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ots
▪ <토이 스토리> 제작 과정에서 시작된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는 픽사의 전통이 된 핵심 피드백 메커니즘이다. 네 가지 원칙 아래 직함과 권위를 내려놓고, 솔직한 피드백만으로 이야기를 다듬는 창의성의 원천이자 문제 해결의 장으로 기능한다.
▪ 픽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를 장려한다. 이를 제도화한 “3피치룰(Three Pitches Rule)”은 감독들에게 세 가지 아이디어를 동시에 제시하게 해, 막힐 때마다 다른 길을 찾고 스스로 가장 몰입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한다.
▪ 픽사는 협업을 강화하기 위해 여덟 가지 메커니즘을 운영한다. 그중 “픽사 대학”은 부서와 직급을 넘어 함께 배우고 교류하며, 배움이 곧 창의성과 유연성을 지키는 일의 핵심임을 전달한다.
샌프란시스코 베이브리지 근처에는 과거 통조림 공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1만 8,000평 넓이의 픽사 건물이 있다. 창업자 중 하나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맞다)가 직접 설계한 건물로, 그의 이름을 따 스티브 잡스 빌딩(The Steve Jobs Building)이라고 불린다. 잡스는 건물을 설계할 때 단 한 가지 키워드를 강조했는데 바로 공동체였다. 잡스에게 사옥은 단순히 직원들이 일하는 공간이 아닌 서로 어울리고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직원의 창조적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는 이 목적의식에 따라 건물의 내외부를 직접 설계했다.
잡스는 빌 게이츠의 워싱턴 주택을 설계한 건축사무소 보울린 시윈스키 잭슨(Bohlin Cywinski Jackson)과 함께 픽사 건물이 (직원 간의) 우연한 만남과 계획되지 않은 협업을 촉진하는 장소가 되게끔 설계했다. 원디자인에서는 총 세 개의 개별 건물이 나누어진 형태로 계획됐는데 하나는 컴퓨터 엔지니어, 다른 하나는 애니메이터 그리고 그 외 직무를 위한 빌딩들로 나뉘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한데 모이고 만나는 공간이 되길 원한 잡스는 이들이 함께할 하나의 캠퍼스를 추가로 구상했고 협업의 허브 역할을 할 아트리움 공간이 조성됐다.
아트리움은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일종의 마당이자 모두가 쉬고 잡담을 나눌 수 있는 라운지 같은 곳이다. 후에 <인크레더블>과 <라따뚜이>를 감독한 브래드 버드(Brad Bird)는 아트리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트리움은 처음에는 공간 낭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잡스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때, 눈을 마주칠 때 무언가 일이 일어난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공동체적 캠퍼스
캠퍼스 외부에는 600석 규모의 야외 원형 극장, 축구장, 픽사 셰프가 운영하는 유기농 채소 텃밭, 올림픽 규모의 수영장, 배구장, 조깅 트랙 등 직원들의 다양한 액티비티를 위한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해매다 야외무대에서는 픽사팔루자란 이름의 직원 록밴드 경연대회가 열린다. 잡스는 이런 편의 시설이 사옥에 있는 이유에 대해 직원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들의 애니메이션(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라 밝혔다.
몇몇 방문객은 픽사 건물의 이런 과함(?)이 단순히 잡스의 별난 취향을 보여주는 데만 그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직원들은 답한다. 잡스가 캠퍼스를 통해 드러내고자, 그리고 내재화하고자 했던 일관된 개념은 공동체라고. 직원들이 효율적으로 (그리고 즐겁게) 협력해 창조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잡스는 이 건물들을 세심하게 설계했고, 그의 철학이 곧 픽사의 대표적인 조직 문화인 협업과 개성으로 녹아들었다. 그는 애니메이터들이 자신의 작업 공간을 자신의 취향대로 자유롭게 꾸밀 수 있도록 장려하고 경영진 역시 이를 적극 권장하게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애니메이터들의 작업 공간은 저마다의 개성을 빛냈다. 천장에 작은 샹들리에가 달린 분홍색 인형의 집, 진짜 대나무로 만든 오두막집, 스티로폼으로 만들었지만 정교하게 페인트칠해 진짜 돌로 지은 것처럼 보이는 4.5미터 돌탑 성도 있다.
