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헌책방 거리에도 봄이 올까?

 

얼마 전 《황야의 헌책방》이라는 책을 읽었다. 모리오카 요시유키라는 사람이 도쿄의 유서 깊은 고서점 잇세이도에서 8년 동안 일을 하고, 가야바초에 사진전문 헌책방 ‘모리오카 서점’을 열기까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엮어 놓은 책이다. 자주가는 책방에서도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해 있는 걸 보아 인기 서적인가 싶다.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지는 않지만 헌책방은 좋아한다. 지난 날 헌책방에서의 좋은 경험들 때문이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한 옛날 책들은 읽을수록 깊게 남은 책들이 많았다. 대게 절판된 책이기에 일반 서점에서는 구하기도, 발견하기도 어렵다. 헌책방이 아니라면 만날 기회조차 없는 책들이다. 게다가 누런 책장을 넘기는 재미나 옛날 문체를 탐독하는 재미도 있다. 《황야의 헌책방》을 읽고 나서는 새삼 헌책방이라는 주제에 한동안 ‘헌책방 좋지’하며 공감하면서도, ‘서울의 헌책방은 어디까지 와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시작해본다. 서울의 헌책방 이야기.

서울의 헌책방

‘청계천 헌책방거리’

 

《황야의 헌책방》 속 모리오카 요시유키가 배회했던 일본의 대표적인 도쿄 고서점 거리 ‘진보초’가 있다면, 서울에는 ‘청계천 헌책방거리’가 있다. 도쿄와 서울의 헌책방이 생겨난 시기나 배경, 규모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기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서울의 대표적인 헌책방거리는 동대문에 위치한 청계천 책방거리다. 동대문 평화시장 1층에 줄줄이 자리잡은 청계천 6가 헌책방거리, 그리고 청계천을 끼고 동묘 앞 시장까지 헌책방은 곳곳에 위치해 있다.

 

전세계적인 흐름이겠지만 헌책방 문화는 기술이 발전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존재감이 옅어져왔다. 사람들이 새 책도 사 읽지 않는 마당에 헌책이 웬 말이냐 하는 소리가 당연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효용가치를 따지며 쓸모 있음과 없음을 논하하는 것은 소용없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효용가치가 없는 것 만도 아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대학생 단체부터 정부기관까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헌책방 문화의 가치를 알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헌책방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지적움직임에 큰 역할을 하다

 

서울의 헌책방 문화는 70년의 역사다. 1950년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확하게는 1959년, 복개하기 전 청계천 일대가 배경이다. 1959년 한국전쟁의 피난 과정 당시 북쪽에서 많은 피난민이 내려와 청계천 일대에 판잣집을 짓고 터를 잡았다. 그 인근에 위치했던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여러 종류의 노점상들과 보따리 장사꾼들이 모여들며 동대문 시장의 원형이 된 시장 상권이 형성됐다.

 

청계천을 복개하기 전에는 냇물이 흐르는 하천 양쪽에 20여개 좌판점들이 헌책을 놓고 팔기 시작했다. 그 일대는 헌책방이 들어서기에 최고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동대문 운동장은 고속 터미널이었고, 거리의 끝은 1호선의 종착역이었다. 상권으로서 손색이 없었는데, 청계천을 끼고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의대, 성균관대 등 대학이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1962년에는 그 자리에 평화시장이 세워지면서 청계천을 따라 질서없이 난립했던 책방들이 평화시장건물 1층으로 터전을 옮겼다. 책이나 참고서를 구하기 어렵던 시절 헌책방은 최고의 인기와 호황을 누렸다. 지금은 20여개 남짓한 헌책방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200여개의 헌책방이 가득하고 하루 평균 2만여명이 드나들던 헌책방 거리였다.

시대의 흐름에 자리를 내주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수요가 줄기 시작했다. 복사기가 대중화되고 80년대 중반 교보, 종로 등 대형서점의 출현으로 영향을 받아 사람들은 헌책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90년대 들어 교과서가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헌책의 효용가치는 낮아졌다. 90년대 초부터는 점포들이 기술서적, 종교서적, 잡지, 참고서와 같이 전문화를 시도하는 등의 묘책을 마련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그 이후 2000년대 빠르게 진행된 인터넷의 발달은 헌책방의 쇠락기에 부채질을 했다. 새로 등장한 온라인 서점으로 오프라인 서점에 대한 수요가 확연히 줄었다. 게다가 중고책만 전문으로 사고파는 대형 서점이 생겼으니 헌책방 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더욱 급격히 줄었고, 심지어 젊은 세대들은 헌책방 거리의 존재유무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가 됐다. 그렇게 헌책방은 200여개에서 100개, 다시 50개 그리고 20여개 남짓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헌책방’

