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포스트 소비에트(Post-Soviet)의 부활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포스트 소비에트’ 트렌드를 들여다봤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오늘날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 특히나 유행이 빠르게 돌고 도는 패션계는 언제나 새로움에 목마르다. ‘새로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 것이 아니라 새롭게 느끼는 것이다’라는 책 속의 문구처럼 세상에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진정한 새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다만 관심을 받지 않았던 것들이 수면 위에 떠올라 ‘새롭게 보이는 것’ 일 수도. 최근 몇 년 간 패션계에서 새롭게 떠오른 고샤 루브친스키와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 그리고 이들로부터 비롯된 ‘포스트 소비에트(Post-Soviet)’ 트렌드를 보고 드는 생각이다.

고샤 루브친스키(Gosha Rubchinskiy)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브랜드 ‘고샤 루브친스키(Gosha Rubchinskiy)’는 이미 패션계에서 메인 키워드가 된 지 오래다. 퀭한 얼굴에 스킨헤드를 한 소년들이 헐렁한 셔츠와 배바지를 입고서 무심한 표정으로 런웨이를 활보한다. 과거 모스크바의 갱들이 입던 아디다스의 트랙 슈트를 자기 방식대로 연출했던 것이 고샤 루브친스키의 시작이었다. 2010년에는 꼼 데 가르송 총괄 디렉터 아드리안 조프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승승장구한 고샤 루브친스키는 아디다스, 리복, 필라, 카파 등 스트릿 브랜드뿐만 아니라 명품 브랜드 버버리와의 협업으로 해당 브랜드의 제2의 전성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

 

베트멍의 대표 디자이너이자 발렌시아가의 아트 디렉터이기도 한 조지아 출신의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도 빼놓을 수 없다. 베트멍 파리 런웨이에서 선보인 국제 배송업체 ‘DHL 로고 티셔츠’와 이케아의 장바구니를 쏙 빼 닮은 발렌시아가 ‘캐리 쇼퍼 백’은 주류 패션 업계에선 그야말로 기발하고도 새로운 발상이었다. 옷을 잘못 만들어 소매가 길게 늘어진 듯한 맨투맨 티셔츠는 국내외 스타들이 입어 잘 알려지기도 했다. 뎀나 바잘리아는 스트릿 문화와 뉴 아방가르드를 접목한 신선한 스타일로 패션계에 돌풍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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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베트멍 x DHL 2018 봄,여름 콜라보레이션 티셔츠 (오) 발렌시아가의 캐리 쇼퍼 백

반항, 자유로움, 청춘의 아이콘, 유스 컬처(Youth Culture)

 

러시아 모스크바와 조지아. 독특한 패션 철학으로 인더스트리에 돌풍을 일으킨 두 디자이너의 인기는 그들의 출신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번졌다. 파리나 런던, 뉴욕처럼 주류 패션계에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동유럽의 생경한 국가였고 그들이 만들어낸 관념을 뒤집는 반항적인 ‘유스 컬처(Youth Culture)’는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것이었다. 반항, 자유로움, 청춘의 아이콘으로 세계적인 문화 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두 인물은 소련 해체 이후 혼란스러운 ‘구 소비에트(Post-Soviet)’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베트멍의 2018 Spring Collection.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모델이다.

모든 의상에 키릴 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고샤 루브친스키는 1985년 태어나 199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다. 1990년대는 91년 소련이 해체되며 문화적 격변기를 맞은 시기다. 이전에 소련 국가에서는 서방의 의류나 화장품, 전자제품 등 소비재의 수입과 유통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모스크바 등 대도시에만 설치된 외화 전용 백화점에서 구입이 가능했지만 외국인이나 공산당 간부와 그 가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 서방의 문물이 스며들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서방의 대중문화는 음지의 방식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계속된 소련의 경제적 공황 끝에 1987년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굳게 닫혀 있던 문호를 열고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다. 억압된 사회에 갑작스럽게 서방세계의 패션, 음악, 물건, 심지어 마약까지 가감 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받아들이게 됐다. 독재와 자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은 억압된 사회에서 견뎌왔던 결핍과 반항심을 촉매로 독특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다. 상반되는 두 세계의 충돌로 혼란스러운 9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청년들은 마침내 성장하여 세계에 존재감을 드러냈고, 이들로 시작된 동구권 유럽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러시아를 비롯한 조지아, 우크라이나 등의 구 소련 국가로까지 확장되는 중이며 구 소련 국가 출신의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 또한 조명 받고 있다.

