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도시에는 언제나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량, 배기가스와 소음, 하늘을 꽉 막고 서 있는 빌딩들과 숨이 막힐 정도로 빼곡한 광고판들. 커다란 전광판에서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제품의 광고들이 지나가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기 앞길만 바라본 채,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도시의 수많은 풍경을 그냥 지나쳐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는 새롭게 경험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다. 그냥 스쳐 지나가도 무관한 수많은 정보의 홍수 사이를 지나가는, 어딘가로 향하는 길목일 뿐이다. 그런 일상의 습관은 어떤 자극으로도 쉽게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

 

그러나 점점 도시의 굳어버린 일상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경험의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미디어 아트를 통해 창조되는 도시의 새로운 풍경이 바로 그것이다. 전시실을 벗어나 도시의 거리를 넘나드는 미디어 아트는 일상적인 공간을 초월한 초현실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무심히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고 그들의 늘 비슷하던 일상을 흔들어 놓는다.

 

도시의 전광판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를 대중적으로 알린 작품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디지털 디자인 회사 디스트릭트(d’strict)의 3D 미디어 아트인 <WAVE>다. 삼성역 KPOP 스퀘어 대형 전광판에 설치된 이 작품은 도시 한복판에 나타난 거대한 파도로 단숨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생생하게 출렁이는 파도의 모습은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SNS에는 이 거대한 파도의 목격담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WAVE>는 CNN, BBC, 로이터 등 외신에도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 중 하나인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최고점으로 금상을 수상하며 그 뜨거운 세계적인 관심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통영 남망산 공원에 조성된 야간형 디지털 테마파크 ‘빛의 정원, 디피랑’의 모습 Ⓒ .mill
VR 스테이션에서 만날 수 있는 미디어 아트 존 Ⓒ .mill

<WAVE>의 주요 기술인 아나몰픽 일루전(Anamorphic Illusion)은 착시현상을 이용해 생생한 입체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 기술을 통해 사람들은 평면인 전광판에서 새로운 입체 공간을 만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WAVE> 역시 ㄱ(기역)자로 꺾어진 전광판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도심 속 커다란 수족관에서 당장이라도 밖으로 쏟아질 듯 생생한 파도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이 <WAVE>에 열광한 이유는 도심 속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대자연의 생생한 모습을 진짜처럼 만날 수 있는 신선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길을 거리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이질적이지만 즐거운 경험은 도심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경쾌한 균열을 낸다. 광고들만 나오던 전광판에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초현실적인 예술 공간이 생긴다.

 

<WAVE>를 만든 디스트릭트는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혁신적인 공간기반 사용자 경험(UX)을 디자인하는 회사다. 2012년에는 세계 최초 디지털 테마파크인 라이브 파크(LIVE PARK)를 런칭했고, 특정 주제의 콘텐츠(IP)로 색다른 엔터테인먼트 공간을 구현하는 디지털 테마파크와 부동산 및 브랜드를 대상으로 혁신적 공간 경험을 제공하는 디지털 익스페리언스 디자인(Digital eXperience Design)을 진행하고 있다. 디스트릭트는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사용한 강력한 비주얼 크리에이티브 콘텐츠를 기획하고, 시스템과 공간을 설계하며 운영연출까지 담당한다.

 

디스트릭트에서 선보인 첫 번째 퍼블릭 미디어 아트가 바로 <WAVE>다. 이어 디스트릭트는 같은 전광판을 활용해 사람들이 잠시나마 일상의 일탈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퍼블릭 미디어 아트 작품들을 선보였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과 휴가, 취미 생활이 모두 막혀버린 일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자 사람들의 바람을 버킷리스트로 만들어 보여주는 <GIANT TOY>가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이전에 파도가 담긴 수족관으로 활용되었던 전광판은 커다란 장난감 박스가 되어 아이들과 어른 모두가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후 시민들의 버킷리스트를 응모 받아 제작한 2탄이 나오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선보인 <SOFT BODY>는 현대인의 경직된 몸과 마음, 무료한 일상을 파격적이고 유니크한 상상력을 더해 말랑말랑하게 만들어보자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꿈이 그려진 자유로운 고래의 모습이 담긴 <WHALE>은 전형적인 화폭에서 벗어난 미디어 아트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형식과 틀을 깨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해보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아나몰픽 일루전 기법을 다시 한번 최고조로 활용해 화면에서 사람이 진짜 밖으로 손을 뻗는 것 같은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던 <ART PERFORMANCE>는 다양한 가치관, 문화,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세계를 표현하고자 만들어졌다.