사옥이라는 물리적인 하드웨어 이외에도 픽사는 체계화된 업무 메커니즘을 만들어 협업과 개성의 조직 문화가 창의성을 향해 계속해서 뻗어나가게끔 했다. 그렇다면 픽사가 정의하는 창의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픽사의 공동 설립자 중 하나인 에드 캣멀(Ed Catmull)이 픽사의 조직 문화에 관해 쓴 책 <창의성 지휘하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돼 있다.
“픽사의 창의성은 단순히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창의성을 키운다는 건 새로운 문제를 항상 해결하겠다는 의지이고 동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 에드 캣멀(Ed Catmull)
앞으로 언급될 픽사의 대표적인 업무 메커니즘을 통해, 우리는 픽사가 직원들로 하여금 문제는 항상 존재하며 그중 상당수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고, 직원들이 흔히 지나치기 쉬운 문제들을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브레인 트러스트 Brain Trust
창의적인 영감 앞에서 직함과 위계질서는 무의미하다
브레인 트러스트는 픽사 업무의 핵심 메커니즘이자 오래된 전통 중 하나다. 그 탄생은 <토이 스토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제작과 편집을 주도한 인력들의 업무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브레인 트러스트라는 정식 명칭은 <토이 스토리2>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브레인 트러스트가 일반적인 다른 기업의 피드백 시스템과 다른 이유는 “솔직함” 때문이다. 브레인 트러스트가 작동하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몇 달에 한 번씩 직원들이 모여 각자 서로 제작 중인 작품을 평가한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이 서로 솔직하게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장려한다. 이때의 솔직함은 정직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정직을 요구받는 상황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는 요청을 받으면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유는 인간은 얘기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기 쉽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피드백하는 게 아닌 직원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라 작품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을 주고받는데 이를 조직 문화 차원에서 격려한다.
때때로 회의장에서는 과격한 표현도 오가지만 개인적인 감정의 골은 깊어지지 않는다. 이유는 회의에서 오가는 말은 아티스트를 향한 공격이나 품평이 아닌 모두 (작품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임을 모두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한 대화, 활발한 토론, 웃음, 애착” 에드 켓멀은 브레인트러스트 회의의 핵심 재료를 이렇게 추출한다. 다른 사람을 꺾거나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고자 함이 아닌 오직 이야기의 재미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다는 목적 아래서 브레인 트러스트가 운영된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솔직함 좋지. 그렇지만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 아닌가?” 때때로 가족에게도 하기 힘든 (솔직한) 피드백을 직장 동료끼리(때론 상사에게) 기명으로 “솔직하게” 하자니 쉽지 않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픽사라지만 그들도 직장이란 구조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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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실에서 서로를 동료로 인정한다. 각자에게 창의적 과제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 회의실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내려놔야 한다. 누구도 작품을 내놓은 감독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모두가 작품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문제 해결 방법의 최종 결정권자는 항상 감독이다.
- 영화 제작자들은 상처받기 쉽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친절한 태도를 보이자.
- 솔직한 의견을 주고받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에 덧붙여 회의실을 관찰하며 이 네 가지 원칙을 잘 지켜지고 있는지 모니터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또한 두 번째 원칙에 명시되어 있듯, 픽사는 직원(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향한 피드백을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기업과 다르게 상사는 직원에게 (작품의 방향성에 대해) 지시할 권한이 없으며 회의 후 브레인트러스트의 피드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감독의 몫이다. 강압적인 하향식 피드백 메커니즘이 아니란 의미다. 작품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지시할 권한을 브레인트러스트에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감독이 이에 반발하거나 소통이 어려워지는 일을 방지한다. 감독은 자율성이 주는 책임감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가며 이는 작품의 성패를 다른 직원에게 돌리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창의성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브레인 트러스트가 훌륭히 작동된 예로는 역대 흥행작 중 하나로 꼽히는 <주토피아>(Zootopia, 2016)가 있다. 토끼 경찰관 주디 홉스가 주토피아에서 벌어지는 연쇄 실종 사건을 수사하며 그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원래 주디의 파트너로 나오는 여우 닉을 주인공으로 기획되었다. 주토피아는 지금처럼 “무엇이든 가능한” 지상낙원이 아니라 닉이 속한 포식자들에게 전기 충격 칼라를 강제로 채워 통제하는, 다소 음울한 디스토피아로 처음 구상되었다고 한다. 다수의 평화를 위해 소수의 희생이 과연 옳으냐는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담기에는 의미 있는 설정이었다. 그런 도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자란 닉에게 도시는 자신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다소 냉소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닉의 캐릭터도 지금처럼 능글맞기보다 훨씬 더 냉소적인 성격으로 그려졌다. 영화 제작 중반부 주토피아의 (디즈니) 제작진들이 픽사에서 중간 상영회를 열었다. (일반적으로 외부인의 객관화된 의견을 위해 픽사는 디즈니에서 디즈니는 픽사에서 중간 상영회를 연다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모두가 회의실에 모여 자신이 본 내용을 파헤쳤다. 픽사 감독들은 영화의 분위기가 음울해 (애니메이션답게) 좀 더 톤을 밝히고 닉의 냉소적인 태도를 다양한 방법으로 수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모든 피드백이 영화의 근본적인 해법으로 기능하진 않았다.
