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올해 초에 짧게나마 제주에 있었다. 잠깐 머물다 떠날 입장이라 그런지 거긴 새삼 참 아름다운 섬이었다. 물감처럼 푸른 바다와 땅 사이를 경계 짓던 새까만 현무암, 끝없이 보이는 억새밭이 바람에 휩쓸려 바삭대는 소리, 웅장한 사려니숲 길에서 느껴지던 자연의 충만함. 요즘도 이런 것들이 뜬금없이 떠오른다. 그 순간 지금의 내 몸뚱이가 놓여있는 서울이 그렇게 팍팍할 수 없다. 제주를 떠올리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곳. 그래서인지 제주에는 아름다움을 좇는 미술관과 갤러리가 생각 이상으로 많다.

 

한국 최초로 세워진 시립미술관도 육지가 아니라 외딴 섬 제주의 언덕이었다. 한라산의 풍경이 탁 트인 서귀포의 기당미술관이 그것이다. 미술관은 이후에도 꾸준히 들어섰고 작품 활동을 위해 제주를 내려오는 국내 작가도 제법 늘었다. 제주를 숫자로 표현해보면 더 와닿을까? 인구 100만 명당 문화시설 수는 서울보다 6배 많은 200.54개, 특히 미술관 수는 압도적인 수로 전국 1위에 올랐다. 제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500명쯤으로 추산된다. 제주를 찾는 방문객은 도민의 20배가 넘으며, 이들 중 문화예술 관광을 위해 오는 수는 절대 적지 않다.

 

이처럼 자연만큼 예술을 즐기기에 완벽한 섬이다. 문제라면, 예술 유입이 충분하다 못해 과잉상품화마저 이루어졌단 점이었다. 미술관과 갤러리는 포화 상태에 접어들고, 관객을 맞이할 작품도 비슷한 양태를 이루어갔다. 이제는 색다른 주제의 작품을 전시할 특별한 캔버스가 등장할 때였다. 그래야 제주가 한국 예술의 숨겨진 진짜배기 아틀리에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지 않겠는가.

 

A. 장소특정 미술프로젝트, <apmap part 2, jeju> 

B. 미디어아트 프로젝트, <빛의 벙커>

C. 서브컬처 프로젝트, <미디어 페스티벌 SSS>      

A. 장소특정 미술프로젝트, <apmap part 2, jeju> by 아모레퍼시픽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역량있는 작가를 발굴해 팀을 꾸리고, 전국을 돌며 지역 특색과 스토리를 예술로 풀어내는 흥미로운 릴레이 프로젝트가 제주에 상륙했다. 아모레퍼시픽이 2013년부터 시작한 공공미술 야외 프로젝트 <apmp>는 매해 새로운 지역과 작가를 선정한다. 지역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창작을 지원해 공공미술 활성화와 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목표다. 4년간 진행된 <apmap part. 1>은 아모레퍼시픽의 여러 사업장을 대상으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현장을 실험적인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성공리에 마무리된 1차 프로젝트의 바통을 이어받은 <apmap part. 2>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작품을 전개할 무대는 제주, 그 중에서도 오설록 티뮤지엄에 전시된다. 우선, 작가는 자신에게 할당된 제주의 곳곳을 수차례 훑는다. 장소마다 얽힌 설화, 전설, 민담들, 또는 독특한 화산•용암지형이 작품의 영감이자 토대다. 장소에서 탄생한 아이디어는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건축 등 다층적인 형태의 예술로 재창조되고, 제주의 참모습은 오설록 티뮤지엄의 실내와 야외 정원에 자유롭게 터를 잡는다.

<apmap>에서 단순한 회화 작품은 찾기 힘들다. 제주 신의 어머니인 백주또를 기리는 본향당 주변의 자연소리를 채집한 사운드 아카이브, 주상절리의 수직 기둥 패턴에서 알고리즘을 추출한 입체 조형물, 용암지질대와 광치기 해변을 형상화한 아크릴 패널을 전시장 창가에 얹은 설치작품, 한라산의 동굴과 습지 등을 디지털과 아날로그 매체를 혼합해 스토리보드로 만든 설치작품 등은 제주를 전시장 위로 아름답게 재해석한다. 프로젝트 종료까지 두 번의 전시가 더 남았지만, 이미 제주의 가치를 재조명해 현대미술의 섬으로 만들기에 탄탄한 예술 콘텐츠다.

B. 미디어아트 프로젝트, <빛의 벙커>

@고성리 빛의 벙커

제주를 대표할 수 있는 말은 아무래도 ‘아름다운 자연’일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의 <apmap>처럼 자연을 예술화한 프로젝트가 등장하는 것도 당연하고, 자연을 즐기자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의 관광 콘텐츠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첨단기술과는 제법 거리가 멀 것 같은 제주인데, 프랑스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인 아미엑스AMIEX가 해외 최초의 전시관으로 제주의 벙커를 선택했다. 내로라하는 수많은 국제도시를 제치고 제주가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벙커는 옛날에 국가간 통신망을 운용하던 해저광케이블 관리소였다.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만큼, 축구장의 절반이 넘는 거대한 면적을 흙과 나무로 덮어 용케 숨겨왔다. 어떤 폭격에도 견딜 수 있게 튼튼히 건축된데다 5.5m에 달하는 깊이감, 완벽한 소리 차단, 장소가 갖는 스토리텔링도 갖췄다. 마침 아미엑스는 일반적인 장소 대신 산업발전으로 도태된 유휴공간을 프로젝션 맵핑 기술을 사용해 시청각의 예술 공간으로 재생하는 프로젝트다. 벙커가 그 뒤를 이어 올해 9월에 <빛의 벙커>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 까닭이다.

