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피곤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쉴 틈 없이 계속되는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3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옥수역을 지나 동호대교를 반쯤 건너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따라 한강 야경이 정말 예쁘네요. 힘든 일이 있으셨다면 이 열차에 전부 두고 내리세요. 제가 종점에서 잘 치우겠습니다. 이번 역은 압구정, 압구정역입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한강 다리의 조명이 강물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급하게 카메라를 켜려다 지금이 아니면 눈에 담을 수 없을 것 같아 열차가 지하로 내려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따라 하루의 끝이 상쾌했다.
한강은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고개를 들지 않고도 바라볼 수 있는 하늘과도 같다. 찰박거리면서도 묵직하게 흘러가는 넓은 한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괜스레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가벼워지는 것 같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미국의 워싱턴 대학 소속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클(Marcus Raichle) 교수는 사람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 두뇌의 혈류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두뇌의 대부분이 휴식기에 들어갈 때 오히려 활성화되는 부위인 DMN(Default Mode Network)이 상상력과 창의성, 그리고 자기성찰 능력을 담당하며, 멍을 때리거나 휴식을 취할 때 DMN이 두뇌를 초기 상태로 되돌려 더욱 효율적인 상태로 전환한다고 한다.
그래서 바쁜 도시인들에게 자연, 그중에서도 넓고 잔잔한 물결을 지닌 한강은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햇빛이나 조명에 비친 한강의 윤슬은 형태나 크기가 불규칙적이지만, 폭우가 내리지 않는 이상 둔치 내의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유동적으로 흐른다. 그렇기에 바라보기만 해도 심리적으로 묘한 안정감을 준다. 또 시간대와 기상 상태, 심지어 풍속과 습도에 따라서 매번 다른 모습의 윤슬을 보여 주기에 지루하거나 질릴 염려도 없다.
한강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쳐왔다. 한강 수위와 강폭을 일정하게 만들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건 <한강종합개발계획(1982)>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백사장과 나루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민들의 유원지였던 한강은 1960년대 중반부터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환경오염과 악취의 근원지가 되었고, 88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전반적인 환경 개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강을 시민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서는 먼저 들쑥날쑥한 한강의 수심과 유량을 안정시키는 공사가 필요했다. 바닥에서 모래와 자갈을 캐내 판매한 수익으로 공사비의 일부를 충당하고, 콘크리트 호안으로 강폭을 고정하고 물길을 막아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수중보를 잠실과 김포에 하나씩 설치했다. (한강 물에 의해 둔치가 침식되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사진 곳 표면에 설치하는 토목 구조물을 호안이라고 한다.)
또한 한강 지류 네 곳에 하수처리시설을 설치해 오염수가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막았고, 김포공항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잠실까지 강변을 이어주는 올림픽대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시민들이 한강에서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공원과 주차장을 조성하고 유람선을 운영하는 등 수자원을 최대한 활용했다.
4년간의 한강종합개발로 얇은 물줄기처럼 흐르던 한강은 마치 지도에 두꺼운 형광펜을 그어 놓은 것처럼 일정한 수심과 강폭으로 정돈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완공 후에는 준공기념 우표를 발행하고 TV에 다시 찾은 우리의 젖줄, 우리의 한강이라는 공익광고를 내보이며 한강을 소중히 가꾸는 것이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한강은 서울을 관통하는 대부분의 구간에서 강폭이 1km 내외이며 하류 부근에서는 2km가 넘을 정도로, 런던의 템즈 강(Thames River)이나 파리의 센 강변(Paris, rives de la Seine) 등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세계의 여러 강에 비해 폭이 상당히 넓다. 수중보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강남에서 밀물과 썰물이 관측될 정도였고, 많은 양의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바닥을 드러냈던 한강이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가 있는 곳까지 가득 찼다고 한다. 강폭뿐 아니라 둔치의 크기가 남다른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는 포화상태가 되어가는 서울을 한강 이남 쪽으로 확장하기로 했다. 서울 도심의 북쪽 지역은 산이 많고 최전방 지역과 밀접하여서 지리적이나 군사적으로도 개발에 제한 사항이 많은 것에 비해, 한강 이남 지역은 대부분 넓은 논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거시설이나 상업 및 공업시설을 건설하기가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강북과 강남을 가로지르고 있는 넓은 한강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강에는 오늘날 공사 중인 월드컵대교를 포함해 총 31개의 다리가 들어서게 되었다.
한강을 채운 서른하나의 다리는 전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이례적인 고밀도의 다리 배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기간에 유지 및 보수 비용이 적게 드는 다리를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야 했기에, 대부분 교각(pier) 위에 들보(girder)와 상판을 올려놓은 단순한 거더교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트러스교인 한강철교, 사장교인 올림픽대교 등 독특한 형태의 다리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한강은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 이후로 지금까지 약 40여 년간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최근에는 오래되어 부식된 콘크리트 호안을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원인으로 꼽으며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자연형 호안으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2021년 11월 현재 약 80%의 호안이 자연형으로 복원되었으며, 황인식 한강사업본부장에 따르면 오는 2025년 수변완충지대와 생물 서식공간이 확대되어 전 구간이 자연형 호안으로 복원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한강은 앞으로 더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인류는 약 500만 년을 자연 속에서 동화되어 살았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한 대도시에 모여 산 지는 2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류는 아무리 교통이 편리하고 삶이 풍요로워진 도시에 살아도 공허함과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류의 근원이 자연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강공원이 시민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가장 큰 이유는 한강이 접근하기 쉬운 자연이기 때문이다. 빌딩으로 가득 찬 미국 뉴욕 한복판에 센트럴 파크가 있었기에 뉴욕이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단 이야기가 있듯, 한강은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공복지시설로서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수행해 왔다. 어느덧 한강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중 하나인 서울에서 시민들에게 잠깐이라도 자연을 느끼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공간이 되었다.
필자는 가끔 일상이 지치거나 답답한 느낌이 들면 반포한강공원이 한눈에 보이는 라이브캠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직접 찾아간다. 역사적, 건축학적, 심리학적으로 다양한 시선을 담아 바라볼 때마다 끝도 없이 모습을 바꾸는 한강이지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제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흐르는 이 물결과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가 지닌 가장 사치스러운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리는 수많은 외국인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을 수도로 삼는 나라에 살고 있다. 너무 바쁘단 핑계로 한강을 마주할 기회를 헛되이 넘겨 보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 잠시만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잠시만 고개를 옆으로 돌려 우리의 젖줄, 우리의 한강을 바라보자. 늘 그래왔듯, 한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