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해마다 바다와 영화제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이 밀려드는 부산. 부산의 해변과 다채로운 맛집, 세련된 카페 등 모두 놓칠 수 없겠지만 짐을 싸며 책 한 권 정도는 꼭 챙기는 여행객이라면 부산의 다양한 인문학 공간들도 즐겨찾기에 넣어야겠다. 피란 수도였던 부산은 현대 문화를 즐기기에 무척 적합한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산에 맛집과 흥밋거리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많은 포문이 일었던 만큼 근대의 문화 요소 또한 여전히 숨 쉬듯 살아있다. 서점에서 시작해 미술관, 박물관, 카페, 그리고 식당까지. 이번 여름, 부산을 찾을 계획이라면 즐길 거리와 함께 새로운 배울 거리도 일정에 한 스푼 첨가해 보자.

청소년의,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을 위한 인디고서원

부산 수영구 수영로408번길 28

인디고서원은 수영구 주택단지에 위치한 서점이다. 엄밀히 말해 관광객들이 많이 찾지는 않는, 작은 골목에 작은 상점이 요모조모 자리한 옛 동네에 있다. 지하철 남천역 1번 출구로 나와 서점으로 향하는 골목을 향해 걷다 보면 수학학원, 영어학원 등 다양한 종류의 학원 간판이 눈에 띈다. 그만큼 방과 후 청소년의 밀집도가 높다. 다른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밀집한 학원 건물 사이에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서점이 있다면, 들러볼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학원과 학원 사이의 징검다리 같은 인디고서원에서 아이들은 잠시간 좋은 책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이처럼 청소년 인문학 서점, 인디고서원은 청소년들의 징검다리 쉼터 역할을 한다. 2004년에 문을 연 이후 문화, 역사/사회, 철학, 예술, 교육, 생태/환경으로 밀도 있게 구분된 서가를 큐레이션하고 있다. 특별히 인디고서원은 이제 막 태어난 신간만 주목하지 않는다. 눈 밝은 독자에게 발견되길 바라는, 오래전 출간된 보석 같은 책도 같은 위치에 동등하게 꽂혀 있다. 서가를 찬찬히 둘러보다 보면 이곳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잡지 <인디고잉>이 눈에 띈다. <인디고잉>은 여러 청소년이 직접 만드는 인문 교양지이다.

 

이 외에도 인디고서원은 청소년을 위한, 또는 청소년과 함께한 다양한 단행본을 발행하고 있다. 만약 인디고서원을 부산이 아닌 곳에서 먼저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들에 주목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웬만한 성인 독자보다 훨씬 깊은 토론과 사유의 과정을 담아낸 이 책들을 보다 보면, 서점 안에서 청소년들이 차곡차곡 쌓아왔을 시간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 모든 과정이 책과 독서, 토론의 결과물임을 떠올려 보니 그 무게가 문득 묵직해진다. 좋은 공간이 좋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가 결국 좋은 마을을 만들어 갈 것이다.

청소년인디고서원 건물과 내부 전경 Ⓒ 직접 촬영
기간별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에코토피아 Ⓒ 직접 촬영

작은 혁명가들을 위한 에코토피아

부산 수영구 수영로408번길 30-6 

인디고서원 옆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 나무로 된 낮은 덧문을 열고 들어가면 소담한 정원과 건물이 보인다. 그곳에 <에코토피아>라고 하는 이름의 채식 식당이 있다. 작은 혁명가를 위한 작은 식당이라는 부제를 단 이 작고 아늑한 공간은 생태주의를 실천하는 식당으로, 인디고서원에서 함께 경영 중이다. 채식 카레, 두부 스테이크, 채소 그라탱 등의 메뉴가 마련되어 있지만 커피나 차와 같은 음료만 즐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창가를 통해 보이는 풋풋한 나무와 풀, 꽃의 정경이 고요하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차분한 시간을 보내게 만든다. 인디고서원에서 고른 책을 읽으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꿈꾸는 에코 도시락, 영화관 옆 심야식당 등 음식에 인문학을 접목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도 진행한다. 필자가 방문했던 4월에는 책 『창가의 토토』의 고바야시 교장 선생님의 말에서 따온 <나다운 게 아름다운 거야>라는 제목으로 책에서 이야기하는 소중한 가치들을 봄에 어울리는 메뉴인 딸기 샌드위치, 레인보우 팬케이크, 브로콜리 오믈렛 롤 등을 만들며 이야기 나누는 총 4회의 수업(유료)을 진행했다.

 

5월부터 9월까지는 매월 1회 <지구는 우리 집 – 제로웨이스트 삶을 향하여>라는 행사를 진행한다. 생태 전환적 삶, 제로웨이스트 실천에 관심 있는 어린이(10세~13세)와 보호자와 함께 인문학 강의와 제로웨이스트 삶의 실천 방법을 영화, 강의, 요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자라나는 세대는 어느덧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심각해진 요즘의 환경과 생태에 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는 것도 인문 여행의 즐거움이 될 듯싶다. 에코토피아의 수익은 네팔의 인디고 도서관 운영과 청소년 교육을 위해 쓰인다.

