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가발, 의상, 메이크업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사용할 것이다.
– Shawn Adam Levy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 감독 숀 레비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시리즈 주인공인 아역 배우가 나이 듦에 따라 발생하는 외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함이라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미국작가조합(WGA, 이하 작가조합)과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 이하 배우·방송인조합)의 파업 장기화로 시리즈 마지막 시즌 제작이 미뤄지며 생긴 문제가 원인이다.

 

<기묘한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할리우드 곳곳에서 제작되는 각종 영화와 드라마, 인기 토크쇼에 빨간불이 켜졌다. 올가을까지 촬영이 예정돼 있던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 2>,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 데드 레코닝 PART ONE> 속편도 모두 미뤄졌다. <오펜하이머> 런던 시사회장에서 주연 배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은 파업이 발표되자마자 행사장을 떠나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배우들이 떠난 이유에 대해 “불행히도 그들은 피켓 사인을 적으러 떠났다”고 설명했다.

 

작가조합이 올해 5월 2일, 소속 조합원 1만 1,500여 명과 함께 미국영화·TV제작자연맹(AMPTP, 이하 제작자연맹)을 상대로 파업을 시작했다. 두 달 뒤인 7월 14일 배우·방송인조합이 16만 명 조합원과 함께 이 물결에 참여했다. CNN에 따르면 작가 및 배우·방송인 조합의 동반 파업으로 40억 달러(한화 약 5조 원)가 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정했다. 이 둘의 동반 파업은 1960년 이후 무려 63년 만이다. 참고로 1960년은 마릴린 먼로가 조합원이었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배우조합장으로 있던 때이다. TV가 등장한 지 얼마 안 되던 이 시기에 작가와 배우들은 방송국에 판매되는 영화 재상영분배금을 놓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반세기 넘게 지난 지금, 이제는 싸움의 대상이 달라졌다. TV가 아닌 OTT·스트리밍 서비스와 인공지능(AI)이다. 격변한 미디어 판도에서 이들은 다시금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단결했다.

“거래가 공정하지 않다면 우리는 배우들에게 공정한 거래가 성사될 수 있도록 굳건히 버텨야 한다. 많은 배우가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오펜하이머 런던 시사회장에서 파업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는 맷 데이먼 Ⓒ Deadline Hollywood X

AI에 적극 반발하다

수십 년 동안 기계가 세상을 장악하는 SF 대본을 집필해 온 할리우드 작가들이 이제 로봇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지 못하도록 투쟁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파업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파업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AI다. 작가와 배우들이 반발하는 지점은 조금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의 직업이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Chat-GPT, 바드, 미드저니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생성형 AI가 폭발적으로 나오고 있는 요즘. 작가, 배우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인류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졌던 예술과 창작마저 AI가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할리우드 제작사는 작가들에게 AI와 협업하라고 주문한다. AI가 쓴 대본 초안을 작가들이 수정하거나 AI 트레이닝을 위해 저작권 있는 기존 작품들을 학습시켜 새로운 스크립트를 생성하도록 말이다. 실제로 구글 딥마인드의 드라마트론(dramatron)이 기존 작가 및 작품의 특징을 완벽히 복제하고 학습하고 있다. 작가조합 수석 협상위원이자 극작가 존 어거스트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들이 AI에 대해 갖는 두려움은 두 가지이다. 우리는 우리 자료가 AI에게 먹잇감이 되는 걸 원하지 않으며 그들의 엉성한 초고를 수정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는 AI와 저작권 이슈와도 맞닿아 있다. 최근 급부상한 이 이슈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AI가 학습할 때 (인간이 창작한) 데이터를 동의 없이 이용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다. 두 번째는 AI가 만들어 낸 창작물은 저작권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이다. 먼저 첫 번째 이슈와 관련해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현행법상 AI가 저작물을 크롤링하는 행위에 대해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할 명확한 조항이 없다. 주무 부처 문체부 관계자는 “현행법으로 타인의 저작물을 활용한 AI 학습이 저작권을 침해한다고 볼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유는 저작권법 제35조의 5(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에 근거해 AI 학습이 통상적인 이용에 해당하는지, 저작자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AI 업체 관계자들은 과도한 저작권 주장이 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공정 사용(fair use)이란 개념을 적용하는데 AI 학습에 저작권 보호 자료를 허가 없이 사용한 경우 다음 네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해당 사용의 특성과 목적(교육 등 비영리적 목적의 사용은 상업적 사용에 비해 공정 사용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원저작물의 속성, 원저작물의 사용 분량, 원저작물에 미치는 시장 효과이다. 그 외 국가들도 대동소이하거나 아직 상세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다. 유일하게 일본만이 올해 6월, 상업적인 목적이라고 해도 학습할 수 있다고 허용했다.

