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미술관 전시장의 닫힌 문에서 “똑, 똑, 똑, 똑, 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멈춘다. 이 작품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 설치되었던 김범 작가의 <무제(문 두드림 #3)>이다.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자신의 지각 방식을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범(1963- )은 인간 지각이 근본적으로 의심되는 세계를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다루는 작가다. 같은 전시에서 선보인 <무제(TV 마이크로웨이브)>를 보면 그의 유머 코드가 한결 더 잘 다가온다. 미술관 안 카페에 설치한 작품인데, 얼핏 보면 카페 주방에 있는 전자레인지에서 통닭이 조리되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은 통닭 모양의 조각이 돌아가는 영상이 모니터에서 상영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김범, <임신한 망치>, 1995. Ⓒ 직접 촬영
Eadweard Muybridge, photographic study of a man jumping a horse. Ⓒ Britannica

당연한 것들 속에 숨겨진 ‘아하’의 순간

김범은 우리에게 당연하게 인지되어 온 사물을 익살스럽게 뒤집어 보는 상황으로 관객을 이끈다. 가공하지 않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제시하는 식이다. 김범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말 타는 말(마이브리지에 의한)>을 보면 그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사진의 역사에서 달리는 말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사진이 있는데, 김범은 이 이미지를 비틀어 짧은 영상으로 만들었다. 이 영상에서 말을 타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닌 말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말이 말을 부리는 것은 어색하게 여기면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는 세태를 꼬집는다.

 

“사람은 주인도 되고 말도 될 수 있는 특이한 내적 구조를 가진 것 같다. 그리고 사회의 많은 부분이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 김범 –

 

김범은 1990년대 한국 개념미술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가임에도 대중적으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최근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바위가 되는 법(2023.7.27. ~ 12.3.)》이 개최되며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동안 작가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일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제안한 만큼, 전시를 감상하다 보면 아하! 하고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 있다.

 

먼저 김범의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를 보자. 탁자 위에 3개의 사물이 배치되어 있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평범한 다리미, 주전자, 라디오로 보인다. 물론 일상에서 함께 배치될 일이 별로 없는 사물들이긴 하다. 서로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물이 배치된 모습은 더 낯설게 느껴진다. 왠지 사람처럼 앉아있는 모습이랄까? 세 점의 사물들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전자에는 안테나가 솟아 있고, 다리미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으며, 라디오 밑에는 금속 재질의 받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작품 제목에 눈길이 간다.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우리에게 익숙한 그 사물들은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이처럼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물들에 귀를 기울인다.

 

“김범의 오브제는 묘사되는 기초 사물의 특징, 심지어 ‘본질’과 ‘개념’마저 소유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사물이다.”

– 정도련·큐레이터 –

 

<임신한 망치>는 1997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당시 드넓은 전시장에 만삭의 모습을 한 망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관람객들은 발칙하면서도 기발한 작가의 상상력에 즐겁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임신한 망치>는 앞서 살펴본 <말 타는 말>에서처럼, 사물이 인간을 위한 도구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기존 관념을 뒤집는 작업을 주로 선보이고 있으며, 이 작품도 이러한 작업 세계의 연장선에 있다. 인간에게 사물은 생명을 갖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데, 김범은 망치가 생명을 잉태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내세운다.

김범, <“노란비명” 그리기>, 2012. Ⓒ 국립현대미술관
김범, <무제(뉴스)>, 2002, 1채널 비디오, 1분 42초. Ⓒ 직접 촬영

무생물에 호흡을 불어 넣는 일

김범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주로 언급되는 논점 중 물활론적 사고가 있다. 물활론적 사고는 생명이 없는 사물을 생명체로 여기는 세계관을 뜻한다. 사물에 인간적 감정을 투영함으로써 그것을 인간의 차원으로 포섭하는 관점이다. 사물의 인간화는 사물을 인간과 동등한 권리와 감정을 지닌 존재로 간주하는 것으로, 사물 또한 인간과의 동반자적 삶을 영위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범의 작품에서 물활론적 사고는 궁극적으로 평범한 사물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다음으로 <무제(뉴스)>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방송되는 TV 뉴스를 임의로 짜깁기한 작품이다. 뉴스 속 아나운서는 뉴스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텍스트를 부자연스럽게 말한다. 짜깁기한 텍스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말이 되는 듯하지만, 사실은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세상엔 놀랄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여러 가지 일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일에 대해 말하거나 들을 때마다 반드시 놀란 표정을 짓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있고, 가만히 있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그러다 보면 식사 시간도 되고, 잠잘 시간도 되고, 그래서 한잠 자고 나면 이미 다음날이 되어 있습니다.”

