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느 때보다 트렌드가 중요해진 시대. 제품수명주기(Product Life Cycle, 이하 PLC)란 용어도 더이상 낯설지 않다. 일반적인 PLC는 낮은 판매율을 보이는 도입기(Introduction), 판매율이 오르며 이익을 내는 성장기(Growth), 안정적인 매출을 보이는 성숙기(Maturity)를 거쳐 수명이 달하는 쇠퇴기(Decline)에 도달하는 사이클이다. 패션 사이클도 전체적인 흐름은 비슷하다. 다만 기능보다 트렌드가 핵심인 패션 시장에서 쇠퇴기는 거의 무의미한 수준으로 단축되는 차이점을 보인다.
셀 수 없이 많은 패션 브랜드가 무형의 트렌드를 좇기 위해 해마다 수억 벌의 옷을 만들지만, 완판되는 행운은 흔치 않다. 팔리지 못한 채 소각장으로 건너가는 산더미 같은 옷은 이미 전 세계의 오래된 숙제다. 반대로 팔렸지만 한 번도 걸쳐지지 못한 채 옷장 안의 골동품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린피스(Greenpeace) 독일사무소는 독일 가정에서 새로 산 옷의 40%는 거의, 또는 전혀 입지 않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렇게 버려진 의류의 재활용률은 1% 미만이라는 유엔환경계획(PNUE)의 발표가 무겁게 느껴진다.
소비의 측면을 떠나 생산 과정도 문제다. 옷, 가방, 신발, 액세사리 등 순전히 몸을 꾸미기 위해 각종 제품을 만들던 과거는 절대 건강하지 않았다. 모피나 가죽 같은 동물 문제로만 말썽인 줄 알았던 패션 산업은 사실 그동안 선박과 항공기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해왔다. 섬유 생산에 쓰이는 독성 화학물질, 매년 바다에 50만 톤의 플라스틱을 배출하는 섬유 염색도 문제다. 패션 산업이 만드는 쓰레기의 양은 1960년대에 비해 811% 증가했다. 나는 한때 쇼핑을 사랑했고 의류학까지 전공했었지만, 지금은 패션 산업이야말로 환경적인 측면에 있어 세계의 해악이라고 냉정히 말할 수 있다.
패션계가 목표를 같이 세워야 합니다. 첫 번째 발걸음은 패션 산업에서 최우선이 되는 서너 가지 목표를 골라 함께 달성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는 겁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개별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레벨에 닿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
2019년 8월, G7 정상회담에 참여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화재로 걷잡을 수 없이 황폐해진 아마존 열대우림을 언급했다. 단일 국가의 힘으로는 손쓸 수 없는 지구 곳곳의 환경 문제가 고착화되는 때였다. 이제 세계 차원의 협력이 불가피함을 피력하던 바로 그 자리에 패션계의 큰손들이 모였다. 구찌(Gucci),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부터 나이키(Nike), 자라(ZARA)를 포함한 150여 개의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이 다음 세대를 위한 패션 협약(The Fashion Pact)을 외쳤다. 서약한 이들은 앞으로 지구 온난화와 생태계 보호 등 환경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질 것을 선언했다. 생산 공정을 비롯한 모든 기업 활동의 투명성을 약속하고,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온실가스 배출의 100% 감소를 목표 삼아 매해 진척된 정도를 세계에 보고할 것이다.
패션을 만드는 메이커와 패션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플레이어들은 어떤 패션을 보여주겠다는 것일까. 지속가능패션은 친환경∙재활용 소재를 쓰는 형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비스포크(bespoke), MTO(Made-To-Order) 등의 주문제작이나 수선∙업사이클∙리디자인(redesign)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구제∙빈티지, 대여∙교환, 공정무역∙동물 보호∙전통 생산같은 공정성과 윤리성뿐 아니라 타임리스 디자인(timeless design)도 지속가능패션으로 볼 수 있다. 세계의 패션계가 제시하는 지구를 위한 패션을 살펴본다.
