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대학교 미술 교양 수업 시간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건장한 풍채를 가진 그의 모습에서 마치 한 나라의 군대를 이끄는 듯한 장군의 기세가 느껴졌다.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대지진이 쓰촨성 일대를 강타했던 2008년, 그는 부실 공사로 인해 처참하게 붕괴된 두장옌시의 초등학교에 직접 찾아가 철근 잔해들을 모았고 이들을 일직선으로 나열한 수평형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벽면에는 그가 수년 동안 조사하고 기록한, 해당 사건의 사망자 명단이 함께 전시되었다. 곧은(straight)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중국 정부가 재개발로서 은폐하려 했던 인재(人災)의 흔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종의 상징물이 되었다. 사회 통제와 검열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고도화된 중국에서 그의 대담한 행보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이후 그는 해당 작품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었지만, 오히려 SNS를 이용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공개하며 세계인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의 구속에 대한 언급은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검열된 소식 중 하나가 되었다. 출소 이후에도 그는 당국에 여권을 압수당하거나 스튜디오가 파괴되는 일 등을 겪으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예술 활동은 여전히 도발적이면서 저항적이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아이 웨이웨이. 그가 한국에서 단독 전시회를 열었다.

 

<아이 웨이웨이: 인간미래>라는 이름의 이 전시는 아이 웨이웨이의 예술 세계의 원천이 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염원을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서로 연대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이 웨이웨이: 인간미래 전시 포스터 © Kiaf SEOUL

아이 웨이웨이, 그의 삶

아이 웨이웨이의 생애는 어린 시절부터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명한 시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아이 칭은 1957년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우파라는 낙인을 얻고, 약 20여 년 동안 지방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이는 1950년대 중반 마오쩌둥이 국가와 국가 사상의 발전을 위한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백화제방과 백가재명 방침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며 반우파투쟁으로 전환된 결과의 일부였다. 그렇게 아이 웨이웨이의 가족들은 헤이룽장성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이 시절, 그가 생존을 위해 배웠던 여러 기술은 훗날 그의 예술적인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아이 칭과 그의 가족들은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78년 그는 베이징 영화 아카데미에 입학해 이데올로기의 프로파간다가 아닌 표현의 자유로서 예술이라는 개념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지만, 중국 사회의 규율을 벗어나기 위해 결국은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그는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 요제프 보이스와 같은 예술가에 의해 영향을 받고, 순수 회화에서 아방가르드적 색채가 짙은 레디메이드나 조소로 예술적인 기조를 전환하게 된다. 또한 사진 예술에도 관심을 두게 되어 약 11년 동안 뉴욕의 여러 모습을 촬영한 시리즈 New York Photographs를 전시하였다. 그러나 1993년 부친의 건강이 쇠약해지면서 아이 웨이웨이는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정부의 통제가 닿지 않는 곳에서 독립적으로 중국 아방가르드 운동의 구심점이 된 세 권의 책을 발간했다.

 

더 나아가 1996년, 부친 사후에 그는 대안 공간(주류 전시관에서 벗어난 실험적인 독립 예술 전시 공간)인 중국 예술 아카이브와 창고(China art archives & warehouse, 이하 CAAW)를 설립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0여 년 사이 급속하게 현대화된 중국의 모습을 보며 전통성과 현대성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다. 1999년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중국 대표 자격을 얻었지만, 상하이에서 노골적으로 저항성이 강조된 전시를 열면서 당국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아이 웨이웨이의 반체제적인 예술 스타일은 1999년 이후 두드러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작업을 진행할 때도 반체제적인 그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2000년대 초반 그는 스위스의 건축사인 헤르조그 앤 더 머롱(Herzog & de Meuron)과 협력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주 경기장이 될 냐오차오(鸟巢)를 설계했다. 그는 경기장이 올림픽 정신인 공정성과 페어플레이를 고양하기 위한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올림픽이 점차 공산주의 사상을 강화하는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고착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이후 경기장 설계에 대한 후회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뛰어난 실력과 독특한 아이디어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는 정부에게 국가의 대외적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는 인물이자 체제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장애물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표현의 자유만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전통과 현대적 가치의 재해석, 그리고 연대(solidarity)를 통한 시민성의 발전 등 인간 사회 전체를 폭넓게 조명하고, 인류가 살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메시지를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리고 이번 전시인 인간 미래는 그런 그의 세계관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인생의 미학도 사라진다.