 

두 번째로 우리나라는 현행법상 AI가 만든 창작물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저작권법에서 저작물이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로, 저작권자는 저작물을 창작한 자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AI가 생성한 결과물에 대해 AI가 만들었다는 표식(워터파크)을 도입할 예정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올해 8월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은 AI가 만든 예술 작품에 대해 저작권 등록을 거부한 미국 저작권청(USCO)의 결정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담당 판사는 “저작권의 기본 요건은 인간의 작품”이라며 “그동안 법원은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일관되게 인정하지 않아 왔다”고 밝혔다. 법원은 원숭이가 찍은 셀카 사진 등에 대해 저작권 등록이 거부된 사례를 인용했다. 단 미국 저작권청은 AI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인간 작품은 보호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기관은 “인간이 창의적인 방식으로 수정 및 배열하는 등 인간의 창의적인 노력이 포함된 경우에만 AI의 도움으로 만든 작품의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Chat-GPT에게는 유년 시절 트라우마가 없다.” Ⓒ Deadant
“AI는 피드백 듣기를 거부한다”는 작가 조합원들의 재치 있는 파업 피켓 Ⓒ TIME

진짜를 위협하는 가짜

배우들은 실존적 위협에 가깝다. 자기 외모, 목소리가 AI 생성 이미지에 무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톰 행크스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가 AI 광고에 도용당했다고 밝혔다. “조심하세요! 나의 AI 버전으로 치과 보험을 홍보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그 광고는 나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AI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젊은 버전의 그를 만들어 광고에 활용한 것이다.

 

이 기술은 단순히 범죄에만 사용되고 있지 않다. 제작자 연맹이 파업과 관련해 내놓은 협상안을 보면, 배우가 하루 일당을 받고 촬영할 시 그 이미지를 제작사가 소유하고 동의나 보상 없이 원하는 작업에서 영원히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미지와 영상으로 구현될 수만 있다면 배우는 더 이상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물리적·신체적 노력 없이도 배우는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고 연기를 한다. 가히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실존적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키아누 리브스는 와이어드와 인터뷰에서 이러한 딥페이크 기술이 배우로서 의지를 잃게 만든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자기 계약서에 디지털로 연기를 조작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고 말하면서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쯤 내 연기가 영화에서 다르게 표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편집으로 내 얼굴에 눈물을 추가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필요 없는 배우라고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배후에는 기술을 통제하는 기업과 자본주의가 있다. 또 실재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고 기술에 대한 도덕적 재고를 강조했다.

 

키아누 리브스와 같은 유명 배우들은 AI로부터 자신의 이미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제작사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지 못한 신인, 무명 배우들이다. 만약 제작자연맹이 위와 같은 협상안을 관철한다면 역설적으로 신인, 무명 배우들은 점차 연기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는지도 모르기에 추후 자신의 커리어도 보호하기 어려울 것이다. 배우들은 그래서 파업에 나섰다. 그렇다고 AI 기술이 영화에 도입되는 걸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볼 일은 아니다.

