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ots
▪ 호레이셔스 가든(Horatio’s Garden)과 시카고 식물원(Chicago Botanic Garden)은 정원이 신체적·정서적 회복을 돕는 중요한 자원임을 보여준다.
▪ 두 정원은 사용자의 접근성을 중요시한 설계를 통해 휠체어나 병상 환자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 정원은 단순히 심미적 공간을 넘어서 다양한 활동과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연결을 지속적으로 촉진한다.
최근 각 지자체는 “정원 도시”를 내세우며 녹지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계절마다 유휴지에 꽃을 심거나 정원지원센터, 대형 정원박람회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진다. 서울시도 2026년까지 1,007개의 정원을 조성하는 매력가든, 동행가든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열을 올리고 있다.
무채색의 도시에 정원을 늘리는 것은 도시 경관의 아름다움을 높이는 차원에서 긍정적이다. 단순히 심미적 효과에 머물지 않고 재활 자립 작업장이나 학습 지원센터, 일부 의료기관과 노인복지관까지 정원을 확대한다고 하니, 이 부분에서 “치유”라는 사회적 가치를 담아내려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한국에서는 “정원치유”라는 개념이 비교적 최근인 2021년 산림청의 제2차 정원진흥기본계획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반면 해외에서는 이미 정원의 치유적 가치에 주목해, 경관 감상 차원을 넘어 신체적·정신적 회복, 일상 복귀, 사회적 관계망 형성까지 폭넓게 실천하고 있다. 실제로 2021년 영국 왕립원예협회(RHS)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매일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의 웰빙 점수가 전혀 가꾸지 않는 사람들보다 6.6% 더 높고, 스트레스 수준은 4.2% 더 낮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우울증 감소에도 유의미한 효과가 있으며 예방책으로도 정원 가꾸기를 권장하고 있다.

환자를 위한 마음 처방, 영국 호레이셔스 가든(Horatio’s Garden)
영국에서는 매년 약 4,400명이 척수손상 환자가 발생하며 자국 내 이미 약 10만 5천 명이 이 질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척추손상 환자들은 평균적으로 5개월 이상 전문 센터에서 재활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많은 환자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에 머물고 병동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고립감을 느끼는 게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호레이셔스 가든(Horatio’s Garden)은 좋은 사례가 된다. 올리비아 채플(Olivia Chapple)은 남편과 함께 아들 호레이셔스(Horatio)의 꿈을 이어 정원을 만들었다. 아들 호레이셔스는 10대 시절 척수손상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환자들이 병동에만 머물러 자연을 접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호레이셔스는 설문조사를 통해 환자들이 재활 공간보다 “병동과 대조되는 아름답고 휴식할 수 있는 정원”을 원한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호레이셔스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기부에 나섰고, 이 모금으로 그의 이름을 딴 첫 정원이 2012년에 완공되었다.
현재 9개 정원이 운영 중이며 2030년까지 영국 내 11개 모든 척수손상센터에 정원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각 정원은 2023 첼시 플라워쇼 수상자인 클리브 웨스트(Cleve West), 제임스 알렉산더 싱클레어(James Alexander Sinclair) 등 유명한 정원 디자이너들이 참여해 관심을 끌었다. 현재는 수석 가드너와 자원봉사자가 정원을 관리하고 있으며 후원을 통해서 운영에 도움을 얻고 있다.


