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1980년,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처음 언급한 프로슈머(Prosumer)의 윤곽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명확했던 산업 시대를 지나 그 경계가 점점 흐려지며 Producer(생산자)와 Consumer(소비자)의 기능이 결합한 프로슈머가 탄생했다. 이미 생산된 제품에 대해서만 소비자가 선택권을 지니던 기존의 달리 프로슈머는 생산에 직접 참여하거나, 판매 과정에 참여해 자신의 취향이 담긴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소비자를 제품 생산에 참여하게 만들어, 소비자의 의견과 취향을 직접 반영하도록 만들자는 기업의 기획은 제품 출시 → 피드백 → 수정 후 재출시와 같은 기업의 판매 구조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략은 제품의 경쟁력 상승에도 영향을 미친다. 제품 자체가 소비자들의 불편을 개선한 완성본으로 출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프로슈머는 단순히 기업에서 고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고용된다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퇴색되어, 더 이상 프로슈머가 아닌 생산자로서만 기업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의 제품을 실제로 소비하는 프로슈머를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생산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업의 제품을 꼼꼼하게 소비하는 프로슈머를 확보해야 실제적인 피드백이 오갈 수 있기에 충성도 높은 프로슈머는 반드시 필요하다. 기업 충성도가 높은, 그리고 제품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슈머를 모집하기 위한 기업의 전략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것은 프로슈머의 유용성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프로슈머가 기업에 유용한 이유는 일반적으로는 충성도에 있다. 기업의 제품을 소비한 경험이 많을수록 더 많은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슈머라는 혁신적인 변화도 고객 관리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회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주제가 원론적이라고 해서 방법도 원론적일 필요는 없다. 기업들은 어떻게 고객들을 관리하고, 충성도 높은 프로슈머를 활용하고 있을까?

고객에게 결재받는 기업: 홈앤쇼핑

홈앤쇼핑은 TV홈쇼핑에 런칭할 신상품을 평가하는 상품선정위원회를 소비자로만 구성한다. 우수고객으로 선정된 8명의 소비자는 상품 선정에 직접 참여해 어떤 것을 방송에 송출해 판매할지, 하지 않을지를 결정한다. 팬데믹 때문에 상품선정위원회를 비대면 모임으로 전환했지만, 방송에 송출할 제품을 선정하는 자리이기에 오히려 화상 회의로 진행하는 쪽이 더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기존 5인 체제에서 8인으로 확장된 상품선정위원은 제품 생산에 직접 참여하진 않지만, 방송에 내보낼 제품 자체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제품의 판매 여부를 결정하는 큰 권한을 지니고 있다. 2011년에 1기를 발족해, 6개월 간격으로 기수를 모집하고 있는 홈앤쇼핑 상품선정위원은 2022년 4월 현재까지 20기가 모여 소통 가능성을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홈쇼핑에 송출되는 제품은 반드시 상품선정위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프로슈머의 의사 결정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홈앤쇼핑의 상품선정위원은 지원 자격이 별도로 없다는 점에서는 접근성이 높지만, 소정의 활동비만 지급된다. 또한 모집된 인원을 대상으로 별도의 고객이벤트를 따로 진행하지는 않아 고객 관리에 집중한 기획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홈앤쇼핑의 상품선정위원은 기업의 경쟁력을 상승시키는 데 프로슈머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사례다. 판매될 혹은 판매하고 있는 제품의 평가를 담당하는 모니터링을 넘어, 모니터링할 제품을 결정하는 상품선정위원은 홈쇼핑의 판매 구조를 변화시켰다.

미래를 위한 소통: 로스트아크

고객 관리가 기업 운영에 있어 핵심이라는 사실에는 대부분의 기업이 동의한다. 그 중 고객 관리에 가장 공을 들이고 노력하는 기업이 있다면 바로 게임 회사일 것이다.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의 경우, 관리해야 하는 고객은 일반적으로 제품 구매하는 소비자에 한정되지만, 게임 회사는 유저 모두가 제품의 소비자이기에 고객 관리 자체가 매출에 직결된다.

