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3 Dots 

▪ 저작권 수출 사례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한국 아동문학은 갈수록 깊이 있고 내실 있는 작품들로 한국형 창의성을 발전시켜 가고 있다.

▪ 2024년 제1회 부산국제아동도서전에는 총 16개국에서 193개 출판 관련 단체가 참여했으며 출판인, 작가 외에도 어린이 독자가 함께해 눈길을 끌었다.

▪ 첫 행사인 만큼 해외 관계자 참여 및 실질적인 저작권 거래 성과가 부족해 아쉬웠으나 향후 한국 아동문학과 출판 산업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신호탄이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을 얻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어떤 책들은 어린이책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기도 했다. 어린이책은 단순히 읽기 쉽고 가벼운 공상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어린이는 섬세하고 복잡한 감동을 느끼기에는 부족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들은 종종 단순함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책의 본질은 훨씬 더 깊고 내밀한 어딘가를 가리킨다. 삶의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 우리가 대충 알고 얼버무리며 지나쳤던 것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어린이책의 본질일 것이다. 이수지 작가의 『만질 수 있는 생각』에 따르면 “어린이책의 핵심은 단순히 읽기 쉬운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이고 당연한 진실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데 있다.”  이러한 그림책은 어린이뿐 아니라 함께 읽는 성인에게 새로운 성찰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는 좋은 어린이책을 통해 아이들이 개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브루노 무나리에 따르면 좋은 어린이책은 어린이가 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무려 피카소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며 극찬하기도 했던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는 어린이책을 통한 기초 교육을 강조하며 어린이책을 다수 창작했다. 그는 좋은 어린이책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아이가 거짓된 권위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존중하며 살아가도록, 그러면서도 다른 사회 구성원과 합의할 수 있도록.

 

이러한 논의는 결코 추상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에 따르면 “어린이에게 삶의 진실된 속성을 충분히 알려주고 이해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어린이가 불안에 휩싸이지 않도록 배려하는” 책들이 세계적으로 다수 창작되고 있다. 예를 들어 죽음을 다룬 『내가 함께 있을게』, 『무릎딱지』, 『혼자 가야 해』와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 책들은 기본적이고 보편적이며 당연한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진실이 절망으로 변해 발 디딜 땅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이를 위해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거나 성인 독자도 공감할 수 있을 만한 문학적 은유를 활용하기도 한다.

그림책 『산타 할아버지,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독후 활동 중인 한유진 작가와 아이들 Ⓒ부산국제아동도서전
주제 강연을 진행 중인 그림책 작가, 이수지 Ⓒ부산국제아동도서전

지면 위에 피어나는 한국형 창의성

1812년, 독일의 그림 형제가 전래 동화를 삽화와 함께 출판한 것이 그림책의 초기 형태가 됐다. 이후 19세기 중후반 영국에서 랜돌프 칼데콧(Randolph Caldecott)과 월터 크레인(Walter Crane) 같은 삽화가들이 단순히 텍스트를 보조하는 삽화를 넘어 이야기와 대등한 가치를 지닌 예술로 발전시켰다. 랜돌프 칼데콧의 그림은 텍스트가 담지 못한 정보를 보완하거나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으며, 월터 크레인은 장식적이고 화려한 스타일로 독립적인 미적 가치를 보여주었다. 1902년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가 피터 래빗 이야기를 출간하며 현대 그림책의 기틀을 마련한 후로 그림책은 텍스트와 그림이 긴밀히 상호작용을 하며 꽃을 피웠고 1990년대에 이르러 권위 있는 아동문학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 ALMA)이 그 예술적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한편 북미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삽화와 이야기를 결합한 영국과 독일의 그림책 전통이 본격적으로 영향을 키우기 시작했다. 유럽으로부터 대량 인쇄 기술이 유입되며 그림책 시장이 확대된 셈이다. 유럽의 영향을 바탕으로 북미 그림책은 20세기부터 독자적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1963년 모리스 센닥(Maurice Sendak)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Where the Wild Things Are)』가 등장하며 문학과 예술로 경계를 확장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시대를 거치며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서양식 삽화와 동화책이 소개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일본 고유의 스타일을 결합한 그림책이 점차 발전했다. 또한 부모 세대가 자신이 읽었던 고전 그림책을 자녀에게 이어 읽히는 문화로 정착했으며 오랜 경력의 대표 작가들이 세계적인 수준의 작품을 발표해 일본 그림책의 위상을 높였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그림책 문화가 정착하기까지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자유로움 속에서 그림책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하던 유럽과 북미의 생동감이 최근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그림책 시장에는 지금도 단순히 아이들이 읽기 좋은 내용을 넘어 삶의 복잡한 감정과 문제를 다루는 창의적인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그림책 중에는 상징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시각화하거나 그림과 이야기가 긴밀하게 연결된 서사적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또한 콜라주, 스크래치, 수작업 텍스처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독창적인 스타일이 돋보인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외국 독자들도 한국 그림책에 대해 “역동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평가한다. 흥미롭게도 한국 작가들의 독창성이 그림책 문화가 자리 잡은 북미나 유럽에서 역시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한국 작가로는 이수지 작가가 있다. 그녀는 『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 놀이』로 잘 알려진 “경계 3부작”의 창작자로, 2008년 뉴욕타임스에서 『파도야 놀자』를 우수 그림책으로 선정한 일을 계기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수지 작가의 “경계 3부작”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것을 의식의 영역으로 불러오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바로 제본선이다.