사회적 참여는 예술적인 선택이 아닌, 인간의 필요 요건이다.”

“If there is no freedom of expression, then the beauty of life is lost.

Participation in a society is not an artistic choice, it’s a human need.”

– Ai Weiwei –


 

아이 웨이웨이의 모습 © Athens Democracy Forum
젊은 시절의 아이 웨이웨이 © NBC NEWS

히스토리와 컨템포러리, 그 오묘한 조화

앞서 아이 웨이웨이는 1993년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역사와 동시대적인 요소들의 교차에 대해 깊게 고찰한 적이 있다고 했다. <옥의>는 그런 그의 관념을 잘 나타낸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는 비판적인 요소보다 중국 전통 문화의 순수성이 강조되어 있다. 옥의는 한나라 시대 왕들이 사후 묘지에 묻힐 때 입었던 옥 갑옷을 뜻한다. 작품에서 주재료로 쓰인 짠 대나무는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의 상징이자 사군자에서 지조와 절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연을 만드는 방법을 활용해 작품이 마치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설계되었다. 보통 유물들은 땅속에 오랫동안 파묻혀 있다가 발굴이 되지만, 이 작품은 허공 위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중국 역사와 연관된 구체적인 오브제와 추상적인 관념들을 하나로 엮었고, 단절된 토양 속에서 끄집어내 관객들의 머리 위로 가져오면서 현대와 연결했다.

 

<옥의>가 역사의 순수한 미학을 디자인한 작품이라면, <색을 입힌 화병들>과 <코카콜라 로고를 그려 넣은 신석기 시대 화병>은 전통 위에 현대를 덧칠함으로써 발상의 전환을 유도한다. 페인트칠이 더해진 형형색색의 화병들은 실제로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유물들이다. 몇몇 눈에는 전통을 무시하는, 일종의 반달리즘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아이 웨이웨이는 반달리즘을 자청함으로써 정부가 이전에 행한 문화대혁명이라는 국가적인 반달리즘에 의문을 던진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고, 문화예술의 명맥이 끊겼다. 장인정신 역시 등한시되었다. 코카콜라 로고가 그려진 화병 역시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코카콜라가 상징하는 바는 더 직접적인데, 바로 자본주의와 다국적기업의 세력 확장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전 지구적인(global) 브랜드가 지역적인(local) 가치를 전유한 것이다.

 

그러나 페인트칠이 더해졌다고 해서 본래의 가치가 소실된 것은 아니다. 페인트층을 벗겨내면 원래의 문양이 그대로 드러난다. 새로운 형태의 병치 (juxtaposition) 기법인 셈이다. 로고 역시 마찬가지다. 앤디 워홀의 판화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가는 화병과 로고를 병치함으로써 장인정신이 담긴 전통적인 가치 체계와 대량 생산으로 점철된 현대적인 가치 체계의 경계를 흐리고 있다. 비록 경계는 흐려졌지만 그대로 존재하는 두 요소는 작가를 통해 원형 작품이 새로운 담론을 생성할 수 있게 만드는 현대 예술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하는 데 기여한다.

<옥의> © 직접 촬영
<색을 입힌 화병들> © 직접 촬영

표현의 자유: 잰말놀이의 미학

아이 웨이웨이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끊임없이 예술로서 제창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도 <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파카인 동물>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주로 고산지대에 서식하며 라마와 흡사하게 생긴 알파카는 중국에서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단순히 중국에 알파카가 많아서가 아니다. 2009년 중국 인터넷 사이트인 바이두에서는 알파카의 한 종인 차오니마가 일종의 인터넷 밈(meme)으로서 유행하였다. 직역했을 때 풀 흙 말(Grass, Mud, Horse)을 뜻하는 이 단어는 사실 중국의 비속어와 다른 한자를 쓰지만 음이 같다. 즉, 중국의 네티즌들은 비속어와 음이 비슷하지만 다른 한자를 가진 단어를 새롭게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고도로 치밀한 중국의 인터넷 검열 시스템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던 것이다.