당신을 향해 열려 있는 문화공간 빈빈

부산 수영구 남천서로 20 1층

인디고서원에서 도보로 12분, 남천초등학교 옆에는 2층 양옥집을 개조한 단정한 카페, 문화공간 빈빈이 있다. 옆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즐거운 목소리로 재잘대며 하교하는 모습이 정겨운 이곳은 그저 동네의 작은 카페가 아닌 명실공히 문화공간이다. 1996년 4월, 부산진구 서면에서 빈빈 아카데미 김종희 교육 연구소로 시작해 2010년에는 문화공간 빈빈(文化空間彬彬)만의 사옥을 지어 개관했다. 지금의 사옥은 2015년 2월에 이전해 자리 잡은 곳이다. 처음에는 인문학 강의, 음악회, 단체 강연을 위한 열린 강의실로서의 기능에 주력했으나 현재는 지역 주민이 편히 들릴 수 있는 카페 공간의 역할도 겸하며 그 문턱을 낮췄다.

 

음료 주문 후 주변을 둘러보면 공간 여기저기에 무심한 듯 자연스럽게 놓인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기간을 두고 전시 중인 작품들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황외성 화가의 크고 작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테이블 옆, 나무 선반 위, 좌식 공간 등을 아름답게 꾸민 액자를 보고 있으면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격조 있는 작품을 누리게 된다. 문화프로그램이나 모임을 위한 대관도 진행 중이다. 2시간 기준 1인 1만 원(10명 단체 기준)이며 정기모임 대관도 가능하다고 하니, 부산을 찾은 문화단체나 지역의 독서 모임 등에서 편히 찾을 만하다. 물론 혼자 온다고 해도 커다란 통창 앞에서의 여유를 즐기며 커피와 함께 독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문화공간 빈빈의 내부 전경 Ⓒ 직접 촬영
부산시립미술관 별관 이우환공간 Ⓒ 부산시립미술관

명실공히 부산 예술의 중심 부산시립미술관+별관 이우환공간

부산 해운대구 APEC로 58 

다른 지역으로 미술관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가? 해외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꼭 찾는 사람이라고 해도 의외로 국내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국내 여행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은 여행지 선택지로 많이들 넣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부산 벡스코를 여러 번 오갔어도 바로 옆에 부산시립미술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친 이들도 많다.

 

올해 초 진행된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 전시(2023.01.26~04.16) 덕분에 많은 이들이 부산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무라카미좀비의 전시가 끝났다고 해서 부산시립미술관의 전시 여정이 완전히 막을 내린 건 아니다. 관람객들이 부산을 많이 찾을 즈음인 올여름에는 본관에서는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신진 작가들의 실험정신과 독창적인 작품을 소개하는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3 <슬픈 나의 젊은 날>(2023.03.10~08.06)이 진행된다. 또 지하 1층 어린이갤러리에서는 김홍석 작가의 스티로폼 조소 작품전 <많은 사람들>(2023.05.04~12.17)이, 별관에서는 이우환공간의 상설 전시도 계속된다.

 

별관 이우환 공간은 일본 나오시마에 위치한 이우환 미술관에 이은 두 번째 이우환 미술관이다. 2015년 4월 개관한 이곳은 작가가 직접 공간 설계 과정에서부터 디자인까지 모두 참여했다. 강하게 선팅된 창문히 나란히 붙어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이 심플한 건물은 돌 하나, 철판 하나를 놓음으로써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의 작품과도 많이 닮았다. 작가의 작품을 오롯이 잘 담아내기 위해 건립된 건물에서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경험은 감상에 있어 또다른 깊이를 자아낼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요한 미술관 내부를 거닐며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산책 같은 느낌이 든다. 부산시립미술관 본관은 개인 5천 원, 이우환공간은 부산광역시민 2천 원, 그 외 지역주민 3천 원의 관람료를 지불해야 하나, 5월 18일 현재 한시적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도시를 지나간 흔적과 기록의 공간 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 중구 대청로 104 

구한국은행 부산 본점 건물이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2023년 12월 개관을 앞두고 재단장 중이다. 이에 구 근대역사관은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이 되어 기존 전시관에서 인문학 거점 공간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외부는 예전과 동일하게 외벽 중앙의 넝쿨 문양과 창호 주변의 연꽃 모양이 도드라지는 근대식 건축물 양식이지만 내부는 세련된 서점이나 도서관 같은 모양새다. 누구라도 편하게 들어와 1층과 2층에 비치된 책을 읽으며 쉬어 갈 수 있다.