 

실제로 디에이징(de-aging) 기술이 효과적으로 구현돼 호평받은 영화도 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이리시맨>이 대표적이다.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와 같은 70대 배우들이 직접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 촬영팀은 배우의 모습을 3D 영상으로 촬영하고 AI는 배우들이 젊었을 때 찍은 영화 2년 치 분량을 학습했다. 이를 토대로 연령대, 표정, 카메라 각도, 조명을 고려해 각 장면에 배우의 젊은 시절 모습이 재현됐다. <탑건 : 매버릭>에서도 아이스맨을 연기한 발 킬머가 인후함 수술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자 AI로 그의 과거 목소리를 학습해 현재 나이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 감동을 선사했다.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구현된 디에이징 기술 Ⓒ Netflix: Behind the Streams

작가와 긱워커 그 사이

파업의 또 다른 쟁점은 최저 임금과 노동 환경이다. 최근 몇 년 사이 OTT가 주 플랫폼으로 떠오른 데다 코로나19 셧다운은 이 흐름을 가속했다. OTT와 제작사 이익은 높아졌고 콘텐츠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솟았다. 앞서 언급된 <기묘한 이야기> 제작비는 1,200만 달러(한화 약 159억 원), 영국 왕실을 드라마타이즈한 <더 크라운>은 1,300만 달러(한화 약 173억 원)이다. 넷플릭스가 상륙한 뒤 글로벌 히트작을 연이어 만든 국내 드라마·영화 시장도 치솟은 제작비로 몸살이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100억 원대면 대작 축에 속했지만 이제는 400억 원 이상 투입된 초대형 드라마가 잇달아 제작되고 있다. 작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관련해 김덕재 KBS 부사장은 “우영우가 큰 히트를 치고 있지만 그런 드라마를 우리는 못 한다”며 “너무 비싸서 SBS에서도 만지작거리다 못하고 돌려준 걸로 안다”고 말했다. 얼마 전 히트한 디즈니+ <무빙>은 650억 원을 투입했다. 국내 시리즈물 중 가장 많은 제작비이다.

 

넷플릭스 올해 1분기 영업 이익은 17억 1,400만 달러(한화 약 2조 2,600억 원)이다. 그러면 작가들이 받는 페이도 늘었을까? 아니다. 작가 급여는 오히려 삭감됐고 조건도 악화되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TV 드라마 한 시즌당 20개 이상이던 편수가 스트리밍 시대에서 8~12개로 줄었고 작가들의 주당 평균 급여도 삭감됐다”고 보도했다. 텔레비전이 주 매체이던 시절 작가가 한 시즌당 20여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맡으면 1년 동안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줄어든 에피소드 수로 작가들은 생계를 위해 더 많은 작품 수에 참여해야 하고 N잡러가 되는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기사에 소개된 하단 이미지를 참고하면 2000년 모델에 비해 2023년 모델에게 보장된 근무 일수는 절반을 겨우 넘거나 못 미친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작가란 직업이 점차 불안정한 긱워커(Gig worker, 고용주의 필요에 따라 단기 계약을 맺고 일회성 일을 맡는 근로자를 지칭)가 되어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넷플릭스가 만들어 낸 미니룸(Mini-room) 관행도 문제의 원인으로도 지목된다. 미니룸은 대본 집필 전 소수의 작가가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비공식 작업이다. 기존 작가들은 라이터스룸(Writer’s Room, 할리우드의 여러 작가가 아이디어를 협의하는 회의실)을 통해 베테랑 작가로부터 노하우를 배우고 적정 수의 작가들이 임금을 보장받았다. 라이터스 룸을 축소한 미니룸은 고용된 작가의 수를 최소화했다. 미니룸은 정식 라이터스 룸이 아니므로 작가들은 더 낮은 임금을 받았고 선배 작가로부터 배울 기회가 적어졌다. 그러면 넷플릭스는 왜 미니룸을 만들었을까? 효율성과 비용 측면이 크다.