 

작품에는 알파카와 함께 새 한 마리가 등장한다. 누가 봐도 트위터 로고에 등장하는 새임을 알 수 있다. SNS 중에서 익명성이 가장 잘 발달했고, 리트윗 기능을 통해 정보의 전파 속도가 매우 빠른 트위터는 세계적으로 많은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동시에 중국 정부가 금지하는 SNS이기도 하다.

 

금색으로 칠해진 알파카와 새들을 금색의 감시카메라가 에워싸고 있는 이 작품은 2008년 쓰촨성 대지진 당시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했던 아이 웨이웨이가 이후 연이은 구속과 감시로 인해 박탈당한 개인적인 자유를 의미하며, 중국 시민들이 처한 위기 상황을 상징하기도 한다. 언뜻 보면 화려한 금색 벽지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중국의 현실이 은유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 작품의 구조는 현상을 파악할 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확한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작품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작품은 바로 <민물 게>이다. 중국에서 민물 게는 허셰 (河蟹, he xie)라고 하는데, 해당 단어 역시 중국에서 조화(harmony)를 뜻하는 단어 허셰(和谐, he xie)와 같은 음을 가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알고리즘과 수작업을 사용해 인터넷을 검열하고 있다.

 

<민물 게>는 아이 웨이웨이의 모순적인 게 만찬을 기념하는 상징물이기도 한데, 2010년 정부가 상하이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 일방적인 철거 명령을 내리자, 그는 가까운 지인들 그리고 지지자들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게 만찬을 벌였다. 이 일로 2011년 아이 웨이웨이는 가택 연금을 당했고, 스튜디오는 철거되었다. 중국 전통 토기인 징더전 토기의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진 3,000마리의 게들은 중국의 검열 제도를 나타내는 동시에 마치 자유를 잃어버린 아이 웨이웨이의 모습을 비추는 듯 보인다.

<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파카인 동물> © 직접 촬영
<민물 게> © 직접 촬영

행동하는 예술가, 그리고 연대

아이 웨이웨이는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사회 참여를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그가 사용하는 오브제는 대단히 직관적이면서도 일상적이다. 난민의 의류를 활용한 <구명조끼 뱀>과 <빨래방>이 이를 증명한다. 구명조끼로 구성된 뱀 형태의 작품은 난민 수용소가 있는 그리스의 레스보스(Lesbos) 섬에서 수집한 것이다.

 

이전에도 작가는 구명조끼로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정면 기둥들을 뒤덮은 설치 미술을 선보인 적이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08년에는 쓰촨성 대지진으로 사망한 아이들의 책가방을 모아 뱀 형상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뱀은 중국 신화에서 초월적인 힘과 교활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상징물로 묘사되는데, 아이 웨이웨이는 양가적 측면을 모두 조합하여 연대라는 메시지를 강력한 방식으로 전달하면서도 난민 문제에 무관심한 시민들의 모습을 경고하는 듯 보인다.

 

<빨래방>에 사용된 옷들은 모두 난민들이 실제로 입었던 옷들이다. 그리스 국경지대에 있는 이도메니(Idomeni)의 난민 수용소에 있던 그들은 그리스 정부가 데살로니키 (Thessaloniki)로 강제 이주를 시키면서 옷가지들과 중요한 물품들을 모두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작가는 의류들을 모두 수집하여 다리미질과 손질을 거쳐 깨끗한 상태로 질서 있게 정렬하였다. 이 부분에서 난민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아이 웨이웨이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오브제 옆에는 난민 캠프의 열악한 현실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데, 안전성이 취약한 캠프 구조와 물 및 음식이 부족한 상태에 놓인 난민들의 모습이 반복된다. 이외에도 작가는 <부유>나 <유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정착하지 못한 채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보트 피플의 이야기를 담으며 국제 난민 실태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도 그는 중국의 전통 예술 기법을 적용했다. <난민 모티브의 도자기 기둥>은 명나라 시대 유행했던 도자기 양식을 차용하여 징더전에서 제작된 화병들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형태다. 하얀색 바탕에 파란색 안료로 그려진 그림은 멀리서 보면 전형적인 중국 화풍의 산수화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난민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6개의 소주제 (전쟁, 폐허, 여정, 항해, 난민캠프, 시위)를 나타내는 풍경들은 아이 웨이웨이가 난민 대이동을 주제로 감독한 영화 휴먼 플로우(human flow)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여러 사건을 모티브로 그려졌다. 아이 웨이웨이가 이토록 난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 역시 중국 정부의 감시를 피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정치적 난민 신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동치는 삶을 사는 그에게 난민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기에 자신을 넘어 정착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행동하고, 전 세계적 연대를 촉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난민 모티브의 도자기 기둥> © 직접 촬영
<구명조끼 뱀> © 직접 촬영

