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 보호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유휴공간의 활용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도시 건축 및 공공 디자인 사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다. 유휴공간은 말 그대로 활용되지 않는, 쓰지 않고 놀리는 땅을 의미하기에 영어로도 Unused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유휴공간의 활용은 사용되지 않는 땅과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버려진 공간이 다시 사용되게끔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어떤 공간이 전혀 상상치 못했던 새로운 용도로 탈바꿈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공간의 잊힌 정체성을 되찾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시대에 맞게 필요한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비록 그 용도가 과거에 비해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나 공간의 정체성을 지킬 때 오랜 역사에 담긴 이야기와 세월의 흔적을 통해 그 공간만이 지닌 독자적인 이야기를 찾는 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복합문화공간 Hangar Y(앙가르 Y)의 경우도 그렇다. 40년 동안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유휴 공간이 다시 처음의 정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2023년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 탄생해 많은 사람을 맞이하고 있다.
박람회장에서 격납고로, Hangar Y
Hangar는 프랑스어로도, 영어로도 모두 격납고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행어라고 읽고 프랑스어로는 앙가르라고 읽는다. 건물의 이름이 결국 격납고 Y인 것이다. Y는 격납고가 위치한 군사 구획의 코드다. 이 공간은 원래 1879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기계 갤러리로 지어졌다. 에펠탑을 지은 구스타프 에펠의 스승 앙리 드 디옹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 시대의 박람회는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 열강의 문화적, 기술적 성과들을 세계에 소개하는 자리였다. 박람회 공간으로 여러 장소가 사용되었는데, Hangar Y는 여러 기계 전시관 중 일부였다. 이 공간에 2차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여러 기계가 소개되었던 것이다. 당시 선진국 중에서도 선진국이었던 프랑스의 위용을 자랑하듯 길이 70m, 높이 23m에 달하는 큰 규모로 지어졌다.
박람회가 끝나고 이 넓은 공간의 쓸모는 비행기를 주기하고 정비 및 점검하는 격납고로 변했다. 이곳은 세계 최초의 비행선(airship) La France의 탄생 장소이자 격납고로 활용되어 프랑스 항공 우주 산업 역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장소로 남았다. 이후 1921년 세계 1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이 격납고는 프랑스의 승전을 기념하는 항공 우주 박물관이 되었다. 이후 1973년까지 프랑스의 항공 및 우주 산업에 대한 보존 전시 장소로 활용됐다. 하지만 박물관이 르부르제 공항 부지로 이전하면서 Hangar Y는 문을 닫은 채로 40여 년을 보내게 된다.
Hangar Y가 복합문화공간의 옷을 입기까지
Hangar Y가 40년 동안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혔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국가와 민간이 함께 버려진 역사적 건물을 활용하고 개발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 이후, 프랑스 문화부는 역사적인 건물들을 어떻게 재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Hangar Y 또한 그 재활용 대상의 하나였고, 공간이 지닌 가치와 역사를 인정해 Hangar Y를 역사적 기념물로 등재시켰다.
그리고 당시에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빈 건물이었기에 두 사업가 디디에 구반드(Didier Gouband) 그리고 프레데릭 주세(Frédéric Jousset)와의 협업을 통해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구상이 시작했다. 이는 국가와 민간 업자가 계약을 맺고 문화유산을 장기 임대하여 수익 사업을 진행한 프랑스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민간의 투자를 이끌고 운영을 위탁함으로써 복합문화공간으로의 탈바꿈에 성공했다.
둘째는 최적의 입지 조건이다. 복합문화공간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시민들의 휴식 장소인 숲에 위치했다는 점, 그리고 17세기 프랑스식 정원의 일부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Hangar Y가 지어질 때만 해도 이 공간은 현재는 사라진 뫼동(Meudon) 왕궁의 일부였다. 왕궁의 영역이다 보니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고, 지금은 이 일대가 모두 시민들의 휴식 장소인 도시 숲처럼 바뀌었다. 숲과 정원, 그리고 박물관은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입지 조건이 되었다.
Hangar Y는 리모델링을 거쳐 2022년 10월 파리 + 아트페어에서 개조된 공간의 일부를 활용해 첫 예술 전시를 선보임으로써 40년 만에 대중들에게 다시 공간을 개방했다. 또한 23년 봄부터는 전체 부지를 공원과 복합공간으로 조성하고, 개방 후 첫 전시로 공간의 역사를 기념하고자 항공 역사에 대한 전시인 <공중에서의 비행 기계 (Dans l’air, les Machines Volantes)>를 선보였다.
향후 Hangar Y는 시민들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미 다양한 예술 전시는 물론 정원에서의 요가 클래스, 음악 공연 및 다양한 체험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근사한 다이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과 숲속 테라스를 지닌 카페도 있다. 비록 이름은 격납고이지만 원래 박람회 장소로 지어져 많은 사람이 방문할 수 있었던 그 공간의 정체성을 1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되찾았다.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데 있어 정답은 없다.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심을 수도 있고, 때로는 완전히 잊혔던 공간의 정체성을 되찾아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정체성에 대해 정의하고 고민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Hangar Y는 잊혀져 있던 정체성을 되찾아 시민들에게 그 공간을 다시 선물로 되돌려주는 작업에 성공했다. 박람회 공간의 기능과 비슷하게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기능을 되찾았고, 그 공간이 지녀왔던 항공 우주 산업에서의 역사를 예술과 전시로 담아냈다.
모든 공간에는 정체성이 있다. 정체성은 공간의 핵심이자 전부나 다름없다. 정체성은 그 공간을 정의하며 이는 곧 사람들이 찾는 이유와 동기로 이어진다. 좋은 공간에는 좋은 정체성이 있으며 누구나 그 정체성에 대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뒤섞인 곳이라 해도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하고 그 정체성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공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유휴공간 또한 그럴듯한 정체성을 되찾아 재탄생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