 

과거에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선보인 뒤 반응과 화제성에 따라 정식 대본 제작 여부를 결정했다. 파일럿을 제작하면 프로그램 제작비와 배우들 캐스팅 문제까지 고려해야 하기에 제작비가 만만치 않았다. 넷플릭스는 파일럿을 만들기보다 미니룸에서 생성된 자료를 바탕으로 시리즈 방영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작가들은 이러한 관행으로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경우가 많고, 미니룸이 갑작스럽게 성장하면서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제작 방법을 배우는 과정에도 혼란이 생겼다”고 말했다.

 

위는 작가조합의 주장이다. 사실 미니룸에도 장점은 존재한다. 미국 연예 월간지 VanityFair의 기사 “Is This the End of the TV Writers’ Room as We know It?”(우리가 알고 있는 라이터스룸의 종말이 다가오는가?)에서 한 작가는 미니룸은 오히려 작가가 시리즈 전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말한다. 파일럿은 초기에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로 인해 전체 스토리 대비 파일럿 자체가 지나치게 영리하거나 화려해 정식 론칭되었을 때 이야기 밸런스가 무너지고 용두사미식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그에 대비해 미니룸은 사전에 4~5개의 에피소드를 계획하고 만들어 가기에 작가로 하여금 전체 시즌이 어떻게 진행될지 파악하는 기회를 준다.

 

또한 소외된 목소리를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장점도 있다. 라이터스룸에는 다양한 경력을 지닌 작가들이 참여하지만 아무래도 그곳에서조차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작가들과 그럴 수 없는 작가들이 있다. 신입과 초보에게는 일을 배울 기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작가가 지닌 다양한 관점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할 수도 있다. 소수의 작가가 참여해 내밀하게 작업하는 미니룸은 그런 문화로부터 다소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Writing for TV is nothing like you (probably) thought”(TV 작가가 된다는 건 아마 당신의 상상과는 한참 다를 것이다) TV 작가들의 불안정한 노동 환경을 다루는 워싱턴포스트 기사 Ⓒ 워싱턴포스트
할리우드에 새롭게 나타난 미니룸을 소개하는 기사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일독을 권한다. Ⓒ VanityFair

작가들의 승리, 동시에 AI와 공존을

9월 27일 파업은 종료되었다. 작가조합과 제작자연맹이 합의에 이르렀다. 배우조합의 파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0월 9일 잠정 합의안을 두고 조합원들이 투표했으며 99%가 계약을 지지하기로 투표했다. 작가조합에 따르면 8,525개의 유효 투표 중 찬성이 8,435표, 반대가 90표(1%)였다고 한다. 새 계약 기간은 2023년 9월 25일부터 2026년 5월 1일까지이다. 합의안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AI 활용 관련
    – AI 활용을 전면 금지하지는 않기로 합의함.
    – 단, 다음의 사용 규칙을 준수할 것.
    – 기존 작가가 이미 작성한 시나리오를 AI가 편집할 수 없음.
    – 작가가 AI 결과물을 각색해도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간주될 수 있도록 함.
    – 작가가 제작사에서 제공한 AI 결과물을 활용할 경우 제작사는 AI가 만들어 낸 결과물임을 작가에게 알려야 함.
    – 제작사는 작가에게 AI를 활용할 것을 강요할 수 없음.
  2. 임금 및 노동환경 관련
    – 3.5% 이상의 임금 인상. 스태프 작가와 스토리 편집자, 총괄 스토리 편집자는 향후 3년 동안 기본 주급 인상을 보장받음. 참고로 첫해는 5%, 두 번째 4%, 3.5%씩.
    – 전속 작가가 특정 에피소드 집필을 개별적으로 담당하는 경우 기본 주급 외 대본 비용도 지급해야 함.
    – 재상영분배금(Residual) 인상. OTT 기업이 스트리밍 횟수 데이터를 공개해 투명한 로열티 분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함. 단 일반 대중에게 정확한 통계치는 공개하지 않을 예정. 재생영분배금 인상으로 제작진에게 지급되는 금액이 약 76% 증가할 것으로 예상됨.
    – 한 프로젝트 고용 시 최소 인력 수 명시. 6부작 시리즈 및 그 이하는 최소 3명의 작가-제작자. 7~12부작은 5명. 13부작 및 그 이상은 6명.
    – 쇼러너(Showrunner, 시리즈물 총책임자)란 명칭 사용 공식화. 쇼러너란 명칭이 유명함에도 그간 작가조합과 제작자연맹 사이 계약서에는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음. 쇼러너는 시리즈의 총책임 작가이며 작가 고용 결정권자로 정의함.
    – 미니룸, 라이터스룸과 같이 사전 기획 단계에서 스태프들의 최소 10주간의 고용 보장함.
    – 시리즈 제작이 확정될 경우 스태프들은 최소 20주 고용 보장하거나 그 이전 제작 기간 전체에 대한 고용을 보장함. 둘 중 더 짧은 기간에 고용을 보장함.