성찰하는 삶, 삶에 대한 성찰

아이 웨이웨이는 난민, 중국 등 특정한 사회적 틀 이외에도 인간의 본질적인 삶에 대해 고찰한다. 이 부분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오브제는 잔해이다. <유해>는 언뜻 보기에 실제 유골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밀하게 만들어진 세라믹 작품이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원형 유해는 1950년대 마오쩌둥 아래 설립된 노동 수용소에서 강제노역하다 숨진 망자의 것이다.

 

2012년까지 운영된 라오가이(劳改), 즉 노동 개조의 줄임말인 이 형벌 제도는 교화시설에서 강제로 일을 부여함으로써 수용자들을 처벌했다. 많은 수용자가 정치적인 이유로 연행되었고, 아이 웨이웨이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설은 거의 모든 면에서 극도로 열악했고, 대약진 운동의 여파로 발생한 대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해>는 한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파괴되었고, 그 결과가 어떤 형태인지 조용하지만 무겁게 알려주고 있다.

 

<유해>가 과거의 역사를 역추적하는 방식을 사용했다면 <검은 샹들리에>는 인류에게 닥친 죽음이라는 미래를 암시한다. 일반적인 샹들리에는 빛을 반사하는 투명한 유리로 제작된다. 그러나 작가의 샹들리에는 빛을 흡수하는 검은 유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장식으로 가득 찬 샹들리에와는 달리 해골과 장기, 그리고 조롱이 섞인 상징의 집합체이다.

 

팬데믹의 장기화, 그리고 달라지는 세계 질서로 인해 미래는 희망적이기보다 암울하다.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만 그들의 죽음은 빠른 속도로 잊히고 있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남의 죽음은 그저 지나가는 일일 뿐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개인의 삶에 몰두한 우리를 멈춰 세우고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삶과 죽음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충격 요법적인 쉼을 선사한다.

 

잔해는 사람의 것만이 아니다. 커다란 규화목 혹은 고목처럼 보이는 <나무>는 죽은 은행나무, 녹나무, 삼나무 등의 부산물들을 조합해 만든 인공적인 나무다. 개별 구성물들은 수십 개의 커다란 철 나사와 못으로 고정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려는 주제 중 하나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환상이다. 중국은 수많은 민족과 문화가 혼재하고 있는 국가임에도, 한족 중심의 질서를 관철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중국이라는 슬로건 아래 문화적 다양성이 퇴색되었다.

 

나무는 중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신화에서 생명의 근원이자 순환을 상징하는 요소다. <나무>는 살아있는 고목을 재현하는 작품이지만, 그 본질적인 재료들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외부의 강제적인 힘을 통해 붙어있다. 우리의 사회도 겉으로 보기에는 잘 작동하는 듯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소멸이 일어나고 있다. 자연 파괴도 그중 하나다. <나무>가 정말로 시사하는 바는, 국가 차원을 넘어 현실보다도 더 현실 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만연한 삶과 사회 그 자체가 과연 진실인지를 직시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닐까.

<검은 샹들리에> © 직접 촬영
레고로 만든 <십이지신> © 직접 촬영

아이 웨이웨이는 작품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기조를 띠는 것을 지양한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전시물과 그 제목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전시에서는 레고를 활용한 작품들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어린아이들도 자신의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밝고 친근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재료의 다채로움을 막론하고 그가 전시품들을 통해 고수하고 있는 견지는 매우 일관적이다. 인간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이 가치들을 압박하는 세력들에 맞서 연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 웨이웨이는 작품을 통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사회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인지하게 만든다.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사회의 민낯은 어떤가? 사회 보편의 문제를 탐구하는 그의 작품 세계가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