 

책을 펼치면 마주 보는 두 면이 접히는 공간인 제본선은 하나의 경계로서 존재한다. 독자는 그 경계를 무시하며 읽고, 작가는 그 경계에 무언가를 그리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해 왔다. 그렇다면 제본선을 없는 셈 치지 않고 그 존재를 인정하며, 더 나아가 그 지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책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이수지 작가의 경계 그림책 3부작인 『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 놀이』는 바로 이런 발상에서 탄생했다. 이 작품들은 책의 물리적 형태를 이야기의 일부로 통합하며 기존 그림책 형식을 전복하는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이수지 작가를 비롯한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은 깊이와 완성도를 겸비한 창의성으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24년 볼로냐 라가치상에서는 전 세계 65개국에서 총 3,355권이 출품된 가운데, 최연주의 『모 이야기』가 오페라 프리마 부문에서 수상하며 환경과 순환이라는 주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김지안의 『달리다 보면』과 서현의 『호랭떡집』은 코믹스-초급 독자 부문에서 특별 언급을 받으며 어린이 독자들에게 성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독창적인 이야기로 평가받았다. 이 외에도 안녕달의 『수박 수영장』, 최영란의 『엄마 마중』, 박정섭의 『팥죽 할멈과 호랑이』, 이억배의 『세 가지 보물』과 같은 작품들이 국내외에서 호평받으며 한국 그림책의 다양한 색채와 예술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그림책 작가들의 저작권 수출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국제 저작권 거래의 장이 되고자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등장했다.

한국의 어린이책을 소개할게요: 부산국제아동도서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한국 출판 저작권 수출 건수는 총 4,167건이며, 이 중 아동도서가 1,204건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한국 아동도서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열린 제1회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은 한국 아동도서를 세계에 소개하고 국외 시장으로의 진출을 돕는 중요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자 했다. 도서전은 세계적 아동문학의 중심지로 알려진 이탈리아 볼로냐 아동도서전을 모델로 삼았지만, 동시에 저작권 거래와 독자들의 축제를 결합한 독창적인 형식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모델이 된 볼로냐 아동도서전과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을 저작권 거래 측면에서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이 보인다. 2024년 4월 8일부터 11일까지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제61회 볼로냐 아동도서전은 세계 최대 아동문학 저작권 거래 전문 시장이다. 매년 전 세계 출판사, 작가, 삽화가, 교육 관계자들이 참가해 국제 출판계의 최신 정보를 교류하며 도서 해외 출판, 번역, 저작권을 거래하는 자리가 된다. 올해 볼로냐 도서전에는 90여 개국에서 온 1,400여 개의 출판사와 참가자 5,000여 명이 모였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은 출판업계 관계자들의 저작권 거래 중심 행사로, 어린이 관람객은 전시장에 출입하지 않는다.

 

한편 제1회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은 2024년 11월 28일부터 나흘간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개최되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부산시가 후원한 이번 행사에는 16개국에서 총 193개 출판 관련 단체가 참여했으며, 이 중 국내 출판사는 136개, 해외 출판사는 57개였다. 부산 도서전은 저작권 거래뿐만 아니라 여러 강연, 워크숍, 주제 전시, 작가와 독자와의 만남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더해져 어린이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볼로냐 도서전의 전문성과 부산 도서전의 대중성이 대비되는 지점이다.