대개의 미디어아트 전시장은 공간 하나에 3개의 프로젝트를 설치한다. 반면 아미엑스는 60~100개의 프로젝터로 고흐, 샤갈, 다빈치 등의 명화 그래픽을 투사한다. 사방이 명화로 가득찬 공간에 들어선 관객은 작가의 회화세계를 넘나들며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미술관의 벽에 걸린 명화를 가까이서 보고 싶지만, 작품 보호를 위해 거리 제약을 지키는 아쉬운 원화 관람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빛의 벙커>는 세계적인 명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주 출신 작가나 제주와 관련된 작품 전시를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미디어아트 축제를 열고, 뉴 디지털 아트센터로서의 <빛의 벙커> 입지를 다지겠다는 이들의 배포는 전에 없던 디지털 친화적인 제주를 기대하게 만든다.

C. 서브컬처 프로젝트, <Media festival SSS>

@선흘리 도깨비조각공원

“자연이나 지역특색만을 강조한 행사와 차별화된 제주의 컨텐츠는 없을까?”

“제주에는 서브컬쳐를 생산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작가 이해강, 큐레이터 이승미, 문화기획자 유서영은 셋이 모인 자리에서 질문을 던졌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라온 동갑내기 청년 셋은 제주를 찾아온 방문객, 혹은 제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제주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한국에서 언제나 외딴 섬으로 구분되던 제주가 예술계에서 비주류로 치부되는 서브컬쳐와 묘하게 닮은 것을 발견했다. 제주는 육지와 동떨어진 물리적 위치지만, 국제적인 관광지로서 다양한 문화가 흡수될 여력이 충분했다. 그런데도 자연친화적인 이미지, 아날로그적인 문화 콘텐츠만 발전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침 다양성과 새로움이 환영받는 시대였다. 비주류인 제주를 배경으로, 서브컬쳐의 주축인 비주류 미디어와 디지털 출력물, 전자음악을 풀어낸다면 승산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페스티벌 스스스 기획안의 틀이 잡히고, 제주문화예술재단 주최의 청년문화예술 사업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8월에는 네오제주 지원사업에도 선정되어 서브컬쳐와 미디어아트의 장을 본격적으로 공모하게 된다. 제주에서도 꽤 외곽인 조천읍 선흘리에 방치됐던 도깨비조각공원에 터를 잡고, 서브컬쳐에 충실한 전시와 공연을 준비했다.

사진, 만화, 비디오 아트,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미디어 분야의 작가 9팀이 기하학적인 그래픽 작품, 조명과 영상으로 구성한 사운드 아트웍, 스트릿 컬처를 비평하는 만화, 사회현상을 일러스트로 풀어낸 비디오 등으로 전시장을 채웠다. 관객은 무료로 제공되는 제주에일맥주를 마시며, 전시장을 채우는 오묘한 전자음악을 즐기면 그만이다. 스스스를 통해 디지털 콘텐츠에 익숙치 않은 도민은 문화의 폭을 넓히는 경험을 즐겼을 것이다. 또한, 대중성 가득한 획일적인 흐름에서의 탈출을 생각케하는 일종의 자극제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간 제주에서 찾을 수 없던 새로운 비주류의 문화예술 콘텐츠가 내딛는 첫 발걸음인 만큼, 다음 페스티벌의 모습을 기대해보자.

© VISIT JEJU

뭍에서 섬으로 내려오는 이들 중에는 제주에서 영감을 얻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려는 작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쉼의 공간을 운영하며 자연을 즐기는 ‘제주휴식민’도 있고, 제주의 문화예술공간과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찾는 ‘문화유목민’도 급증했다.

 

어쨌든 도심에서의 본업을 접고 거처를 옮겨온 이들이기에, 제주가 가진 콘텐츠를 향유하는 데 일상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베를린이 배고픈 예술의 도시로 떠오를 때 문화예술의 흐름을 이끄는 집단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자연스레 확장된 것처럼, 제주 또한 문화유목민의 밀집 지역이 구역화되고 있다.

제주의 문화예술 소비의 흐름 줄기가 갈수록 굵어지고 있다.

 

이들은 예술과 관련된 다양한 형태의 해프닝을 두 팔 벌려 환영할 열린 태도를 보인다. 도심과 달리 사방이 탁 트인 제주의 지형에 살면서, 마치 제주처럼 사람이 트여가는 걸지도 모른다. 이름난 미술관에 모셔온 현대미술 거장의 마스터피스나, 통상적인 아트페어를 위해 제주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테다.

 

문화유목민과 도민 모두의 공감을 사고, 제주를 문화예술의 섬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제주가 가진 매력과 잠재력을 분석해 다층적인 방식의 공공미술로 풀어내야 한다. 제주는 대도시에서 시도하기 힘든 실험적인 창작 활동을 그려낼 수 있는 캔버스가 사방에 널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