그때 이를 듣고 있던 앤드루 스탠턴(Andrew Stanton)이 주토피아 팀에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앤드루 스탠턴은 <월-E>와 <니모를 찾아서>의 감독으로 픽사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 중 한 명이다. 현재는 2026년 개봉 예정인 <토이 스토리 5>를 준비 중이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영화가 플레이되는 순간부터 주토피아라는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무너진 도시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전기 충격 칼라도 언급했다. “어떤 여우가 이 잔인한 도시에서 살고 싶겠어요? 제작진이 제게 닉을 이해시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화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여전히 공감이 안 돼요. (주토피아) 세상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알고 있으니까요. 여러분이 다른 아이디어를 내서 제가 주토피아를 사랑하도록 만들기 전까지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작팀은 그들이 전하려던 메세지인 편견이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려는 시도는 유의미했지만 관객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이라는 스탠턴의 주장에 수긍했다. 기존에 만들었던 이야기의 구조를 뒤엎는, 쉽지 않은 피드백이었지만 주토피아 팀은 그게 본질을 꿰뚫는 피드백임을 깨달았다. 그 후 냉소적인 여우 닉 대신 낙천적인 토끼 경찰관 주디 홉스의 시선에서 주토피아를 보여주기로 했다. 이 한 가지 변화로 주토피아는 처음에는 (주디의 시선에서) 지상 파라다이스처럼 보이다가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서서히 결함이 드러난다. 영화의 톤은 어두운 분위기에서 밝은 분위기로 순식간에 바뀌며 전 연령대를 위한 애니메이션답지 않다는 고민을 해결했고, 제작진 또한 자신들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3피치룰 Three Pitches Rule
실패해도 언제나 다른 길은 있다
픽사에는 으레 천재들만 모일 거라고 생각하지만(그리고 일면 맞는 부분이지만) 픽사가 조직 차원에서 장려하는 문화는 사실 “실패해도 괜찮은 문화”이다. 공포에 기반을 둔 실패 혐오 문화에서 직원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리스크를 회피하려고 하고 이런 분위기에선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예전에 통했던 안전한 방식을 반복하려 한다. 이런 조직에서 내놓은 성과물은 혁신적이지 않고 진부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앤드루 스탠턴이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 말은 “가능한 한 빨리 틀려라”였고 이 말은 곧 픽사 직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스탠턴은 실패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했다. 넘어지는 것조차 피하려 한다면 자전거를 배울 수 없다. 팔꿈치와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가능한 한 낮은 자전거를 구해서 넘어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봐라.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경영자가 먼저 자신의 실수, 자신이 실패에 기여한 부분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된다. 경영자는 실패에서 도망치거나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 상층부에서 실패를 공유하고 여기서 배우려고 할수록 직원들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과감하게, 혁신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게 바로 3피치룰(Three Pitches Rule)이다. 피칭데이 때 픽사는 감독(직원)들에게 하나가 아닌 세 가지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발표해 달라고 청한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 이런 과제는 꽤 부담스럽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만들기도 버거운데 무려 아이디어를 세 개나 쥐어짜야 하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조직 차원에서 이러는 건 사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작자들이 자주 직면하는 문제, 바로 다음에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막히는 난관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고자 함이다. 세 가지 아이디어를 지닌 감독은 자신이 몰두하던 하나가 (여러 이유로) 장애물에 부딪힐 때마다 다른 아이디어로 방향을 틀 수 있고 이런 여유가 한 작품에 매몰되기보다는 창의적으로 접근하게끔 도와준다.
