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기술이 세상을 선도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시대를 맞았다. 인공지능(AI)은 인간을 월등히 뛰어넘는 연산 능력으로 인간의 많은 역할을 대체하고 있고, 증강현실(AR)은 현실 세계의 확장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가상현실(VR)은 인간이 이해하고 영유하는 공간 개념의 차원을 제대로 뒤집어버렸다. 이제 이러한 기술들은 미래에 일어날 법한 공상과학이 아닌 현실에서도 매일 마주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가 되었다.
문화예술 분야도 쏟아지는 최신 기술을 받아들이며 격변의 시대를 지나는 중이다. 문화예술 가치의 전달 방식을 바꾸는 데 가장 보수적이고 현실적일 것 같은 세계 유명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도 새로운 기술이라는 과제 앞에 마주 섰다. 실제로 다수의 박물관이 공예 같은 체험형 프로그램을 넘어 다양한 전시 프로그램에 최신 기술을 접목해 전반적인 전시 경험의 질과 다양성을 높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뮤지엄이 전시에 기술을 접목하려는 데는 단순히 시대 흐름에 편승하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문화예술 경영에서 관람객의 경험 가치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요즘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국가 복지적 차원의 운영을 넘어,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다시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랜드마크를 꿈꾼다. 그저 학생들이 현장학습을 위해 방문하는 곳이 아닌, 유아부터 성인까지 박물관을 찾은 모두가 무언가를 배우고 얻어 갈 수 있는 공간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신 기술은 관람객의 경험 가치를 높이는 데 일조한다. 다양한 기술을 통해 전시를 차별화하고 관람객의 편의 증진과 경험 만족도를 높인다. 그저 예술품만 멍하니 지켜보다 가는 것을 넘어 감각의 확장을 통해 문화예술이 더욱 쉽게 이해되고 느껴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요즘의 기술은 어떤 방식으로 문화예술과 관람객을 연결하고 있을까?
네덜란드, 반 아베 뮤지엄(Van Abbemuseum)
AI 로봇 활용해 문화 취약계층을 돕다
1936년 개관한 반 아베 뮤지엄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미술관이다. 구성주의 양식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엘 리시츠키 컬렉션으로 유명한 이곳은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의 다양한 사조를 테마별로 묶어 소개한다. 테마별 구성을 통한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제공함으로써 방문객이 지루해하지 않고 관람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이 미술관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반 아베 뮤지엄에서는 매우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바로 Unlimited Van Abbe, 의역하자면 제한을 없앤 반 아베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관람이 어려운 장애나 질병이 있는 사람을 위한 맞춤 관람 서비스를 제공한다. 문화 소외계층 또한 미술관의 전시에 최대한 참여할 수 있게끔 돕는 프로그램이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자폐증, 실어증 환자 등이 이 프로그램의 대상자이며 질병의 유형에 따라 다양한 감각들을 대체 사용하여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다.
반 아베의 전시 관람 로봇도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전시 관람 로봇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기반 실내 자율주행 로봇으로 거동이 불편해 미술관에 오지 못하는 관람객이 집에서도 전시를 관람하게끔 돕는다. 이 로봇 기술은 국내 한 IT기업의 광고에서 소개된 식당 서빙 로봇과 흡사하다. 다만 반 아베의 로봇의 경우 조작하는 관람객이 따로 존재하며 그 기술의 수행 목적이 다를 뿐이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관람객은 컴퓨터와 컨트롤러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로봇을 조종할 수 있고, 로봇은 그 명령을 수행하며 전시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전담 도슨트가 배치되어 관람객이 궁금해하는 내용에 직접 답해 준다. 인터넷만 있으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으니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뿐 아니라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체험학습 목적으로 학생들을 위해 활용될 수도 있다. 이러한 AI 로봇 도입은 문화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에게도 문화활동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
VR을 이용해 감각과 차원을 확장하다
영국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이하 V&A)은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의 출품작을 전시하기 위해 세워졌다. 서방 국가, 특히 영국 내의 산업화와 선진 예술을 자랑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시간이 지나며 장식 미술, 공예품 그리고 디자인 분야에서 세계적인 컬렉션을 보유한 것으로 명성을 이어왔다. 특히 대중을 위한 전시 기획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역사와 전통이 있는 박물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동시대 예술의 흐름을 전시에 잘 녹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험적인 사진전, 만화 전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2021년에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기술을 이용한 전시도 선보였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아동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원작 삽화, 소설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알려진 그림, 그리고 이 소설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를 열었는데, 이 전시에 VR 기술이 활용되었다.