#Material – 최고의 친환경 소재를 찾는 여정
해마다 230억 켤레의 운동화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3억 켤레의 운동화가 버려진다.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한 켤레가 생산되는 건 수 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고무와 플라스틱 재질의 운동화가 완전히 부패하기까지는 최소 3-40년의 세월이 걸린다. 핫한 브랜드가 한정판 운동화를 발매할 때마다 매장 앞에 늘어지는 기다란 대기줄을 보면 이런 사실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나이키는 대기줄 문화를 만든 스니커즈 씬의 대표 주자다. 그만큼 짊어진 지속가능성에 대한 책임도 무겁다. 2020년 2월 열린 <Nike 2020 Forum>은 거의 모든 제품군에 지속가능성을 결합해 스포츠 패션의 new standard(새로운 기준)를 세우는 자리였다. 포럼에서 선보인 스니커즈 스페이스 히피(Space Hippie)는 폐자재의 순환성을 발전시킨 디자인으로, 소재-제조-포장 과정의 무탄소화가 목표인 컬렉션이다. 비록 도쿄 올림픽 연기가 확정되었지만, 미국 대표팀을 위한 신발로 75%의 재활용 소재를 이용해 만들었다. 폐기물 더미에서 모티브를 얻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외관 디자인도 친환경적인 패션은 고루하다는 편견을 호쾌하게 벗겨냈다.
#Repurposing
천재의 지속가능한 해체와 복원
나이키가 최첨단 기술로 폐기물을 신소재로 가공했다면,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는 특유의 해체주의로 패션의 유산을 복원한다. 메종의 설립자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는 유행이 끝난 옷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하이 패션의 권위마저 해체하는 해체주의를 추구했다. 누구나 직접 만들 수 있을 법한 업사이클 스타일의 패션을 구축함으로써 입는 사람이 제작자와 일체화된 느낌을 얻길 바랐다고 한다. 그 패션의 끝은 옷의 생산과 폐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굴레를 끊는 것이었다.
메종 마르지엘라가 2020 FW 시즌에 선보인 컬렉션은 해체주의에 충실하지만, 지금껏 선보인 것과 결을 달리하는 레시클라(Recicla)를 전면에 내세웠다. 메종이 그간 전개해온 레플리카(Replica) 라인의 바통을 이어받은 레시클라는 이탈리아어로 재활용을 뜻하며, 리사이클∙업사이클을 아우른다. 레시클라의 재료는 최고급 원단 공장 대신 파리의 빈티지샵과 벼룩시장. 그곳에서 공수한 버려진 옷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가 자르고 이어붙여 각각의 지속가능한 룩을 완성했다. 코트, 베스트, 드레스가 한데 섞여 아름다운 예술이 된 컬렉션 피스가 눈에 띈다. 마르지엘라가 추구했던 해체주의를 리퍼포징(repurposing)함으로써 고차원화된 패션과 지속가능성을 제시한 셈이다.
#Manufacturing Process
과학자∙기술자∙예술가가 디자인하는 패션의 미래
가장 모범적인 지속가능성이라면 제조 공정 자체의 친환경화일 것이다. 나이키나 마르지엘라 같은 메가 브랜드를 제외한다면, 친환경 제조 공정을 선두하는 신생 브랜드로 판게아(Pangaia)를 들 수 있다. 팝 컬처 아이콘인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미국의 판게아는 환경을 생각하는 과학자∙기술자∙예술가가 모인 국제단체이자 패션 브랜드다. 이탈리아 연구 개발 센터에서 십여 년에 걸쳐 연구한 친환경 소재로 2018년에 첫 제품을 공식 론칭했다. 이들의 목표는 환경을 애호하는 개인과 단체를 연결해, 더 나은 미래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판게아는 천연 해초 섬유 등의 식물성 화학 소재로 모든 옷을 제작한다. 최근에는 외투의 충전재로 거위털 대신 말린 야생화를 넣는 플라워다운으로 기발함을 보여줬다. 페퍼민트 오일 코팅 기법도 판게아만의 특별한 기술이다. 오일로 코팅된 의류는 땀이나 분비물을 덜 흡수해, 일반적인 세탁 횟수의 1/10으로도 상쾌하게 착용할 수 있다. 근본적인 세제 사용을 줄여 수질 오염을 막는 방식이다. 판게아는 수익금의 일부를 환경오염 개선 단체에게 기부하고 있다.
