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최근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라는 개념이 자주 언급된다. 영어나 한자 표기가 없다면 인류에게 부과되는 세금 정도로 추측되기도 하는 용어다. 하지만 인류세는 지질학적 시대 구분을 뜻한다. 지질시대의 구분표는 학창 시절 한 번쯤은 접해보았을 것이다. 지질시대는 먼저, 지구가 탄생한 선캄브리아대로부터 시작한다. 이후 육상 식물이 출현한 고생대, 공룡 등 파충류가 번성한 중생대, 포유류가 번성한 신생대로 구분된다. 신생대를 세분화하면 약 6천5백만 년 전 공룡 멸종 이후부터 약 170만 년 전까지를 제3기, 그 후로부터 현재까지를 제4기로 부른다.

지질시대 구분 Ⓒ scienceall

제4기는 다시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로 구분된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지질시대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다. 그렇다면 인류세는 어디에 있을까? 인류세는 아직 공인된 개념이 아니라 표기되지는 않았다. 다만,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인류세는 네덜란드의 화학자인 파울 크뤼천(Paul Crutzen, 1933~)과 규조류(硅藻類) 연구자인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 1934~2012)가 2000년도에 제기한 개념으로, 인간의 행위에 의해 지질학적 조건과 지구 시스템 순환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설명하는 지질학적 시대구분이다. 인류세의 시작을 언제로 보느냐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크뤼천의 경우 산업혁명을 그 시작으로 본다. 극지방에 갇혀 있던 공기 중 이산화탄소와 메탄 농도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가 증기 엔진을 설계한 1784년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지금 어느 지질시대에 살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류세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환경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는 인간과 자연의 밀접한 관계성에 대해 말한다. 자연스레 현대 사회에서 문제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나 환경오염 문제에 적극적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인간이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다.

 

인류세 논의는 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예술 분야에서도 인류세 개념을 중심으로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예술이 인류의 생존에 무용하다는 입장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환경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환기시키고 사람들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속한다. 1960년대부터 환경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동시대 미술에서는 인류세라는 담론 아래 생태 미술, 에코 아트, 환경 미술, 지속가능한 예술, 자연 미술 등의 이름으로 생태학과 예술 분야의 접점이 형성되는 중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인류세 담론을 다루고 있는 작가로 터키 태생의 피나 욜다스(Pinar Yoldas, 1979~)를 들 수 있다. 그는 작가와 건축가,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자신을 유기적 생물화학 연구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가 2013~2014년에 생태계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인류세 담론 속 과학과 예술에 대한 가설을 실험했기 때문이다. 욜다스는 연구를 바탕으로 진화에 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 찬 바다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이 시작되었다면, 이 현대적 태고의 진흙 속에서 어떤 종류의 생물이 출현할까?

– 피나 욜다스

 

피나 욜다스의 프로젝트는 태평양 해역에 위치한 플라스틱 폐기물 지역에서 시작됐다. 이 지역은 쓰레기 섬이라고도 불렀는데, 바람과 해류의 영향 때문에 플라스틱을 비롯한 온갖 쓰레기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욜다스는 플라스틱이 생명체들의 둥지가 되어 산란을 위한 장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보고, 실험 끝에 플라스틱 폐기물에 의해 생겨난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피나 욜다스, <과잉의 에코시스템> 왼쪽부터 태평양 풍선 거북(pacific balloon turtle), 플라스티스페어 곤충(plastisphere insects), 변색한 알(transchromatic eggs), 2014피나 욜다스, <과잉의 에코시스템> 왼쪽부터 태평양 풍선 거북(pacific balloon turtle), 플라스티스페어 곤충(plastisphere insects), 변색한 알(transchromatic eggs), 2014 Ⓒ Pinar Yoldas

<과잉의 에코시스템(An Ecosystem of Excess, 2014)>이라고 이름 붙인 이 작업에서 욜다스는 태평양 풍선 거북, 플라스틱스페어 곤충, 변색한 알과 같이 인위적 생명체를 보여주면서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무한 소비주의 시대가 도래했고, 무분별한 소비와 함께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이 버려진다. 욜다스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 속에서 진화한 생물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욜다스의 작업은 짐바브웨 출신의 의상 디자이너 나차이 오드리 치자(Natsai Audrey Chieza)를 떠오르게 한다. 치자는 미생물을 활용하여 의상을 디자인한다. 그의 작업은 미생물 역시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류세 논의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패션 산업은 섬유 폐기물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산업군 중 하나다. 치자는 섬유 폐기물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흙 속의 스트렙토마이시스 코엘리컬러(Streptomyces coelicolor)라는 박테리아로 의상을 만든다. 박테리아가 스스로 색소를 생성하고 이것으로 섬유를 염색할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옷감 위에 박테리아를 배양하여 화학물질 없이 200mL의 물만으로 옷감을 염색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에 의해 환경이 파괴되었지만, 다시 인간의 이러한 행위로 인해 자연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치자의 작업은 인류세 시대의 대안을 제시한다.

 

길베르토 에스파자(Gilberto Esparza, 1975~)와 같은 작가들도 도시 속에서 기술과 환경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인류세 시대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멕시코 출생의 에스파자는 2007년 <도시 기생충(Parasitos Urbanos)>이라고 이름 붙인 작업에서 다양한 폐기물을 혼합하여 만든 로봇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로봇들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신주 위 전선이나 도심 속 쓰레기 더미에서 서식하는데, 로봇의 형태는 다르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을 먹고 살아간다는 점은 동일하다. 전신주에 흐르는 에너지를 섭취하거나, 조명 옆에서 살면서 빛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식이다. 인간이 버린 것들을 다시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며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작은 로봇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공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에스파자는 그의 또 다른 작업 <유목하는 식물(Nomadic Plants, 2010~2013)>에서도 강의 오염 문제를 다루며 공생을 강조한다. 로봇은 영양분이 필요하면 오염된 강으로 스스로 이동해 물을 섭취한다. 오염된 물에 함유된 원소를 분해해 뇌 회로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로봇이다. 오염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로봇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스스로 환경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그 환경 안에서 고군분투하며 생존하고자 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작품 감상을 통해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고 인지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확립되었는데, 이러한 사고는 무엇보다 인간이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 이외의 것을 배제할 근거가 된다. 하지만 점차 근대적인 이분법적 자세로는 세상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는 논의가 확산하고 있다. 인간과 환경을 구분하여 단지 환경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인간과 환경이 동등한 입장에서 공생하는 것이 필요하다.

길베르토 에스파자, <유목하는 식물>, 2010~2013 Ⓒ Gilberto Esparza

인류세 시대의 예술 작품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운다. 우리는 작가가 시각화한 작품들을 통해 그동안 간과해온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예술이 새로운 시각적 충격을 생산함으로써 사회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현실을 시각화해 보여준 예술 작품들은 현 상황이 지속할 때 야기되는 문제들을 짚고, 이대로 가다간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문제가 있는 측면들을 다시 재조명해준다. 생태 문제를 다룬 작가들의 작품은 미학적인 경험을 넘어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촉구한다. 작가와 관객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가는 관객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사람들에게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