 

그러나 이렇게 고객 관리에 집중해야 하는 게임사가 고객들과 직접 소통하는 경우는 드물다. 게임을 즐기기 위한 고객의 요구와 매출을 신장시켜야 하는 기업의 입장차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매출 신장에만 과도하게 집중해 콘텐츠를 모두 유료화한다면 게이머 수가 하락하고, 장기적으로는 매출이 떨어진다. 따라서 유저와 기업의 상반된 입장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게임사 고객 관리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앞서 언급했듯 게임사와 유저의 소통은 생각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요구가 게임 운영에 있어 비현실적이었고, 일반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게임사들은 콘텐츠 제작 시 고객들의 요구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게임 내에서 쌓이는 불만을 게임 커뮤니티 내에서만 표출했고, 그것이 실질적인 게임의 운영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활성화됨에 따라 자신이 즐기는 게임과 다른 게임을 손쉽게 비교할 수 있게 되고,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지면서 게임사들은 소통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2020년을 시작으로 매년 2회씩 진행하고 있는 로스트아크의 유저 간담회는 게임사가 왜 유저들과 직접 소통해야 하는지, 어떻게 유저들의 요구와 게임 운영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로스트아크의 유저 간담회는 단순히 유저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형식적인 간담회가 아니다. 앞으로 어떤 게임 콘텐츠를 개발할 것인지 로드맵을 제시하고,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유저들의 의견을 토대로 분석한다. 분석된 내용을 토대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어떻게 발전해갈 것인지 방향성을 보여준다. 또한 이미 개발한 콘텐츠에 대한 의도를 설명하기도 한다. 개발 의도와 다르게 콘텐츠가 악용되어 발생한 유저들의 불만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이는 게임사가 직접 해당 게임 커뮤니티의 반응을 파악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저 간담회는 디렉터가 발표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자신이 즐기는 게임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유저들의 자리이기도 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실시간 방송으로 진행된 2021년 유저 간담회에서는 로스트아크의 유저인 스트리머들과 일반 유저들이 함께 간담회를 시청하면서 간담회의 발표를 같이 즐긴다. 디렉터 또한 발표 중간중간 실시간 채팅창을 확인하면서, 간담회가 유저들과의 대화임을 강조한다. 이는 게임사의 유저 간담회가 다른 일반적인 기업의 고객 간담회와는 다른, 유저들을 위한 이벤트적인 기획임을 보여준다.

 

자기가 즐기는 게임에 대해 다른 유저 및 게임 디렉터와 함께 이야기하고, 어떤 콘텐츠가 추가될 것인지를 살피고 의견을 제시하는 유저 간담회는 유저들이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콘텐츠이다. 간담회에 참여한 모든 유저는 게임 콘텐츠의 방향을 제시하는 프로슈머가 된다.

 

실제로 화제가 된 2021년 로스트아크의 유저 간담회에서는 매출 일부를 공개하며, 골드(로스트아크 내에서의 화폐) 인플레이션에 대한 해결책을 공개했다. 기존에 현금으로만 지불하던 게임 콘텐츠를 게임 내 화폐로 전환해 골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대신, 매출의 17%를 포기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앞에서 언급한 유저와 기업의 입장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점을 찾은 사례로 보인다.

 

실제로 간담회 발표를 맡은 금강선 총괄 디렉터는 “매출의 17%를 우리의 미래와 맞교환하겠다”고 말하며, 이를 로스트아크식 재투자라고 명명한다.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아바타의 매출을 작년 기준 21.3배로 성장시킨 유저에 대한 보답이라는 금강선 총괄 디렉터의 발표는, 유저와 기업 사이에서 선순환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단기 매출에 집착하기보다 유저들의 쾌적함에 집중해 고객 이탈을 방지하고, 신규 고객을 유입시키는 장기 전략을 선택한 로스트아크는 게임사 고객 관리의 모범이 되었다.