특히 소설 속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여러 2차원적 창작물이 VR 기술을 통해 3차원으로 표현됨으로써 동화 속 세상이 마치 실제로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구현했다. 동화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재현시키며 생동감 넘치는 전시 경험을 제공했다. V&A는 효과적인 가상 현실 구현을 위해 VR 기업 선두그룹에 속하는 대만의 HTC와 손을 잡기도 했다.
이 전시에서는 크게 두 가지 분야로 나뉘어 VR이 활용되었다. 하나는 코로나로 인해 실제 전시에 참여하지 못하는 세계인들을 위해 온라인 공간에서 진행된 VR 프로그램이다. 실제 전시된 작품을 배경으로 책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함께 여러 모험을 체험하며 마치 관람객이 앨리스가 되어 책의 이야기 순서를 따라가게끔 고안되었다. 집에 개인 VR 기기를 갖추고 있다면 누구나 소정의 금액을 지불 후 관람이 가능하다 (2022년 2월 현재, 박물관 전시는 끝났지만 VR 전시는 여전히 구매가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실제 현장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형 VR 프로그램이다. 실제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전시 내용의 일부를 VR로 구현했다. 관람객은 VR 기술을 통해 앨리스가 되어 동화에 등장한 이상한 크로켓 경기를 체험할 수 있다. 현장 전시를 관람하던 중에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VR 체험을 하게 되므로 가상 세계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져 더욱 생동감 있는 경험이 가능하다. 이처럼 2차원의 세계를 3차원의 세계로 전환하여 구현하는 VR 기술은 사람이 이용하는 감각의 범위를 확장시켜 더욱 긍정적이고 인상적인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앞으로도 더욱 그 쓰임새가 넓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 자연사 박물관(The Smithsonian’s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AR을 통해 현실 위에 새로운 세상을 그리다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국립 자연사 박물관(이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뉴욕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 그리고 영국의 런던 자연사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자연사 박물관으로 꼽힌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2>의 배경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입구에 있는 박제된 코끼리상은 박물관의 심벌로 유명하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다른 박물관들보다 조금 더 이른 시점인 2015년부터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을 이용한 전시를 도입했다. 2년간의 개발 끝에 만든 전용 애플리케이션도 출시했다. Skins and Bones(살과 뼈)라는 애플리케이션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Bone Hall(뼈 전시실)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AR 기술과 3D 트래킹 기술이 이용되었다.
AR이라는 표식이 붙은 뼈 표본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으면, 각 척추동물의 표본(뼈)들이 과거에는 실제로는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떻게 기능했는지 3D 영상으로 나타남과 동시에 기존 전시에서는 알 수 없었던 각종 뼈의 이야기와 정보가 제공된다. 뼈를 보고 대충 이럴 것이라고 짐작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표본이 실제로 어떤 생김새이며 뼈의 모양에 따라 어떻게 움직이는 동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이지만 멸종 위기에 처한 범고래의 삶을 증강현실로 구현한 전시관도 등장했다. “Critical Distance”라는 이름의 증강현실 전시 프로젝트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특수 렌즈를 착용해 범고래가 바다에서 지내는 모습을 입체 영상으로 관찰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범고래와 함께 수영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반향정위(스스로 소리를 내고 물체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음파를 받아 위치를 측정함)를 사용하는지를 배우고, 범고래끼리 어떻게 대화를 나누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관람객들이 범고래가 왜 최상위 포식자이면서 멸종 위기에 처했는지, 또 바다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증강현실을 통해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자 고안되었다. AR 기술 또한 VR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전시 프로그램에 다양한 형태로 적용될 수 있으며, 관람객들이 보다 흥미롭고 다채로운 전시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문화예술의 세계에서는 유독 순수성이 중시된다. 어떤 외부의 요인들이 예술품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전시를 기획할 때 대중을 끌어모을 만한 상업성과 함께 그 전시가 어떤 예술적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순수성 또한 양보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술은 예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작품 자체가 기술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기술이라는 별도의 채널을 통해 전시를 접하는 것은 예술의 가치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이며 인공적인 왜곡이 일어날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각종 최신 기술이 전시 산업에서 꾸준히 애용되는 이유는 기술 또한 예술품이 전달하려는 감동을 고유의 방법으로 담아낼 수 있는 도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관람객이 전시를 통해 느낀 감동과 영감은 하나의 경험이 된다. 감동적인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고, 그 추억은 문화예술에 대한 보편적 관심으로 이어진다. 한 번의 경험이 꾸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적절한 기술이 기존의 전시가 제공하지 못했던 새로운 수준의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 이 지점이 곧 문화예술 분야에서 최신의 기술들이 담당할 앞으로의 역할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