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platform)을 넘어 프로토콜로(protocol)
최근 급성장한 플랫폼 경제가 현재 세계 경제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에 따르면 2025년 디지털 플랫폼 매출액은 60조 달러(한화 약 7경 2천조 원)로 예상되며, 앞으로 10년간 전 세계 신규 부가가치의 70%가 디지털 플랫폼에서 창출될 것이라고 한다. 2021년 4월 시가총액 기준 세계 10대 기업 중 6개 기업이 플랫폼 제공 기업이다. 이러한 급성장과 시장 지배력은 다양한 폐해를 낳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자성이자 개선으로서 프로토콜 경제가 언급되고 있다.
프로토콜 경제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공정한 분배와 상생을 달성하려는 개념이다. 개인 간 프로토콜(약속)을 정해 거래하는 생태계로서, 탈중앙화와 탈독점화를 통해 사용자 간 주도적 거래를 도모하는 공정한 플랫폼 경제다. 여기서 공정한의 의미는 플랫폼 기업이 정한 규칙이 아닌,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정한 규칙에 따라 플랫폼 경제 성장의 과실을 공유함을 뜻한다. 플랫폼 경제는 프로토콜 경제가 플랫폼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플랫폼 경제로의 진화를 목표로 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프로토콜 경제를 구현하기 위한 핵심 기술은 블록체인으로, 개방형 네트워크와 규칙의 투명성을 증명하고 공정한 분배를 위해 필요하다.
양면시장(Two-sided market) 플랫폼의 한계
플랫폼이란 개념은 2002년 프랑스 경제학자 장 티롤(Jeon Tirole) 톨루즈 제1대학교 교수가 양면시장(Two-sided market) 플랫폼의 존재를 경제학적으로 증명하면서 알려졌다. 장 티롤은 평생 시장 독과점 문제에 대해 정책 당국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연구했는데, 양면시장에서는 기업이 깔아놓은 마당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집단(생산자, 소비가)이 만나 상품 또는 서비스를 사고판다. 생산하는 사람, 소비하는 사람은 모두 기업 밖에 있지만, 이들 모두가 기업이 깔아놓은 마당에서 만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우버, 배달의 민족 등이 모두 그 예이다.
장 티롤은 양면시장 이론 증명으로 201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정의를 좀 더 정확하게 빌려오자면 양면시장, 즉 플랫폼 시장은 완전히 서로 다른 상호 독립적인 양측의 이용자, 고객 집단 간 거래를 중개 및 매개하는 인터페이스다. 그는 플랫폼 시장이 왜 전통 시장과 다른지 증명함으로써, 전통시장의 규제 정책을 그대로 플랫폼 시장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주장은 노벨상을 받은 2014년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플랫폼 시장에 대한 규제책을 제안하지 않아, 플랫폼 시장이 규제의 사각지대 속 여러 가지 폐해를 낳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GAFA(Google, Apple, Facebook, Amazon)로 대표되는 공룡 IT 기업의 승자 독식 구조, 기업이 자체적으로 정한 폐쇄적인 분배(수수료, 보상) 시스템에 대한 공정성 논란, 긱 워커의 고용불안과 저임금, 조세 회피 논란(이후 2021년 7월 OECD 주요 20개국 포괄적 이행체계(IF)의 디지털세 합의안 제정 배경이 됨)이 모두 그 예이다.
2017년 말, 장 티롤은 새롭게 출판한 <공공선을 위한 경제학>(Economics for the Common Good)이란 책에서 이 논의를 발전시켜 플랫폼 기업이 독과점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원인은 네트워크 외부효과다.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충족해줄 수 있는 유저를 만나려면 서로 같은 네트워크에 있어야 한다. 내 친구들이 트위터에 있으면, 트위터로 갈 수밖에 없다. 많은 유저가 모이기에 더욱더 많은 유저가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그 네트워크 때문에 제3자가 덕을 보는 상황이 바로 네트워크 외부효과이다.
두 번째는 규모의 경제다. 검색 엔진, UX/UI 디자인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당연히 초창기부터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기업만이 승리할 것이며 이렇게 공고화된 승리는 신생 기업의 진입을 막는다. 그러면 각종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규제는 어떻게 할까? 그는 천편일률적인 하나의 규제책이 아니라, 각 사업자가 어떻게 개별적으로 독과점을 형성하는지를 분석해 케이스별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로토콜 경제의 중심에 선 블록체인 기술
블록체인 기술이 프로토콜 경제의 핵심인 이유는 거대 플랫폼 기업의 독과점을 낳는 구조적 원인을 전면에서 대응하기 때문이다. 프로토콜은 사전적 의미로 인터넷에서 활용되는 통신 규약을 뜻하나, 경제적으로는 시장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만들고 지키는 규약이라는 의미로 쓰이며 이런 약속을 토대로 탈중앙화, 탈독점화, 공정한 분배(분권화)를 추구한다. 국내 중소벤처기업부는 2021년 프로토콜 경제의 4대 선도모델을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블록체인 기술이 핵심이자 대안으로 꼽히는 이유는 개방형 네트워크와 규칙의 투명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단위인 블록을 체인 형태로 연결해 수많은 컴퓨터(네트워크 참여자)에 동시에 복제하고 저장하는 분산형 데이터 저장 기술을 말한다. 체인처럼 엮인 블록들의 형태 때문에 블록체인이라고 불린다.
