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ots
▪ 디앤디는 일본 하라 디자인 연구실을 거쳐 1997년 드로잉 앤드 매뉴얼을 설립한 나가오카 겐메이가 20년 가까이 이어 온 프로젝트로,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를 추구한다.
▪ 일본의 47개 도도부현을 비롯해 한국 서울, 제주에 파트너 상점을 운영 중이며 각 상점은 해당 지역의 특색을 담은 물품을 판매한다.
▪ 디앤디는 지역의 개성과 디자인을 담은 매거진 『디 디자인 트래블』 외에도 마을을 고스란히 옮겨 온 전시장 시부야 히카리에 d47 뮤지엄 등을 운영 중이다.
지속가능한 좋은 디자인을 사용합시다(ながくつづく良いデザインを使お).
기후 위기 시대 속 지속가능한 소비는 어떤 모습일까? 물건을 적게 소유한다는 미니멀리즘이 심플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인테리어 유행으로 변질되고, 우리 동네 중고 시장이라는 플랫폼은 필요 없는 것을 정리하고 저렴하게 구입하는 합리적 소비라기보다 새로운 물건을 들이거나 또는 잠시 스쳐 가는 사용품을 저렴하게 사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쇼핑도 쇼츠를 닮아가는 듯한 초 스피드, 최저가, 한정판의 시대 속에서 장인 정신, 공예란 개념은 조금 먼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인스타그래머블하고 약간은 힙한 새로운 유행템일 뿐이라고 넘겨짚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이 낯설어진 개념을 20년 넘게 추구하며 커뮤니티를 만들고 문화를 바꾸어 가는 이들이 있다.
디앤디파트먼트 프로젝트(D&DEPARTMENT PROJECT, 이하 디앤디)는 일본의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가 2000년에 시작한 프로젝트로,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을 콘셉트로 한 상점 및 판매, 식음료, 출판, 관광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65년 홋카이도 출생, 일본 하라 디자인 연구실을 거쳐 1997년 드로잉 앤드 매뉴얼을 설립하며 35세까지 디자이너로 전력을 다한 그가 40대에 접어들어 디자인의 가치에 관해 깊이 고민한 결과 도출해 낸 핵심이 바로 롱 라이프 디자인이다. 이후 일본의 47개 도도부현을 기준으로 각 거점 롱라이프 디자인을 알리는 디앤디파트먼트 상점을 열고 있으며, 각 상점은 지역의 개성과 긴 호흡의 땅과 같은 디자인을 목표로 한다. 디앤디가 내세우는 롱라이프 디자인 10계명은 아래와 같다.
롱 라이프 디자인 10계명
1. 수리: 계속 사용하기 위해 제품을 수리할 수 있는 시스템과 방법이 존재해야 한다.
2. 비용: 제품의 비용은 제조업체가 생산을 지속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3. 판매: 판매자에게는 고객에게 믿음을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4. 생산: 제조업체는 제작 프로세스에 열정을 가져야 한다.
5. 기능성: 제품은 기능성이 높고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6. 안전: 제품은 사용하기에 안전해야 한다.
7. 계획적 생산: 제품은 계획되고 예측 가능한 생산량에 따라 생산되어야 한다.
8. 사용자: 제품은 사용자가 더 넓은 범위의 이슈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9. 환경: 제품은 모든 시기에서 환경을 고려해 제작되어야 한다.
10. 디자인: 제품은 아름다워야 한다.
– 나가오카 겐메이, 『디앤디파트먼트에서 배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전하는 가게’ 만드는 법』, 에피그람, 2014
디앤디는 현재 일본뿐만이 아니라 서울과 제주에도 각각의 파트너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파트너 지점은 프랜차이즈와는 다른 의미로, 중고 상품을 주력으로 한 디앤디 상점으로는 초기의 수익을 담보하기 어렵기에 다른 생업을 겸한다. 각자의 메인 생업을 중심으로 디앤디의 가치를 추구하며 활동 범위를 넓혀 가는 게 디앤디의 파트너 지점 운영 방식이다.
그렇기에 좋은 디자인, 오래가는 디자인을 알리고 각 지역의 좋은 디자인을 발굴해 알리고자 하는 기치에 공감하는 이들이 디앤디의 파트너 지점으로서 함께 하고 있다. 본부 역시 가게 위치 선점부터 홍보, 운영까지 일반적인 프랜차이즈의 일괄적인 세팅과 운영이 아닌, 지역의 개성을 살리고 스텝들의 역량을 점차 키워나갈 수 있는 방향을 잡아가도록 설립 초반에 많은 부분을 함께하고 돕는다.
이러한 의미는 이름에도 담겨 직영점이 아닌 곳들은 모두 <디앤디파트먼트+지역명+by 파트너사명>으로 표기한다. 한국에는 <디앤디파트먼트 서울 by 밀리미터밀리그램>과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by 아라리오>가 있다. 서울점은 지난 2023년 개점 10년을 맞았다. 디앤디 지역점 운영 원칙 3가지는 아래와 같다.
