 반대로 서로를 증오하며 일으키는 갈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는 이미 잠정적 결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서로를 헐뜯으리라 예상했으며, 이번 실험이 자신을 제외한 모두의 인생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예언했다. 그런데 갈등이 당연하게 발생했던 육지와는 다르게 뗏목 안은 평안했다. 오히려 피실험자들은 입을 모아 갈등의 원인으로 산티아고를 지목했다. 예상과 달리 지나치게 평온한 분위기에 연구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조바심이 생긴 산티아고가 연구에 개입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산티아고는 치사한 이간질은 물론 일부러 인종차별적이거나 성 차별적인 발언을 하며 피실험자의 자존감을 깎아내렸다. 또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선장 지위를 갈취하여 뗏목 안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억지로 갈등을 조장했다.

 

놀랍게도 피실험자들은 오히려 이렇게 갈등을 만드는 산티아고를 보듬고, 작고 큰 갈등을 모조리 이겨내며 별 탈 없이 항해를 마무리한다.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으로 씩씩하게 돌아간 것은 물론, 뗏목에서의 일들로 인해 트라우마를 경험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류학자 산티아고는 틀렸던 것일까? 몇십 년 전 선상에선 보이지 않았던 갈등은 오히려 실험이 끝난 이후, 산티아고가 인종차별주의자였는지 여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드러난다. 배에 탑승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산티아고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각자 뗏목을 떠나 사회로 돌아갔을 때, 매 순간 직면했던 아픔이 어우러져 농익은 속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번 놀라웠던 점은, 뗏목에 탑승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산티아고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통해 오히려 지난 세월을 함께해 온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표류자들>은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마저 긍정적인 화합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끝난다. 결국 남은 자들에게 실험은 공존의 가능성으로 기억된다. 실험 주관자인 산티아고가 틀렸으며, 인간은 서로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존재, 또는 그러한 본성을 타고난 생명체라는 것을 이 영화를 본 관객은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갈등은 의도하는 사람으로 인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필연적인 현상이라 믿기엔 인류는 지나치게 따뜻한 집단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한가지 관전 포인트가 있다면 이 영화 말미에 귀여운 쿠키 영상이 나온다는 점이다. 토크쇼에 출연한 산티아고는 이번 연구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몰랐는지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영화 <표류자들>을 관람할 예정인 사람이라면 꼭 참고하길 바란다.

<표류자들(The Raft)>의 주제인 산티아고 헤노베스의 실험에 등장한 뗏목 Ⓒ 서울환경영화제

요나스 메카스 오마주 전(展)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는 1960년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이끈 감독이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서정적이고 독특한 작품을 이미 전시한 바 있는데, 이번 서울환경영화제에서도 지난 1월 타계한 요나스 메카스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작품과 이를 차용한 몇몇 프로그램을 상영했다.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 시인의 대가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와 같은 작품을 기대했던 나는 이번에 상영된 그의 작품들을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언뜻 봐서는 파괴적이고 미디어아트 같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관객들도 영화를 다 관람하고 난 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말했다.

 

찾아보니 요나스 메카스 추모전은 요나스 메카스의 섬세한 시선으로 본 인류세(Anthropocene)와 환경 파괴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단편 영화 6편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인류세란 인류의 자연환경 파괴로 인해 지구의 환경체계는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지구환경과 맞서 싸우게 된 시대를 뜻하는 비 공식적인 지질 시대를 뜻한다. 여타 환경 파괴에 대해 다루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는 인류에게 죄책감을 직구로 던지는데 반해, 이번 요나스 메카스의 작품은 변화구에 능한 느낌이었다. 영화 장르 중 하나인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의 기법으로 연달아 보이는 이미지들과 이를 통해 전달하는 불안감과 긴장감은 인간의 독단과 아집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아보겠단 심리를 버려야만, 모두가 함께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나스 메카스 감독 Ⓒ dafilms

아라리오 뮤지엄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던 중, 참새 두 마리가 발치에서 신나게 놀다 갔다. 내가 사람이란 걸 잊었는지 한참을 지저귀다 날아갔다.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이 귀한 상황이 당연해질 때까지 우리는 지금보다 2배는 더 노력해야 하고, 환경을 소중히 여기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사치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환경을 지키겠다는 소신을 갖고 조금씩 나아간다면, 2080년에 태어난 아기들은 맑은 하늘을 보면서 자라고, 동물원을 지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할지도 모른다는 미래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땅한 세계관을 영화라는 아름다운 미디어를 통해 알려주는 서울환경영화제의 번영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