 

걸음을 옮기기도 비좁은 상점, 책장아래 허리춤까지 가득 쌓아 올린 책더미들, 누런 종이, 먼지가 앉은 책, 퀴퀴한 실내, 원하는 책을 컴퓨터 시스템으로 찾을 수 없는 불편함, 선뜻 들어가기 꺼려지는 낡은 가게 외관, 깔끔함과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분명히 헌책방만의 매력이 있다. 그런 결점도 눈감아 줄 만큼의 소중한 것들이 헌책방에는 있다.

헌책을 찾아가는 그 자체가 경험

 

두 사람이 들어서면 버거울 정도로 좁아 보이는 책방이지만, 몇 명의 사람들은 좁은 통로의 헌책방 안에서 보물 찾기에 여념이 없다. 마치 시끌벅적한 바깥세상과 동 떨어진 곳에 정적과 책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이 곳에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뭐 찾아요?’하는 헌책방 사장님의 물음에 필요한 것을 말하기만 하면, 위태하게 쌓여 있는 책들 사이로 필요한 책을 쏙쏙 찾아 내어 주신다.

 

일반 서점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사람 대 책만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 간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만 듣고 찾았다가 실망하고 돌아가기도 쉬울 것이다. 모든 책들이 전부 저렴한 것만은 또 아니다. 그 책의 희귀성에 따라, 보존된 상태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보물 찾기 하듯 헌책 속을 누비는 경험과 발견의 재미는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함이다.

새책 같은 헌책보다 가치 있는 헌책

 

같은 중고책이라도 대형 온라인 중고서점과 헌책방의 매입 기준은 다르다. 대형 중고서점의 헌책 매입기준은 명확하게 ‘새 책 같은 깨끗함’이다. 실제로 이 곳에서 매입을 해보면 가져간 모든 책을 팔기는 힘들다. 변색, 구겨짐, 밑줄, 접힘과 같은 흔적의 여부는 가장 중요한 매입 기준이고 이를 조금만 벗어나면 판매 가격이 하락하거나 매입 불가 판정을 받기 일쑤다. 헌책방은 대부분 책의 상태보다는 책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용의 흔적이 있거나 밑줄, 메모가 있는 책도 찾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면 매입한다. 더 이상 시중에서 구매하기 힘든 절판본은 더욱 가치가 높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철저하게 헌책방을 운영해온 주인장의 판단에 따른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도움으로 수치적으로 추천하고 매입하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라, 몇 십년간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얻은 감각으로 책의 가치를 우선한다.

‘헌책방을 다시 살리기 위한 노력들’

 

옛 신문을 들춰보니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인 1997년 당시에도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예전의 영화는 없고, 명맥만이 남아’있는 곳이다. ‘추억을 되새기’ 며 주말을 보내 보자는 기사의 문맥을 보아 누군가도 잊혀지는 헌책방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던 모양이다. 비록 과거에 비해서 몇 군데 밖에 남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명맥이 유지되어 왔던 것은 헌책방의 가치를 알고 꾸준히 걸음을 끊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성기 시절의 헌책방은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지난 역사와 문화 그 자체인 헌책방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 곳곳에서 만나는 헌책방 축제

 

서울도서관은 2015년부터 매년 ‘청계천 헌책방거리 책 축제’를 개최한다. 작년 6월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 거리에서 3일간 열렸다. 헌책방 거리를 활성화하고 헌책방 운영을 도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취지의 행사는 전시와 판매, 참여 이벤트로 구성된다. 젊은 팝 아티스트 작가 13명이 사랑하는 소설작품의 책표지를 팝아트로 승화한 작품을 전시하고, 청계천 헌책방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서울광장에서는 매년 ‘한 평 시민 책 시장’이 열린다. 5년째 매년 열리고 있는 ‘한 평 시민 책 시장’은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헌책의 가치를 전하는 행사를 연다. 헌책방뿐만 아니라 사전 등록을 통해 일반 시민도 자유롭게 헌책방을 열 수 있다. 한편, 매년 여름 한강에서 열리는 ‘한강 몽땅 여름축제’에서도 ‘다리 밑 헌책방 축제’라는 이름의 헌책방 축제가 열린다. 헌책방 문화를 다시 활성화시키고, 잊혀진 헌책방과 서울시민들의 접점을 늘리기 위한 서울시와 서울도서관의 노력들이다.