▪ 본부가 선택한 롱 라이프 디자인 상품을 판매하는 것
▪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일과 물건을 꾸준히 소개하고 판매하며 워크숍 같은 모임을 만들어 교류의 장이 되는 것
▪ 먹고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 나가오카 겐메이, 『디앤디파트먼트에서 배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전하는 가게’ 만드는 법』, 에피그람, 2014
시민의 마음에 스며든, 서울의 디앤디
지난 2023년 11월 9일 디앤디 서울점이 10주년을 맞이했다. 디앤디의 첫 해외 지점인 서울점은 1999년 이태원의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로 출발했던 밀리미터 밀리그램(이후 mmmg)이 운영하고 있다. 서울점이 위치해 있는 이태원 건물은 디앤디의 전 지점이 추구하는 것처럼 오래된 건축물을 최대한 손을 대지 않고 이용하는 형태로 1층에는 앤트러 사이트 카페가 있으며 지하 1층은 디앤디 상점, 지하 2층에는 mmmg와 플라이탁의 매장이 자리 잡고 있다. 디앤디 상점에서는 일본어판이기는 하지만 『디 디자인 트래블』 잡지도 현장 구매가 가능하다. (교토 편과 가나자와 편은 한국어 번역본이 있다.)
한국과 서울을 나타내는 서울점의 주요 상품은 빈티지 유리컵, 떡볶이 접시, 송월 때타월 등이다.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고 대접받는 롱 라이프 디자인으로서의 중고 상품에 관한 의식이 높지 않은 한국에서 10년간 같은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서울점만의 저력은 무엇일까. 김장 김치 담그기, 죽공예 체험, 막걸리 시음 프로그램 등 한국만의 롱 라이프 디자인을 발굴해 온 디앤디 서울 스태프들의 마음과 시도들이 서울 시민의 마음에도 10년 동안 조금씩 스며들 듯 가 닿은 게 아닌가 싶다.
10주년 행사로는 디앤디파트먼트의 창립자이자 가리모쿠60의 브랜드 디렉터인 나가오카 겐메이 씨와 가리모쿠가구의 야마다 이쿠지 상무를 초대해 밀리미터밀리그람의 배수열, 유미영 공동대표의 진행으로 가리모쿠60에 대해 궁금한 내용을 묻고 답하는 토크 시간이 펼쳐졌다. 이날의 강연 영상은 디앤디 서울의 인스타그램(@d_d_seoul)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서울점은 8p 분량의 10주년 기념 타블로이드지를 발간해 행사 참여자 외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매장을 찾은 손님들과 공유하였다. 또한 디앤디를 알린 주요 브랜드 중 하나인 가리모쿠와의 협업을 통해 10주년 기념 리미티드 K체어를 제작 및 판매하기도 했다.
서울점의 매장 및 행사의 주요 정보는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월 15일에는 〈d SCHOOL 알기 쉬운 제주 감귤〉 편을 개최하여 섬에 사는 농부, 양인혁 농부님과 음식 문헌 연구자 고영의 강의를 진행하였고, 이에 맞춰 2월 14일부터 18일까지 잼팟과 함께 하는 탠저린 마멀레이드 카페를 오픈하기도 했다. 사면서 배우고, 먹으면서 배우는 가게의 연장이 한국의 디앤디에서도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디자인 여행을 제안하는 『디 디자인 트래블』
디앤디파트먼트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중고 상점으로서의 정체성이 큰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디 디자인 트래블』 잡지 발간이 또한 디앤디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2009년 시작한 『디 디자인 트래블』은 매년 두 편의 지역을 다루는데, 현재 첫 해외 콘텐츠로서 제주 편을 준비하며 2023년에 본부 팀이 제주에 취재를 왔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d 디자인 트래블>은 단순 상업 잡지가 아닌 잡지 제작 준비부터 출간 후의 과정까지가 모두 긴 워크숍의 느낌이다. 새로운 지역의 잡지가 발간되면, 도쿄 시부야 히카리에 빌딩에 위치한 상설 전시회장인 d47 뮤지엄에서 해당 지역의 잡지에 실린 상점과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를 열고, 그 지역의 음식을 d&d 식당에서 만나볼 수 있다.
2023년 4월에는 약 2개월간 편집부가 직접 가나가와현을 여행하고 제작한 가이드 『가나가와(神奈川)』가 발매되었고, 발매일에 맞춰 3개월간 d47 뮤지엄에서는 ⟪d design travel KANAGAWA EXHIBITION⟫이 개최되었다. 뮤지엄 숍에서는 가나가와다운 기념품을 기간 한정으로 판매하며, 실제 가나가와 중화 거리에서 사용되는 철냄비, 히코네의 들판세공, 오다와라 목제품, 크래프트 맥주, 토속주, 어패류 가공품까지 200여 품목을 전시 및 판매하였다.