 

작가조합 파업 역사상 두 번째로 길었던 이 파업(148일)의 결과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파업은 AI 침공에 맞선 인류의 첫 파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디언지는 관련 분석 기사에서 이번 파업이 AI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scored a major victory)라면서 인류의 창의성을 놓고 예술가들과 로봇이 경쟁하는 시대가 왔다고 해석했다. MIT 경제학자 사이먼 존슨은 “작가들에게 환상적인 승리다. 이것이 나머지 산업의 올바른 모델이 되길 바란다”며 “작가가 받는 크레딧, 보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연구 도구로 AI를 사용할 수 있어 매우 똑똑한 결과가 나왔다. 이번 합의로 더 나은 결과물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스튜디오 측도 손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이먼 존슨은 과거 IMF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냈으며 최근 저서 『권력과 진보(Power & Progress)』를 통해 테크노 낙관주의와 AI 환상에 빠진 세상을 경고했다. 특히 AI 활용과 관련해 많은 이들이 우려한 지점은 AI가 작가의 일을 대체한다는 문제도 있지만 AI를 근거로 작가에 대한 신뢰나 보상을 낮출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작가의 작업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AI 활용을 강요할 수 있다. 혹은 작가가 AI를 활용하면 (자신의 순수한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므로) 보상을 더 적게 줄 수도 있다. 에모리대학교 법률 및 AI 교수 매튜 사그는 “미국 작가조합 시위의 핵심은 AI로 생성한 작품을 작가의 신뢰도를 저하하거나 작가의 권리를 분리하는 데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AI가 작가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과 작업 속도를 높일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둔 채로 작가에게 진정한 선택권을 남긴다는 측면은 미국 작가조합의 중요한 승리이다”라고 분석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1980년, 1988년, 2007년 할리우드 작가 조합 파업 사진. 100년 이상의 유구한 영화 역사를 지닌 할리우드. 할리우드 작가들은 1933년 조합이 설립된 이래로 집단행동과 연대에 나선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동시에 파업의 여파로 영화 산업 현장의 마비를 불러오기도 했다. Ⓒ apnews

19세기 영국의 붉은 깃발법(마차 사업을 보호하고자 자동차 속도를 제한하고 마차가 붉은 깃발을 꽂고 달리면 자동차는 그 뒤를 따라가도록 한 법. 영국은 이 법으로 독일과 미국에 비해 자동차 산업이 뒤처지는 결과를 맞았다.)처럼 새로운 기술을 전면 제한하는 방식이 아닌 공존을 모색하되 자신의 권리를 지킨 것이다. 그 배경에는 서로의 권리를 지키고 함께 안전망을 만들고자 하는 연대 의식이 있었다.

 

기술 진보가 인류를 풍족하고 편리하게 만들 수 있지만 공유되지 않은 번영은 소수에게만 머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만이 아닐 수 있다. 번영을 공유하고 다수가 행복할 수 있는 포용성이 AI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아닐까. <권력과 진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AI 환상을 벗어나 기술 혁신이 번영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만들 때 진보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지금까지 인간이 역사적으로 달성해 온 진본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