블록은 생성된 순서에 따라 체인 모양으로 줄지어 엮인다. 개인 간 거래가 최초로 체결된 후부터 이후 거래 내용이 순차적으로 블록체인 안에 저장되기에 모든 사용자가 블록체인 안에 저장된 거래 장부를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A와 B, 두 사람이 거래하는데 그들이 속한 네트워크에 총 네 사람이 참여하고 있다면 A와 B의 거래 내역은 4개의 블록으로 생성되어 네트워크에 속한 참여자 전원에게 전송된다. 그렇기에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보유자 전원의 장부를 비교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처럼 네트워크 참여자 간 거래 내역은 은행이 모든 거래 내역을 가진 기존의 거래 방식과 달리, 데이터가 분산된 형태로 여러 곳에 저장되어 공공 거래장부나 분산거래 장부라고 불리기도 한다.
거래 하나가 이루어질 때마다 참여자끼리 정보를 공유하기에 데이터 위변조가 어려우며, 거래 내역을 다른 참여자와 대조하며 확인해야 하기에 쉽게 위변조 적발이 가능하다. 이렇게 거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해시(Hash) 값을 대조하며, 이러한 데이터 검증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정 수준의 가상화폐를 보상으로 지급한다. 보상을 얻는 이 행위를 가상화폐 채굴(Mining)이라고 한다.
블록체인은 유형에 따라 퍼블릭(Public), 프라이빗(Private)으로 나뉜다. 퍼블릭은 말 그대로 모두가 참여할 수 있으며, 상호검증을 거치고, 거래 내역도 모두에게 공개된다. 단, 참여자가 많기 때문에 데이터 처리 속도는 느리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상통화 비트코인, 이더리움이 있다. 프라이빗은 기업이나 기관이 보안을 위해 주로 사용되며, 지정된 이만 참여할 수 있다. 승인된 이들만 접속할 수 있기에 처리 속도는 빠른 편이다. 금융권에서는 코다, 범용으로는 하이퍼레저 등이 사용된다.
평등한 공유를 꿈꾸는 프로토콜 경제 스타트업
블록체인이 지닌 개방성, 투명성, 분산형의 특징은 정보의 탈집중화를 유발한다. 그렇기에 프로토콜 경제 구현을 위한 핵심 기술이 된다. 실제 프로토콜 경제가 적용된 사례로는 이스라엘 라주즈(La‘Zooz)를 들 수 있다. 라주즈는 2014년 이스라엘에서 개발한 차량공유 서비스다. 얼핏 보면 우버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더리움 기반 가상자산 기술을 활용해 개발자, 사용자, 후원자를 위한 공정한 공유 보상 메커니즘을 적용한다.
라주즈는 별도의 수수료를 청구하지 않는다. 대신 서비스 이용 시 암호화폐 주즈(Zooz)라는 토큰으로 결제가 이뤄지게 한다. 블록체인 기반이기에 별도 플랫폼 운영 없이 이용자와 기사가 실시간으로 연결돼 손님 정보 제공, 결제가 가능하게 만든다. 플랫폼이 없으니 수수료도 부여되지 않는다. 별도의 수수료 없이 영업하는 대신,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면 암호화폐 주즈의 가치가 상승해 이익을 얻는다. 이용자가 곧 수익을 내는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2016년 4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SNS 스티밋(Steemit)도 글 좀 쓰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다. 보통 글을 쓴다면 블로그나 브런치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해당 플랫폼에 글을 올리면, 작가는 방문자 수를 기준으로 광고 수익 등 부수입을 얻는다. 이로 인해 더 많은 이의 관심을 끌기 위한 어뷰징 글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플랫폼의 질적 하락을 야기하기도 한다.
반면 스티밋에서 작가는 방문자 수와 상관없이 수익을 얻는다. 블록체인은 글의 공신력과 보안성을 향상하기 위해 작동한다. 스티밋에서는 다수 사용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특정 게시글을 삭제할 수 있기에 플랫폼 기업의 자의적인 삭제, 수정이 불가하다. 또한 한번 작성된 글 및 이에 대한 유저들의 평판이나 반응은 영원히 (분산된) 기록으로 남기에 함부로 어뷰징, 광고 글 등을 올리기가 조심스러워진다. 많은 유저에게 추천받은 글은 가상화폐의 일종인 스팀으로 보상받고, 가상화폐거래소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기존 블로그와 달리 외부 광고 수익에 의존하지 않는 셈이다. 이처럼 플랫폼(중개인)에 기대지 않고 이용자가 직접 수익 모델을 만들어간다는 점은 블록체인의 장점을 극대화한 동시에 가상통화의 통화가치에 따라 수익이 의존되기에 일면 불안정한 측면도 있다.