마을을 담은 전시장, d47 뮤지엄
지역 특산물 전시만이 아닌 실제 운영 중인 가게나 공방을 어떻게 도쿄에서 전시를 통해 알리는지가 바로 시부야 히카리에 d47 뮤지엄의 볼거리다. d47 뮤지엄의 ⟪d design travel KANAGAWA EXHIBITION⟫에서는 가나가와 편에 실린 장소들을 나타내는 소품들을 모은 작은 데스크가 늘어선 오밀조밀한 전시를 감상할 수 있었다. 가게의 포렴, 한편에 놓였던 가구, 실제 사용하는 식기, 책자에서의 해당 페이지, 판매하는 물건부터 장바구니까지. 평소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던, 가게의 배경 속에 벽지처럼 자연스럽게 스며 들어있었을 생활용품들이 도쿄 시부야의 고층 건물 속 전시장에 전시품으로서 자리한 순간, 기존의 의미에서 탈피해 가나가와의 롱 디자인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물로 변신한다. 참으로 디앤디다운 전시이다.
해당 전시와 함께 d47 디자인 트래블 스토어에서는 『가나가와(神奈川)』 편에 나오는 상점의 물건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이 중에는 가나자와현 미사키 지역의 <카모메 어린이 합창단>의 CD도 함께 판매되었는데 이들이 부른 노래가 연신 흘러나왔다. 마침 같은 층의 강당에서 이 합창단의 유료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티켓은 현장 구매도 할 수 없이 이미 매진이었다.
이렇듯 직접 그 지역에 가보지 못했어도 d47 뮤지엄에서 잡지와 상점, 음식, 문화프로그램을 통해 관광지만이 아닌 d47 뮤지엄만의 시선으로 찾아낸 각 지역의 특색과 매력을 잔뜩 담은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이는 다시 이를 통해 해당 지역에 대해 관심과 흥미도를 더욱 높여 직접 발걸음을 가 닿게 하도록 하는 훌륭한 유인책이다. 이 여행디자인 잡지 발간의 목적은 지역을 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잡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지역의 스텝들이 상품 보는 눈을 높이고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높여가는 것이 또 다른 한 가지 큰 축의 이유라고 나가오카는 이야기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디앤디만의 방법
최근 몇 년 동안 부각된 브랜드와 함께하는 커뮤니티 문화가 디앤디에서는 이미 20년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생산자와 유통자, 소비자가 함께 상품에 대해 알아가는 d SCHOOL은 물론, 공식 홈페이지 또한 단순히 상점과 상품을 알리고 판매하는 역할만이 아닌 나가오카 일기, 스텝 일기, 판매 상품의 실사용 후기, 제작처 방문 후기 등을 통해 방문객들과 삶을 함께한다는 의미를 몸소 보여주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식당의 메뉴 소개도 원산지 표기에만 그치지 않고, 원산지의 풍경을 담은 사진, 어촌 관계자의 인터뷰까지 홈페이지와 블로그를 통해 적극 알리고 공유한다. 디앤디가 어떤 마음과 시선으로 이 식재료를 선택했고 어떻게 식탁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를 정성스럽게 보여주며 디앤디와 함께하는 이들도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들에 담긴 정성과 마음, 노력에 관심을 갖도록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 이를 통해 디앤디를 애용하는 이들은 디앤디의 안목과 신념을 믿고 물건을 구매하고, 지역의 특산물들을 알아가는 한편, 디앤디가 그들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오래가는 좋은 물건을 소중히 쓰는 마음과 지역의 장인들을 알아가고자 하는 활동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경기가 안 좋으면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에도 질적 변화가 생깁니다. 제대로 된 물건을 사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지요. 물건을 사기 위해 공부하기 시작하고 점원, 제작자, 구매자 간에 교류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커뮤니티입니다.
– 나가오카 겐메이, 『디앤디파트먼트에서 배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전하는 가게’ 만드는 법』, 에피그람, 2014
이렇게 구축되는 커뮤니티는 단순히 디앤디라는 브랜드의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닌 각 지역의 상품과 마음의 선순환을 돕는 현상이 되어 일반적인 팬 마케팅과는 다른 형태를 띤다. 결국 디앤디는 상점인 동시에 일본 47개 도도부현에 전하는 마음을 퍼트리는 일종의 사회운동이다. 소비를 위한 물건이 아닌 만드는 사람의 마음, 전하는 사람의 마음,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보는 순환. 그것은 현대 소비 사회에서는 잊힌 지 너무도 오래되어 박물관이나 럭셔리 물품에서나 쓰이는 공예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 단어를 다시 기능과 장식의 양면을 조화시켜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일이라는 본래의 의미로 돌려놓는다. 소비를 위한 디자인이 아닌, 삶을 위한 디자인, 삶을 위한 공예. 공예 하듯 꾸려 가는 삶. 이 삶의 소중함을 상점이라는 형태로 전하기 시작한 디앤디의 활동을 지켜봐야 할 의미는 여전히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