 

별관 1층에는 부산 근현대사 관련된 책을 비롯해 1만여 권의 도서와 아카이브 자료가 소장되어 있고, 2층에는 건물의 역사와 건물 구조를 살필 수 있는 전시 공간, 관람객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023년 6월 15일(목)까지는 <부산의 책-시대의 감정, 지역의 얼굴>이라는 북큐레이션 전시도 진행한다. 이번 북큐레이션 전시에서는 부산, 전쟁, 근대를 키워드로 삼아 1950년대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 출판됐거나, 부산에 대해 다룬 희귀 단행본과 잡지 등 40여 권을 소개하고 있다. 시민들이 참여한 부산의 책탑도 소소한 볼거리다. 올 12월, 본관 오픈일에 맞춰 함께 방문해도 좋겠다.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외부 Ⓒ 직접 촬영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내부 전경 Ⓒ 직접 촬영

부산의 첫 박물관과 우리의 역사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 임시수도기념관

부산 서구 구덕로 225 / 부산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

석당박물관은 부산에 세워진 첫 박물관이지만 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보수동책방골목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으니 책방골목을 방문했던 여행자라면 그 김에 석당박물관도 함께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은 1911년 11월에 개관한 부산 최초의 박물관으로, 2009년에 현재의 건물(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로 이전해 개관했다. 양옆으로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은 갈색 벽돌 건물이 관람객을 압도하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부산에서 가장 많은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불교미술, 도자, 고고학 유물, 서화, 민속품 등 다양하고 풍부한 전시품을 자랑한다. 3층에 있는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기록실에서는 1925년 경남도청, 1950년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그리고 현 건물의 축소모형과 수리 및 복원 시에 수습한 각종 부재를 전시하고 있다.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전시유물을 설명하는 음성 안내기를 대여한다.

 

석당박물관에서 도보 10분 거리에는 임시수도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도착지를 바로 앞에 앞두고 가파른 계단을 한 번 더 올라야 하지만 이런 골목 안에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숨어 있었단 사실이 방문객을 깜짝 놀라게 한다. 1926년에 건립되어 경상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당시 부산 임시수도 시기(1950~53)에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한 것을 계기로 부산시가 건물을 매입해 1984년부터 건물 내부에 한국전쟁의 각종 사진, 유물 등의 자료를 전시 및 공개하였다. 이 중에서도 부산 임시수도인 대통령 관저는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 내외 및 비서들이 거주하며 집무를 수행하고 주요 국빈을 맞이했던 공간을 당시의 실내 구조와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했으며, 증언의 방, 생각의 방, 회상의 방 등을 통해 같은 시기를 살아 낸 다른 층위의 인물들도 조명했다. 봄에는 2층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는 벚꽃 가득한 풍경이 절경이라고 하니 방문 시 참고하자.

기찻길 옆, 모두를 위한 열린 공간 창비부산

부산 동구 중앙대로209번길 16 2층

기차 출발 시간까지 아직 좀 남아 있는데, 주변에 마땅히 들를 만한 곳이 없다면? 지하철 부산역 7번 출구에서 도보 4분 거리에 있는 창비부산이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출판사 창비가 운영하는 도서 문화공간으로 1927년에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이자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백제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다.

 

1층에 있는 커피숍을 지나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돌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창비부산의 입구가 있다. 다양한 열람용 도서와 구매할 수 있는 신간 도서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누구라도 무료로 편하게 열람하며 이용할 수 있다. 특히 2~10인 사이의 인원이라면 인스타그램 계정(@changbibusan)을 통해 사전 예약 후 이용 가능한 독서 모임 공간이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북콘서트, 작가 강연 등도 펼쳐지니 부산 시민이라면 더욱 자주 들리게 될 것 같다.

창비부산 내부 전경 Ⓒ 직접 촬영
북두칠성 내부 전경 Ⓒ 직접 촬영

인문의 바다, 부산의 내일을 준비하는 북두칠성도서관

부산 동구 충장대로 160 협성마리나G7 B동 1층

부산역 근처에는 창비부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최근 작은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부산역 바로 옆에 위치한 협성마리나G7 건물 1층에 자리한 북두칠성도서관이다. 협동문화재단에서 설립한 공간문화 플랫폼으로, 도서 대여는 유료 회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지만 도서관 이용과 열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넓은 공간을 채운 반원형의 낮은 서가를 따라 둥글둥글 자연스럽게 돌며 함께 읽을 책을 고르거나 책 표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넘치도록 즐겁다. 가구도 동선도 곡선으로 이어져 부드럽게 탐험하듯 서가를 둘러보게 만든다. 도서관 가운데 위치한 테마 서가는 총 7개의 주제로 나뉘어 있으며 각 주제는 김미향 작가(인문 교양), 김경집 교수(교육), 정선영 교수(심리), 이윤숙 에코페미니스트(에코), 정희진 박사(젠더수업), 이다혜 작가(모험)가 큐레이팅하였다. 각계의 전문가가 구성한 이 큐레이션 서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방문해 볼 이유가 충분하다.

ChatGPT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빠르게 취합하여 알려 준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가 걸음을 옮겨 찾아간 곳에서 몸으로 직접 배우고 경험해야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미 그것이 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 경험해야만 생생하게 와 닿는 것들, 책으로 보아 알고 있었던 것들을 현장에서 다시 만날 때의 벅차오름. 팽팽한 긴장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낯설었던 지역을 방문하거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곳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려는 열린 시도가 절실하다. 올여름 휴가 때는 평소에 알던 부산이 아닌 인문의 바다, 부산을 거닐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