 

2024년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는 한국 어린이책의 저작권 거래를 위한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출판사로부터 신청받은 위탁 도서 중 100권을 선정해 수출 전문가와 상담 대행을 진행했으며, 지난 2019년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BIB) 황금사과상 수상작인 명수정의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와 2024년 볼로냐 라가치상 우수상 수상작인 최연주의 『모 이야기』가 거기 포함되었다. 한국 아동문학 홍보와 수출 활성화를 위해 철저히 사전 준비한 끝에 다수의 출판 수출 경험을 보유한 전문 통역 인력이 출판사 수출 프로모션을 돕는 등 세심한 지원도 이루어졌다. 더불어 해외 구매자들에게 출판사와 도서 정보가 담긴 영문 초록 소개집을 사전에 배포하여 관심을 끌었다.

 

또한 부산국제아동도서전에서는 저작권 수출입 상담 지원과 함께 북남미 아동 출판 시장과 동향을 소개하는 세미나와 대만 출판 시장 및 동향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으며, 이를 통해 한국과 대만 간 저작권 교류 방향도 논의되었다. 거기에 국제 저작권 거래 활성화를 위한 펠로십 프로그램도 더해졌는데, 이 프로그램은 해외 출판인 및 저작권 전문가들에게 항공료 무료 지원, 저작권 센터 무료 이용 등의 혜택을 제공해 저작권 거래를 촉진하려는 시도였다.

 

그렇다면 이번 부산국제아동도서전에서 해외 저작권 거래 성과는 어떠했을까. 첫 행사였던 만큼 해외 관계자의 참여와 실질적인 저작권 거래 성과는 다소 아쉬운 편이었다. 전시 준비를 담당한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는 “해외 관계자의 참여 부족과 실질적인 저작권 거래 성과 부족이 이번 도서전의 주요 과제“라며, 앞으로 더 많은 국가의 출판인들이 부산을 찾아 실질적인 저작권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현실적인 유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은 첫 번째 행사로서 실질적 저작권 거래가 적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아동문학과 출판 산업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시도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대만의 로크스 출판사와 인도네시아의 그라미디어 그룹처럼 몇몇 해외 관계자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표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대만 로크스 출판사의 렉스 하우(Rex How) 대표는 부산 도서전을 SNS를 통해 소개하며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대만에 소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이수지 작가의 팬으로, 이전에도 그녀의 책 5종을 대만에 소개한 바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 엘렉스미디어의 데와 아유 스와라트리(Dewa Ayu Swaratri) 편집자는 최근 인도네시아 출판 시장에 보이는 변화의 조짐을 전했다. 그녀는 2년 전부터 서구권 중심이었던 그림책 시장이 변화하고 있으며, 일러스트가 독특하고 주제도 깊이 있는 한국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과학만화와 같은 한국의 논픽션 도서에도 크게 주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해외 관계자들과의 교류는 앞으로 더 나은 성과를 기대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신호로 평가된다.

출판업계 관계자가 중심이 된 이탈리아 볼로냐 아동도서전 ⒸBologna Children’s Book Fair
어린이도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된 부산국제아동도서전 Ⓒ부산국제아동도서전

독서와 독자의 만남: 경험하는 책 읽기

이처럼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은 해외 관계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 아동문학의 가능성을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실질적인 저작권 거래 성과와 국제적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도서전의 또 다른 축인 독자를 위한 문학 축제로서의 기능은 이번 도서전의 중요한 성과이다.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은 저작권 거래와 함께 어린이 독자들이 책을 직접 경험하며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고르는 경험은 일면 낯설다. 코로나 이후 온라인 구매가 일상으로 파고들며 직접 책방까지 걸어가 책장을 뒤적이며 책을 고르던 기억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홈페이지의 설명, 화려한 표지, 그리고 추천사가 더 화려해진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과정도 왠지 이전과는 다르다. 스마트폰을 물리쳐야 책에 다다를 수 있다. 숏폼 콘텐츠가 뇌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면 독서가 점점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벽이 없는 놀이터에서, 주변에 책이 자연스럽게 널브러져 있는 환경에서 책을 읽는다면 어떨까? 거대한 책 놀이터에서 책의 냄새도 맡아보고 마음껏 펼쳐보며 책을 읽는 것이 의무가 아닌 즐거움이 되도록, 책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주제 전시 <한다, 어린이>가 마련되었다.

 

이 전시는 네 가지 소주제로 나뉘어 어린이들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왔다. “기르다, 어린이”에서는 작은 생명을 돌보는 따스한 책이, “날다, 어린이”에서는 어린이를 마음껏 해방시키고 놀게 하고 상상력을 북돋아 주는 자유로운 책이, “비추다, 어린이”에서는 어린이의 모험을 응원하는 따스한 책이, “이끌리다, 어린이”에서는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를 위해 손을 잡는 책이 모여있었다.