 

언어는 음소, 음절, 단어, 문장으로 구성된다. 김범은 이러한 요소들을 해체함으로써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언어를 와해시킨다. 그동안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 은폐되어 있던 것들을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인식체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김범 작가의 이 작품은 기호(sign)에서 기표와 기의의 결합 관계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기의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표는 말을 이루는 소리나 글자를 의미하고, 기의는 말의 의미를 뜻한다. 기표와 기의는 필연적인 연관성에 의해 묶이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결합한다. 가령 나무라는 소리나 문자가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해살이 식물”이라는 뜻과 결합해 언어를 구성하는 것은 임의적일 뿐이다. 김범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사회를 구성할 것이라는 환상에 배신을 가한다. 작가는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깨지는 지점을 유쾌하고 기발하게 포착함으로써 우리에게 틈을 제시한다.

무엇이 미술일까?

전시장의 커다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미로 작품들도 흥미롭다. <친숙한 고통>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리즈는 크고 작은 문제를 마주하게 되는 인생의 난관을 비유한다. 우리는 인생의 경로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에 계속 부딪힌다. 작가는 13점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에서 1부터 13까지 난도가 점점 높아지는 미로 그림을 그렸다.

 

6호 사이즈 캔버스에서 시작한 이 시리즈는 13번째 작품에서 491×348.5cm 크기로 커졌다. 사람 키 높이의 약 3배에 달하는 대작인데, 전시장에서는 작은 미로에서부터 가장 큰 미로까지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이 연작의 미로 이미지는 작가에 의해 디자인된 퍼즐이다. 각각의 모양도 조금씩 다르다. 관람객은 이 시각적인 퍼즐 앞에서 눈으로 미로 찾기를 하면서 인생의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게 된다.

 

전시회에서 관람객의 이목을 끈 작품으로는 <“노란비명” 그리기>를 꼽을 수 있다.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면 노란 회화 작품 건너편에서 커다란 비명이 들려온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EBS 프로그램<그림을 그립시다>의 밥 로스를 떠오르게 만든다. 퍼포머는 “참 쉽죠?”라는 대사를 하던 밥 아저씨의 레슨 영상을 따라 “노란비명”이라는 추상화를 그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엉뚱하고 능청스러운 퍼포머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오지만, 그저 허무맹랑한 작품은 아니다.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불신과 오해를 담으며 무엇이 미술인가?를 질문한다.

 

김범은 보이는 것과 그 실체의 간극을 끊임없이 탐색한다. 대상의 이면에 대한 그의 성찰은 <교육된 사물들> 시리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시리즈는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 등 4점으로 구성된다. 이번 전시에서 작품 4점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이 시리즈 중 한 점인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에는 갖가지 사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걸상에 앉아 칠판을 바라보며 영상으로 재생되는 강의를 듣고 있다. 영상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너희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해.”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의사소통 체계가 부재한 채 사람이 사물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주입하는 상황을 담아낸다. 사물을 의인화한 설정으로 일방향적이고 주입식으로 진행하는 교육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물론 비판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담아내지는 않는다. 그저 불통(不通)하는 대상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면서 무목적성의 지식이 만연한 사회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김범,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2010. Ⓒ 직접 촬영

“김범의 사물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인식에 대해 제기되어 온 질문의 방향을 급진적으로 뒤집는다.”

– 장지한·미술비평가 –

 

이번 개인전에서는 7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는 만큼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 유머와 해학에 피식하는 순간이 있고, 어떤 작품 앞에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김범의 작품은 사물과 실재의 관계를 문제시하면서 사물에 내재한 본질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와 실제 기능의 관계를 해체하면서 이를 재조합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우리의 지각 방식에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