또한 감독이 세 가지 아이디어를 발표할 때 동료들은 피칭 과정에서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판단하기보다 감독이 어떤 아이디어를 발표할 때 들떠있고 신나 보이는지에 집중한다. 이 과정을 통해 감독은 자기 심장을 뛰게 하는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스스로 메타인지가 가능해져 작품 창작의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한다.
3피치룰의 좋은 예로는 애니메이션 <코코> 탄생 비화에 있다. <토이 스토리3>와 <코코>의 감독이자 이 두 작품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리 언크리치(Lee Unkrich)는 당시 픽사에서 스토리 피칭을 준비하며 이 3피치룰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했다고 한다. 픽사에는 스토리룸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는데 이 방은 긴 양쪽 벽에 각종 스케치와 스토리보드를 붙일 수 있는 보드판이 쭉 설치된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이다.
감독이 세 가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항상 두 개의 스토리룸이 제공된다. 발표 당일에는 첫 번째 스토리룸의 왼쪽 벽면에 첫 번째 피치를, 오른쪽 벽면에 두 번째 피치를 배치하며, 두 번째 스토리룸의 한쪽 벽면에는 세 번째 피치를 둔다. 보통 다른 벽면은 비워 둔다. 언크리치 감독은 첫 번째 스토리룸에는 사랑에 빠진 외계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뮤지컬을 설치하고 두 번째 스토리룸에는 멕시코 민속 예술품으로 가득 채운 방을 만들었다. 에드 캣멀은 이 순간을 회고하면서 모든 직원이 두 번째 스토리룸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방에는 파피에 마세(젖은 종이와 아교나 풀을 섞어 이겨 반죽한 것)로 만든 마리아치 밴드가 있었는데 모두 해골 모습이었고 천장은 멕시코의 전통 색종이 장식인 무지개색 파펠 피카도로 장식되어 있었다. 벽면과 바닥에는 이 장식들이 가득해 빈 곳이 하나도 없었다. 멕시코 망자의 날에서 영감을 얻은 스토리가 바로 언크리치의 두 번째 방이자 세 번째 아이디어였다. “방 안의 분위기에서 우리가 만들 작품이 이거라는 느낌이 바로 들었죠”라고 캣멀은 회상했다. “스토리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시각적, 정서적, 문화적으로 이 매혹적인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직원들) 모두 흥분하고 기뻐했어요.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전에는 보여준 적 없는 세계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도취해 있었죠”
언크리치는 3피치룰 덕분에 아이디어 개발 과정에서 올바른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세 가지 아이디어를 개발하면서 다음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머릿속에서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러니까 “그래. 이 스토리는 접어두고 다른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자”라고 말할 여유가 스스로에게 주어진다. 둘째, 두 번째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작업한 후에는 어느 정도 아이디어와 거리를 두게 되면서 신선한 시각에서 첫 번째 아이디어를 되돌아볼 수 있다.


집단지성을 모으는 여덟 가지 메커니즘
이외에도 픽사는 다음의 여덟 가지 메커니즘을 통해 혼자가 아닌 직원들 모두가 참여하고 협업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여덟 가지 메커니즘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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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일리스 회의: 매일 아침 전 직원이 참석해 전날 작업 결과를 공유하고 함께 분석하고 개선해 나간다.
- 현장답사: 현장 답사를 다녀와야 창작자의 선입견이 무너져 더 이상 진부한 작품에 안주하지 못한다.
- 한도 설정: 직원들이 의욕 조절에 실패해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지 않도록 한다.
- 기술과 예술의 융합: 기술은 에드 캣멀이, 창작은 존 래스터가, 비즈니스는 스티브 잡스가 총괄하는 균형적인 사업 모델을 통해 조직의 균형을 유지한다. 이 견제와 균형은 어느 정도였냐면 애플에서 아주 극도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관여하는 스티브 잡스가 앞서 말한 브레인 트러스트 회의 때는 직원 간의 수평적이고 편안한 소통을 위해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 소규모 실험: 장편 애니메이션 앞에 3~6분짜리 단편을 끼워 넣어 기술 실험 및 장편 제작 인재들을 시험하는 기회로 삼는다.