 

책을 고른 후에는 마음껏 널브러져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준비되었다. 펠트 천으로 덮인 부드러운 종이 언덕이 전시장의 중심을 이루고 그 위에서 아이와 어른들이 함께 뒹굴며 책을 읽는 풍경은 그 자체로 편안했다. 독서가 놀이가 된 듯했다. 펠트 천 위 부드러운 종이 언덕이 있는 전시장 위에 아이와 어른이 함께 나란히 책을 읽고, 책을 읽다 노랗고 거대한 종이 괴물 속으로 들어가 숨바꼭질하는 풍경은 얼마나 자유로운지.

전시장 한편에 마련된 펠트 언덕과 종이 괴물 Ⓒ부산국제아동도서전
<한국에서 가장 즐거운 책> 전시 전경 Ⓒ부산국제아동도서전

책의 내용이 먼 이야기가 아닌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경험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다. 독자는 책의 내용에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투영하며 작중 캐릭터나 상황을 자신의 삶과 연결 지어 또 다른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이때 책의 언어는 독자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자신의 언어로 새겨지고 현실 속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 특별한 경험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을 넘어 현실과 의미를 잇는 다리가 된다. 독자의 현실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창이 되는 것이다.

 

부산국제아동도서전에서도 이러한 독서의 힘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워크숍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전통 팔찌와 용보 체험을 통해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프로그램부터 나만의 발명 아이디어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프로그램, 컵을 통해 마을을 만들고 함께 어울려 사는 친구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줄리아 파스토리노와 함께하는 나의 모습 그리기> 워크숍에서는 줄리아 파스토리노(Julia Pastrorino)의 신작 그림책 『내가 정말 나일까?』를 함께 읽고 참가자들이 자신의 모습과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책과 자신의 내면을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정말 나일까?』는 줄리아 파스토리노가 그림을 그린 작품으로, 주인공 우고가 매일 아침 다른 선, 도형 등으로 깨어나는 모습을 통해 그의 기분과 감정의 변화를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워크숍에 참여한 어린이들은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분과 감정의 변화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변화하는 자신의 내면까지 깊이 탐구했다. 이를 통해 책을 읽었던 경험이 독자 삶 속의 살아있는 경험으로 전환되며 더 짙고 깊은 의미를 남겼다.

줄리아 파스토리노와 함께하는 '나의 모습 그리기' Ⓒ부산국제아동도서전
그림책 『달터뷰』를 읽고 독후 활동 중인 어린이들 Ⓒ부산국제아동도서전

북미에서는 그림책이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 사회기술·감정 학습 프로그램인 SEL에서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학교와 도서관에서 SEL 주제를 다루는 데 그림책을 활용하며 어린이의 정서적 성장과 사회적 기술 향상을 돕고 있다. 감정을 주제로 한 그림책을 읽고 토론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감정을 표현하도록 돕거나 그림책을 통해 배려와 소속감, 용기와 평등의 가치를 가르치는 식이다.

 

사실 이러한 그림책의 기능은 성인이 된 우리에게도 필요할 수 있다. 우리 모두 키는 컸을지 몰라도 마음 한편은 크지 못한 채 남아 있으니. 우리의 내면 아이는 일상에서 지뢰처럼 튀어나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는 그곳으로 가는 길마저 숨겨 버린다. 그림책은 비어 있는 글자의 자리에 차 있는 풍부한 그림으로 우리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사실 그 마음이 숨어야만 할 만큼 이상한 어린이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길.

 

1990년대 초, 유럽 그림책 시장에는 전통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예술성과 실험성을 드러내며 성인도 읽을 수 있는 깊이 있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현재 한국 그림책 문화와 유사하다. 삶의 풍부한 감정을 담은 다양한 그림책이 한국어로 출간되고 있다는 점은 독자로서 큰 행운이다. 성인 독자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깊이와 예술성을 갖춘 한국 그림책이 더욱 다양해지길 기대하고 있다.

 

한국의 그림책 저작권자, 출판 관계자, 어린이 독자, 성인 독자 모두를 포용하려 했던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의 시도에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첫 회이다 보니 저작권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한국 그림책 문화의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공존하는 축제를 만들겠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도서전이 단지 출판 관계자만의 축제나 아이들만을 위한 축제를 넘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어울리는 공동의 축제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피어나는 한국 그림책 시장과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을 통해 각자가 희망을 발견하고 서로를 이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