이처럼 현대인들의 고민을 미디어 아트로 풀어내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은 디스트릭트는 상업적인 부분과 예술적인 부분을 나눠 더욱더 다양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디스트릭트가 기업과 브랜드와 합작하는 상업적인 부분을 많이 선보인다면, 에이스트릭트(a’strct)는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예술적인 부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디스트릭트의 미디어 아티스트 유닛이다. 멤버는 유동적으로 조정되며, 다양한 분야의 외부 크리에이터들도 함께한다. 에이스트릭트는 지난 2020년 8월 첫 번째 개인전 <a’strict>를 열고 대형 멀티미디어 인스톨레이션 <Starry Beach>를 선보였다. 시각과 청각에 신선한 쾌감을 선사하는 미디어 아트의 가능성을 담은 작품을 통해 에이스트릭트가 앞으로 이어갈 활동의 방향성을 보여준 자리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답게 에이스트릭트는 2021년 7월부터 8월까지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두 점의 공공 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Whale #2>와 <Waterfall-NYC>가 바로 그것이다. <Whale #2>는 타임스스퀘어 광장의 약 1,400㎡ 크기의 전광판을 활용한 작품으로, 파도와 함께 움직이는 고래의 형상으로 초현실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Waterfall-NYC>는 원타임스스퀘어의 외부 벽면에 있는 높이 110m의 전광판을 활용해 도시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의 모습을 연출한다. <Waterfall-NYC>은 삼성전자와 협업한 작품으로, 삼성전자의 디스플레이 기술을 활용하여 대낮에도 선명한 폭포를 볼 수 있도록 한다.
두 작품은 모두 공공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더욱 주목한다.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 한복판에서 도시의 풍경과 상반되는 자연이라는 소재를 불러와 그 낯섦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코로나 시대의 위안, 국경을 초월하는 공공 미술의 의의, 그리고 한국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존재감을 여러모로 담아낸다. 코로나로 닫혀버린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모두가 잠시나마 함께 하나의 초현실적인 공간을 체험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으로 지친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러한 경험을 생생하게 만드는 최첨단 기술의 역할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에이스트릭트가 선보인 작품은 한국 미디어 아트가 기술과 예술 분야에서 보여주는 성취도가 어느 정도인지 공개적으로 전 세계에 알리는 깃발이 된 셈이다.

이외에도 일상에서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단체로는 실감미디어 전문기업 닷밀(.mil)이 있다. 닷밀은 새로운 경험을 일상에서 창조하기 위해 기술과 예술을 접목한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로, 평창동계올림픽의 개∙폐막식에서에서 프로젝션 매핑과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미디어파사드 쇼를 진행한 것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최첨단 기술과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예술로 현실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일상을 뒤흔드는 신선한 체험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닷밀은 외벽을 활용하여 건축물에 새로운 상상력을 덧붙이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건물의 모습에 또 다른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한 장소를 완전히 새로운, 탈 현실의 장소로서 경험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는 2019년과 2021년에 진행한 서울라이트의 미디어 파사드 작품이다. 닷밀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외벽을 이용한 작업을 통해 <서울 해몽>이라는 빛 축제를 펼쳤다. 시민들은 마음껏 연말의 기분을 느끼고 새로운 한 해를 축하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랜드마크인 DDP의 익숙했던 모습 대신 프로젝션 매핑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한 공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닷밀은 도시의 건물뿐 아니라 자연물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2020년 10월 오픈한 국내 최대 규모 야간형 디지털 테마파크 빛의 정원, 디피랑은 통영 남망산 공원에서 밤에만 열리는 나이트워크 프로그램으로, 1.5km 구간의 디지털 산책로를 스토리를 따라 걸어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기존에 있던 자연경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밤에는 홀로그램, 프로젝션 매핑, 일루미네이션 조명 등 첨단 실감 미디어 기술을 덧입혀 초현실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미디어 아트는 자연의 모습에 기술을 더해, 자연을 완전히 새롭게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자연스럽게 자연환경과 지역에 얽힌 스토리를 체험하며 공간을 재경험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이처럼 지역의 환경과 특색을 살려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게 만든 공원은 지역 상권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관광자원이 된다. 실제로 닷밀은 디피랑을 시작으로 세계관을 확장하며 미디어 아트를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테마파크를 시리즈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닷밀은 임진각에서 13m 크기의 초대형 조형물인 하나그루를 활용하여 미디어 쇼를 진행하는 등 낮과 밤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실감 미디어 작업을 이어왔다. 이처럼 디스트릭트와 에이스트릭트, 그리고 닷밀은 미디어 아트를 통해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일상의 틈에서 창조해낸다. 이러한 흐름은 전 세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예술과 광고의 경계에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조금 더 실험적인 부분에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공 미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도시의 공간에 새롭고 즐거운 균열을 내는 시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실제로 도심 한 가운데서 완전히 색다른 공간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공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현대백화점 그룹은 2018년 도심형 VR 테마파크 VR 스테이션을 런칭했다. 브랜드 콘셉트와 콘텐츠 전략, 공간 디자인 및 마스터플랜, 일부 VR 체험형 어트랙션 및 콘텐츠 제작에 디스트릭트가 참여했다. VR 스테이션의 외관은 강남역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려한 미디어 아트는 유리로 된 건물 안에 새로운 차원의 공간이 생긴 것 같은 신비로운 환상을 만들어내며, 도심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공간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VR 스테이션은 국내 유일의 유명 캐릭터 콘텐츠와 익스트림 멀티 플레이 콘텐츠 등 다양한 VR 어트랙션을 갖춘 VR 체험장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상상의 세계를 VR을 통해 생생하게 느끼고 즐길 수 있다. 체험, 방 탈출, 레이싱 등 다양한 종류의 VR 게임과 VR 시네마, 위에서 걷고 뛸 수 있는 첨단 트레드밀 위에서 즐기는 익스트림 VR 등 굉장히 다양한 체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VR 스테이션의 미디어아트 존에서는 벽면과 바닥에 장착된 센서가 사람들의 움직임과 터치를 감지하면서 색다른 인터랙티브 경험을 만들어낸다. 우주와 환상의 숲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담은 미디어 아트 작품은 닷밀이 선보였다. 그야말로 도심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색다른 체험의 복합문화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코로나로 멈춰버린 일상을 뚫고 초현실적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미디어 아트의 힘은 실로 엄청나다. 최첨단 기술과 예술의 결합은 도시 생활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고,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에 다채로운 색깔을 덧입힌다. 미디어 아트는 닳아버린 방식 대신 새로운 방법을 통해 공공 미술이 가진 의의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XR은 사람들이 도심 속에서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의 공간은 코로나로 흩어지고 지쳐버린 사람들의 일상에 신선한 메시지를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