기획하는 고객, 경청하는 기업: LG전자

앞서 살핀 두 사례는 제품 판매 여부를 결정하거나, 콘텐츠 방향에 대해 소통하는 쪽이었다. 이는 기존의 고객 관리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던 모니터링 단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형태이며, 고객들이 프로슈머로서 어떻게 제품과 콘텐츠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례였다. 고객 관리라는 원론적인 방식을 프로슈머를 통해 혁신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품과 콘텐츠에 직접 참여하게 만드는 능동적인 고객 관리와 프로슈머의 활용 사례가 있다.

 

LG전자는 자문단에게 제품 기획부터 출시 후 개선까지, 전 단계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 자신의 아이디어와 기획이 실현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었다. 신가전 고객자문단을 구성한 LG는 20대부터 6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의 고객자문단을 구성했다. 기업은 새로운 기술에 소비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미리 살필 수 있고, 자문단은 LG의 가전을 사용하며 불편한 점 혹은 추가되면 좋을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제품 개발에 자문단이 직접 참여하기에 기업이 사용자의 아이디어까지 제공받는 방식이다.

 

실제로 LG 디오스 광파오븐은 AI 기능이 확대되었으면 좋겠다는 자문단의 피드백을 수용해, AI 기능을 포함한 제품을 재출시했다. AI 기능이 확대된 디오스 광파오븐은 재출시 후 누적 매출액이 30% 증가했고, 판매량 또한 한 달 내 2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처럼 자문단은 제품 기능뿐 아니라 컨셉, 마케팅, 디자인에도 참여해 제품 생산 전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업은 제품에 대한 실질적인 아이디어와 기획을 제공하는 자문단과 소통하기 위해 이들을 위한 워크숍도 개최한다. 2019년 LG사이언스파크에서 자문단을 위해 열린 워크숍에서는 LG의 다양한 제품을 소개하는 행사가 열렸다. 기업의 다양한 제품 사용 경험을 자문단에게 제공하고, 자문단은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러한 기업과 자문단의 선순환 구조는 기업이 어떻게 프로슈머를 활용하고, 고객과 소통하는지를 보여준다.

 

LG는 고객 관리와 소통 자체에도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소통하지 못해 소외되는 고객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2013년부터 미국 접근성 전문가 자문회의(시각, 청각, 지체 장애인 단체 및 접근성 전문기관(NCAM))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2021년을 기점으로 장애인과 접근성 전문가로 이루어진 자문단을 구성했다. LG는 접근성 자문단에게 접근성 측면에서 피드백을 요청한 후, 피드백을 토대로 제품을 수정해 출시하고 있다. 제품에 음성 매뉴얼을 도입하고, 점자 스티커를 제공하는 등 꾸준히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고객 자문단과 접근성 자문단을 통해 제품 기획에 직접 참여하게 만드는 LG는 일반 고객으로까지 소통의 대상을 확장한다. 자문단에게 피드백을 얻은 제품을 바탕으로 일반 고객이 제품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시그니처 키친 투어는 이러한 소통의 좋은 사례다. 청담과 논현에 위치한 LG 시그니처 키친은 고객이 직접 LG 제품을 체험하고, LG의 제품을 사용하는 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 다양한 자문단을 구성하고, 일반 고객에게 제품 체험 경험을 제공하는 LG를 통해 우리는 기업이 어떤 방향으로 고객을 관리하고,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정표를 얻을 수 있다.

고객 관리는 기업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제 고객은 기업에서 제공하는 제품이나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출시된 제품을 비교하고, 부족한 점과 개선점을 후기로 남기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이렇게 진화 중인 고객과 기존의 형태로만 소통하기를 고집한다면 기업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변화된 고객의 후기에 귀 기울이고 생산에 참여하게 만드는 프로슈머 전략은 기업이 어떻게 변화된 소비자에게 적응하고 그것을 활용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고객 관리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혁신적인 방법으로 지키고 있는 기업들의 적응력은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자를 따라갈 뿐 아니라 오히려 선도하고 있다. 단기적인 매출 성장에 집중하기보다 미래에 투자하겠다는 기업의 의지를 확인한 소비자들은 이제 기꺼이 기업들과 소통하며 함께 걸어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