러시아 키릴어로 적혀 있는 고샤 루브친스키의 티셔츠

포스트 소비에트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모두가 포스트 소비에트 트렌드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구 소련에 속했던 국가의 일부 아티스트들은 ‘포스트 소비에트’ 스타일로 규정되는 것이 근거 없다고 말한다. 고샤 루브친스키가 스트릿웨어에 애국심을 불어넣었다고 러시아의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는 한편으로, 나라 전체를 회색 건물과 트랙 슈트를 입은 청년들의 이미지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저 서구 사람들에게 러시아란 나라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진부한 방식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포스트 소비에트’라는 라벨은 견디기 힘들다. 계속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려고 해도 결국엔 라벨이 따라붙는다”라는 한 포토그래퍼의 말처럼 정작 다른 유럽 국가들과 별다를 것 없다고 느끼는 그들을 동유럽 혹은 구 소련이라는 상자 속에 가두는 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소련 국가들이 전 세계 사람들의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에겐 늘 있었던 일상과도 같았던 이미지들은 외부인들에겐 신선한 자극이 된다. 오래되고 낡은 물건이 새삼스레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는 현상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체 이후 남은 구소련 국가의 이미지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새롭게 느껴 지기도 하는 것이다. 동일선상에서 해외 패션문화 매거진들은 계속해서 ‘Post-Soviet’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더 궁금하다면 다음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포스트 소비에트’ 트렌드와 구 소련 국가들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Post-Soviet’ 주제 다큐멘터리

 

 

Inside Gosha Rubchinskjy’s Post-Soviet Generation (2017)

고샤 루브친스키는 소련 해체 이후 9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다. 90년대에 대한 향수와 스케이트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이 브랜드는 레트로한 감성과 함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스타일을 선보인다. ‘유스(Youth) 컬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고샤 루브친스키에 대해 다룬 i-D 매거진의 다큐멘터리 영상.

Post-Soviet Visions (2018)

포스트 소비에트 트렌드에 대해 그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The Calvert Journal은 직접 이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견해를 물었다. 포토그래퍼, 뮤지션, 패션 디자이너 등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이들의 솔직한 견해는 갑작스러운 세계의 관심이 마냥 달갑지 만은 않다. ‘포스트 소비에트’라는 개념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하나의 ‘라벨’로 작용할 뿐이다.

Ukraine’s Underground Rave Revolution (2016)

구 소련에 속해 있던 우크라이나는 바람 잘 날 없다.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불안한 정치환경과 만연한 실업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그러는 와중에 일어난 언더그라운드 레이브 씬과 젊은 세대들의 창조적인 움직임은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영상에서는 90년대 버려진 창고와 격납고, 하우스 등지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밤새 춤을 추었던 레이브 씬의 부활과 우크라이나의 젊은 세대들에 대해 다룬다.

Fake Streetwear Russia (2018)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짝퉁 시장’이 성행했고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 중이다. 구 소련 시절, 진품을 입기에는 여유가 없지만 쿨 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adibas’, ‘abibas’ 등의 짝퉁 아디다스를 입었다. 구 소련에서 아디다스가 신격화된 브랜드가 된 데에는 일련의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다. 1980년 공산당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당시 독일 브랜드였던 아디다스의 후원을 받은 선수들이 아디다스의 트랙 슈트와 운동화를 보급받은 데에서 시작된 이야기. Highsnobiety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짝퉁 문화’의 어제와 오늘을 다큐멘터리로 포착했다.

Grisha’s Guide to Kiev (2018)

재치 있게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대해 소개하는 이 영상은 사실 패션 필름이기도 하다. 이 ‘패션 필름 같지 않은 패션 필름’을 통해 우크라이나 출신 디자이너 브랜드 크세이니아 슈나이더의 패션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키예프의 풍부한 문화와 역사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