#Curation
책임 있는 컬렉션
하이패션을 선별해 소개하는 유통 플랫폼 매치스패션(Matchesfashion)도 전과 다른 태도로 2020년을 맞이했다. G7 패션 협약에도 참여했던 매치스패션은 지속가능성 컨설턴트 에코 에이지(Eco-Age)와 함께 책임 있는 컬렉션(sustainable fashion collection)을 내세웠다. 소재, 사람, 자선활동, 장인 정신을 지속가능적으로 추구하는 브랜드를 절반 이상으로 엄선한 컬렉션을 통해, 완벽이 아닌 진전의 과정에 주목하겠다는 의지다. 현재까지 A.P.C, 버버리(Burberry), 라프 시몬스(Raf Simons) 등이 모였다. 이외에도 100% 재활용이 가능한 FSC 인증 소재의 패키징을 고안하거나, 자사 물류센터의 탄소 발자국 효율을 높이고 폐기물 처리 업체와 협업해 재활용률을 증대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Exhibition
쓰레기로 가득찬 충격의 쇼윈도
지나가는 행인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 최우선인 백화점의 쇼윈도. 그러나 런던의 해롯(Harrods) 백화점이 가짜 대신 진짜로 버려진 옷으로 가득 찬 충격적인 쇼윈도를 공개했다. 문제적 브랜드 베트멍(VETEMENTS)과 협업한 전시 프로젝트로, 쇼윈도의 바로 위층 공간에 의류 수거함을 설치해 입지 않는 옷을 넣으면 1층의 쇼윈도에 떨어지도록 했다. 옷을 넣은 행위의 리워드는 재활용 페트병으로 만든 베트멍 손목밴드. 마침 가장 핫한 브랜드로 떠올랐던 베트멍 덕분에 쇼윈도는 폐의류가 천장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패션의 과생산∙과소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 프로젝트는 해롯의 쇼윈도를 시작으로 전 세계 50여 곳을 순회하며 진행했다. 물론 전시 후의 모든 옷은 NSPCC(국립아동학대 예방협회)에 기부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Campaign Film
탁월한 환경 스토리텔러
이 캠페인 필름에는 지속가능성을 트렌드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중심 축으로 삼을 때에 나오는 진정성이 있다. LVMH 프라이즈(LVMH Prize)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디자이너 마린 세레(Marine Serre)의 마리 누아르(Marée Noire) 컬렉션은 흑조, 즉 기름띠를 암시한다. 그녀의 런웨이에 오른 컬렉션 대부분은 친환경 원단과 업사이클링 소재로 만들었지만, 역시 백미는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액츄얼 오브젝트(Actual Objects), 3D 아티스트 릭 파린(Rick Farin)∙클레어 코크란(Claire Cochran)과 협업한 필름이다. 에덴(Eden), 가뭄(The Drought), 단절(Breach), 나아감(the Pass)의 네 장으로 이루어진 필름은 환경 오염으로 종말을 맞은 세계의 이후를 전통적 영화 기법과 CGI를 섞어 담아냈다. 에코퓨쳐리스트(ecofuturist)를 자처하는 그녀가 지속가능성과 종말론적 세계관을 실제 컬렉션 피스와 함께 녹여낸 필름에서 노련한 천재성이 느껴진다.
패션계에서 최고의 경찰은 국가가 아니라 소비자다.
– 마리 클레르 다보(Marie Claire Daveu), 케어링 그룹 지속가능성 부서 최고 책임자
지속가능성은 타협할 수 있는 디자인이 아니다. 7-8년 전만 해도 유행에만 발 빠르게 대응한다면 패션 브랜드의 생존은 어렵지 않다는 칼럼이 대다수였지만, 지금은 뭇매 맞기 좋은 주장으로 전락했다. 최고의 패션 아카데미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은 이미 작년부터 바이오디자인(Biodesign) 석사 과목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대표 백화점 메이시스(macy’s)와 블루밍데일즈(Bloomingdale’s)도 더 이상 모피를 판매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패션 메이커와 플레이어들은 지속가능한 패션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설득할 것이다. 손 볼 곳도 많다. 디자인부터 섬유 생산, 제조, 운송, 보관, 마케팅, 판매, 상품 사용, 재활용, 수선에 이르기까지 패션의 A-Z를 바꿔가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으로는 미래를 바꾸기에 역부족이다. 옷으로 가득 찬 옷장을 두고도 여전히 사람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옷을 사고, 이전의 옷을 버린다. 인간의 꾸미는 행위가 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악순환을 자르는 칼은 패션 소비자의 깨어있는 의식뿐이다. 패션계에서 최고의 경찰은 정부도, 환경단체도 아닌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성이 트렌드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 인류는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멋과 유행을 추구하는 행위로 인해 무엇인가가 파괴된다면 해결책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 옳다. 이 옷이 어디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어 하는 궁금증과 조금은 공부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의식 있는 선택이 의식 있는 브랜드를 만든다. 조금은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우리의 패션이 지구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다음 세대에 더 당당한 옷차림을 갖추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