- 보는 법 배우기: 10주짜리 사내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직원이 애니메이션 드로잉 방법을 배우게 한다.
- 사후분석 회의: 제작 과정에서 잘잘못을 파악하고 교훈을 정리함으로써 함께 성찰하고 다음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는다.
- 픽사 대학: 다양한 커리큘럼과 전문 인력을 통해 직원들이 새로운 학문과 관심사를 접하며 창의성을 개발하도록 지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마지막 메커니즘인 픽사 대학이다. 픽사 대학은 초기 강좌 때부터 조직 내에서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는데, 120명 직원 중 100명이 픽사 대학에 등록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커리큘럼은 수년에 걸쳐 조각, 회화, 연기, 명상, 댄스, 발레부터 실사영화 제작, 컴퓨터 프로그래밍, 디자인, 색상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확대됐다.
경영진은 이런 강좌들을 모두 무료로 직원에게 제공한다. 외부에서 강사를 섭외하는 비용부터 직원들이 평일에 픽사대학 강좌를 듣는 데 따르는 실질적 비용까지 모두 회사에서 부담한다. 단순히 전문 지식을 듣는다는 것 이외에도 이 수업들이 유익한 이유는 바로 거기서 만나는 동료들이다. 새로 들어온 촬영 기술자 옆에 경험 많은 애니메이터가 같은 수강생으로 앉아 있고 그 옆에 회계 부서나 보안 부서나 법무 부서 직원이 앉아 수업을 함께 듣는다. 이 시간은 금전적으로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직원에게 소중한 자산이 된다. 사무실을 벗어나 직원들이 부담을 내려놓고 다른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부서와 직급 차이로 가까이 지내지 못하던 직원들이 어깨가 닿을 듯 가까이 몰려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협업의 시너지가 발현된다.
픽사 대학의 목적은 결코 프로그래머를 애니메이터로 바꾸거나 애니메이터를 댄서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조직 차원에서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모든 직원에게 전달하기 위함이 크다. 새로운 것을 계속 배우는 것은 창의성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해본 적 없는 일을 계속 시도하면 두뇌를 민첩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픽사 대학은 직원들이 바로 이런 일을 하도록 유도한다. 직원들이 더욱더 유연하고 강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조직의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화려한 사옥, 체계화된 업무 프로세스와 메커니즘, 직원들을 향한 아낌 없는 투자. 듣기만 해도 픽사는 모든 이들이 꿈꿔오던 회사에 가깝다. 그렇지만 에드 캣멀은 이런 프로세스와 메커니즘에 속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한때 픽사에서 유행했던 문구는 “프로세스를 신뢰하라”였다. 이 말은 “프로세스가 업무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다. 제작진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이 주문을 되뇌며 위안을 얻었다. 예를 들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도 브레인트러스트나 3피치룰 같은 집단지성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믿음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제작진은 경계심을 늦추고, 프로세스에만 의존하며 수동적으로 대충 작업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문구는 힘을 잃었고, 픽사는 우리가 신뢰해야 할 대상은 프로세스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프로세스 자체에는 내용도, 의미도 없으며 단지 도구이자 체계일 뿐이다. 픽사가 각종 제도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 핵심은, 시스템이나 조직 문화의 우월성이 아니라 직원 개개인이 목표의식과 주인의식을 지니고 스스로 통제하며 책임감 있게 일하는 태도였다.
어쩌면 뻔한 말처럼 들리지만, 우리는 종종 화려하고 정교하게 체계화된 시스템을 보며 그 반짝임에만 눈길을 빼앗기곤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런 성과 같은 조직 문화조차 지향하는 바는 사람이다. 따라서 픽사의 조직 문화를 기계적으로 따라 하기보다, 그들이 끝내 집중하고자 하는 지점을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건 바로 사람이다.
결국 픽사의 경험은 우리에게 단순한 교훈을 남긴다. 어떤 제도나 시스템도 사람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것들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결국 사람이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움직일 때라는 것. 조직의 성과와 창의성은 절차나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하는 개인의 열정과 책임감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