국내에서도 블록체인 기술과 프로토콜 경제는 그야말로 플랫폼 경제의 다음 스텝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2021년 중소벤처기업부는 핵심 추진 과제 중 하나로 플랫폼과 동행하는 프로토콜 경제로 공정한 혁신생태계 구현을 꼽았으며 박영선 전 장관은 플랫폼과 소상공인, 플랫폼 노동자 간 갈등 등 당면한 과제를 프로토콜 경제로 풀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국내 블록체인 분야에는 전문 투자업체 해시드(#Hashed)가 있다. 각종 임팩트 투자, 커뮤니티 빌딩, 엑셀러레이션(acceleration)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커뮤니티 빌딩의 일환으로 코워킹 스페이스인 해시드 라운지를 오픈했다. 강남에 위치한 약 400평 규모의 공간이 블록체인 기술 창업자들을 위한 비즈니스 오피스 공간, 공유 오피스,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한 컨퍼런스콜 회의장, 상시 네트워킹이 가능한 라운지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벤처캐피탈, 크립토펀드(cryptofund,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관련 사업에 투자하는 펀드), 엑셀러레이터들이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는 일종의 오프라인 플랫폼인 셈이다.
블록체인 분야 종사자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심지어 함께 거주하는 공간도 있다. 블록체인 철학에 깊이 공감한 청년들이 모여 만든 공유공간 논스(nonce)의 이야기다. 논스는 작업증명 알고리즘에서 해시값을 구하기 위해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임의의 숫자를 의미한다. 즉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논스를 하나씩 대답해야 한다. 답을 찾기 위한 필수적인 존재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따온 논스는 총 5개 호점이 하나의 타운하우스처럼 구성되어 있다. 1호점은 일명 마을 회관으로 불리는 공간으로 라운지와 커뮤니티 오피스, 루프탑이 있다. 2~5호점은 가정집을 개조한 커뮤니티 하우스로 16~20명이 함께 거주하는 코리빙 공간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공간뿐 아니라 모든 것을 공유하는 회사도 있다. 독일의 스타트업 슬락잇(Slock.it)은 블록체인과 사물인터넷을 결합해 공급자와 수요자가 아파트·사무실·자동차 등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한다. 소유자는 텐트나 잔디깎이처럼 계속 사용하지 않지만 꼭 필요한 물건을 슬락잇을 통해 빌려주고 수익을 얻고, 대여자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필요한 물건을 활용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당근마켓, 에어비앤비와 비슷한 플랫폼 서비스인 듯하나 이 서비스는 P2P 기반이다. 수요자가 공급자에게 직접 접근 권한을 얻어 사용하는 분산형 공유 플랫폼이다. 중개자(수수료) 없이 빈집이나, 자전거 혹은 자동차를 공유한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만난 낯선 타인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슬락잇은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소유자는 스마트 계약을 통해 본인의 자산에 대한 접근 권한, 세부 계약 내용을 등록해 둘 수 있다. 대여자는 계약에 동의하고 비용을 지불한 뒤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슬락잇은 이 스마트계약이 어느 곳에서든, 무엇이든 중재할 수 있도록 USN(Universal Sharing Network) 프로그램을 주력 제품으로 개발하고 있다. 어떤 것이든 공유하고, 빌려주고, 판매하세요라는 슬로건 속에서 이들은 소유보다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겨냥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플랫폼 시장 속에서 영원한 승자란 없다. 사실 기업에게 필연적인 과제는 생존과 승리이다. 1990년 포춘 500대 기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기업 중 2016년 여전히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95개에 불과하다. 81%가 생존하지 못했다. 2018년 이래로 포춘 500대 기업 리스트를 살펴보면 애플, 아마존,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 등 그야말로 플랫폼 시장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플랫폼 업체는 이용자들의 정보 독점 소유와 부당한 중개 수수료 등 비판과 회의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프로토콜 경제, 일명 슈퍼플루이드(superfluid)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슈퍼플루이드 경제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상품과 서비스의 거래 비용이 최소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개나 유통 수수료가 모두 사라져 거래 비용이 제로(0)가 되고, 정보는 더욱 투명해지며, 산업 간 경계는 무너진다.
슈퍼플루이드 시대는 우리는 앞으로 정보를 개별 소유해서는 안 되는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정하게. 이 모토 속에서 시장 패러다임은 블록체인 기술을 환영하고, 이용자들은 정보를 제공하는 객체만이 아닌, 정보를 제공하고 공평하게 공유하는 주체로 호명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이 분권화와 상호 책임의 원칙이 공존하는 이 패러다임은 플랫폼 시장의 진화일까? 아니면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할까?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고 했다. 독일 철학 연구가 임보라는 환상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현실을 완전히 바꾸든 유지하든 간에 환상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연결된다(민음사 인문잡지 《한편 3호 환상》, <어두운 사건들 통과하기> 중)고 했다. 진화로 속단하지는 않되, 환상이란 용어가 함축한 부정성보다 긍정에 주목하며 프로토콜 경제가 수립하고자 하는 패러다임 변화를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