© 다리 및 헌책방축제 페이스북

책고수가 골라주는 헌책 큐레이션

 

<설레어함>

 

무엇인지 모를 선물을 열었을 때의 설렘 그리고 새 책의 첫 장을 넘길 때의 설렘을 생각하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이 두가지의 설렘을 헌책과 연결시켜 헌책방을 살리려는 시도를 하고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 비즈니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연세대 인액터스(Enactus) 소속 ‘책 잇 아웃’이다.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책방거리를 다시 활성화시키겠다는 목표로 모인 ‘책 잇 아웃’의 대표적인 활동은 헌책 랜덤 박스 서비스 ‘설레어함’이다. 어떤 책을 받아볼지 몰라 설렌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의 이 활동은 헌책방주인의 안목으로 직접 고른 책 3권을 박스에 담아 구매자에게 보내는 서비스로, 구매자가 온라인을 통해 큰 주제를 선택하면 책방 주인이 어울리는 책을 선별한다.

<설렘자판기>

 

비슷한 취지로 진행하는 서비스는 ‘설렘자판기’다. 설렘자판기는 일종의 ‘블라인드북 자판기’라고 할 수 있다. 로맨스소설, 추리소설, 지식교양, 자기계발, 기독, 랜덤 등 8가지 테마로 구성하여 5000원을 넣고 하나를 선택하면 박스에 포장된 책이 나온다.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 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독서 경험을 만들어주고자 했다. 처음 텐바이텐 대학로점에 설치된 설렘자판기는 처음 두달 동안 총 800여권을 판매하며 높은 매출을 올렸고, 이후 텐바이텐의 제안으로 스타필드 고양에도 입점했다.

 

현재 텐바이텐 대학로점에는 자판기는 없지만 라이브러리 컨셉으로 제품이 진열 판매되고 있으며, 비슷하게 현대백화점 신촌점에도 무인 서점 형태를 한 ‘설렘서점’이 운영 중이다. 모든 프로젝트로 얻은 수익은 입점 수수료를 제외하고는 전액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살리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헌책방을 활성화시키는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일상의 설렘을 주고 싶다는 이들의 행보는 그 자체로 큰 선물 같은 존재다.

‘1세대 헌책방이 둘로 쪼개진 이유?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헌책방이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게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지난 2월, 45년 역사를 가진 서울 신촌의 ‘공씨책방’이 경영이 어려워지며 폐점 위기를 겪다가 간신히 자리를 옮겨간 사례를 보면 그렇다. 건물주인이 130만원이던 월세를 2배가 넘는 300만원으로 올렸고, 이를 견디지 못한 공씨책방은 임대료 상승으로 서울시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개인 간의 분쟁이라는 이유로 도움도 주지 못했다.

 

다행히 ‘서울장수막걸리’라는 기업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지난 2월 간신히 자리를 옮겨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신촌의 한 지하 공간과 성동구의 한 상가에서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는 상태. 운이 좋게 젠트리피케이션에 처한 임차인들이 오래 장사할 수 있도록 한 전국 최초의 공공안심상가에 공씨책방이 최종 선정되었는데, 그마저 자리가 비좁아 둘로 나눠서 영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헌책방 거리는 지난 2013년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공씨책방 또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지만 앞서 소개한 일시적인 이벤트성 행사는 실질적인 책방 운영에 핵심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공씨책방 뿐만 아니라 서울 곳곳에 급격한 임대료 상승으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들이 내쫓기는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으로 볼 때, 경제적으로 책방 운영에 도움이 되거나 유지될 수 있는 장기적인 지원 제도가 필요해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울 시민들이 그 가치를 공유하고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해 한 뜻으로 목소리를 모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중고책은 낡고 헐고 버려진 책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을 때 늘 새로운 책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책이 몇 명을 거쳐서 나한테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책은 늙지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으니까. 언제 만나더라도 갓 태어난 아이이며, 청춘이고, 사랑하는 연인이다’

 

헌책방에 적혀 있던 글귀다. 세상은 변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한다. ‘책’도 그 중 하나에 속한다. 책 속에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책은 생명력을 가진 채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지기만을 기다린다. 1997년의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를 끝맺을 수 있는 말은 여전히 크게 다르지 않다. 따뜻해지는 이번 주말, 헌책방에서 보물찾기하는 마음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라고. 뻔한 말이지만 잊혀져 가는 모든 것들에 관심만큼 필요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