접근성과 사용자 중심의 설계
호레이셔스 가든이 설계에 들어가기 전, 실제 환자, 환자와 가족, 병원 직원, 방문객 등을 두루 조사해 실질적으로 어떤 정원이 되면 좋겠는지 사용자의 의견을 듣는 절차가 있었다. 결과에 따라 조경을 디자인할 때 접근성을 가장 최우선으로 삼았다. 휠체어나 병상이 이동할 때 각진 모서리는 불편하다는 의견을 반영해 완만한 곡선형 동선을 설계했다.
또한 폭을 설계할 때도 당연히 사용자를 가장 먼저 고려했다. 병상이 움직일 수 있고 휠체어, 동반자가 보행하는 걸 감안해 최소 1.5m의 폭으로 설계했다. 바닥 자갈 역시 휠체어가 굴러가도 튀지 않도록 매끄럽게 처리하고 비가 와도 물이 잘 빠지고 흩어지지 않는 소재를 사용했으며, 미끄럼 방지가 가능한 포장재를 활용했다.
치매 환자를 위한 단순한 8자형 경로, 정원 곳곳에 상징적인 구조물이나 벤치, 조각상 등을 세워 길잡이 표식도 만들어 두어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했다. 포장재 질감을 바꾸거나 물소리가 나는 구역을 마련해 시각장애인 역시 청각적으로도 공간의 변화를 느끼고 감각할 수 있도록 활용했다. 더불어 환자와 가족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공간을 곳곳에 마련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몰입도 높은 감각적인 환경 조성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수목을 심어 다채로운 경관을 연출했다. 다소 차갑고 인공적인 병동의 이미지와 대조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정원에서의 몰입도를 높이도록 유도했다. 화단의 높낮이를 달리해 병상에 누워있어도 쉽게 식물을 볼 수 있게 한다거나 다층적이고 감각적으로 식재해 몇 달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정원을 질릴 틈 없이 경험하게 했다.
호레이셔스 가든은 정기적으로 임팩트 보고서를 발간하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환자의 95%가 일주일에 여러 번 정원을 이용하며, 모든 환자가 정원이 자기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고 응답했다. 95%는 자신의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데 정원이 도움이 됐다고 응답했으며, 방문객의 93%가 본인 역시도 정원을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답했을 정도로, 정원은 센터 안팎에서 치유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한 호레이셔스 가든은 단순한 조경 공간이 아니라 예술·공예·음악·원예 활동이 함께 이루어지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예컨대 수채화, 위빙, 목공 클래스가 열리는가 하면 병원 안팎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환자들에게 다양한 치유적 경험을 제공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나 부활절 행사 등 센터 안에 있으면서도 일상성을 회복하고 가족과 함께 추억을 만들 기회를 마련한다.
일반인도 일정 요금만 내면 가드닝 투어를 할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정원이 어떻게 치유적으로 기능하고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를 함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지역사회에도, 더 나아가 전체적인 시민의식에도 긍정적 영향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함께 심는 정원, 시카고 식물원(Chicago Botanic Garden)
1972년에 일반인에게 개방된 시카고 식물원(Chicago Botanic Garden)은 교육과 정원 발전에 힘써온 곳으로 유명하다. 156헥타르, 약 47만 평의 규모로, 28개 구역별 정원과 4곳의 자연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넓은 규모만큼 매년 100만 명 넘는 방문객이 이곳을 찾는다. 도시 농업 및 원예 분야 취업, 훈련, 교육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운영 중이고 지역 학교, 병원 등과 협력해 다양한 지역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인을 위한 아트 클래스, 가드닝 클래스, 자격증 프로그램을 준비해 그들이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거나 취미 차원에서 다양한 활동을 운영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가, 피트니스 클래스 등 건강을 챙길 수 있는 활동도 있으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과학, 가드닝, 직업 탐험 등의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식물이 어떻게 과학과 예술과 역사,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지 다양하게 학습할 수 있다. 교사에 특화된 전문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보다 의미 있는 질적인 과학 수업과 교수법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학생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레벨별 커리큘럼 또한 운영하고 있다.


위로하는 정원, 인에이블링 가든(Enabling Garden)
치유에 특화된 프로그램은 식물원의 인에이블링 가든(Enabling Garden)에서 대부분 진행된다. 이곳은 단순히 장애인 관람객을 대상으로 조성된 곳이 아니다. 심미적인 것도 고려하면서 접근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무장애 정원이라 보면 된다.
이곳 역시 높고 낮은 화단이 구성되어 있다. 화장실이 큰 편이며,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고, 주차장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기본적으로 접근이 무척 쉽다. 신체적·이동성 장애, 치매 또는 알츠하이머, 시각·청각·언어 및 기타 감각 장애가 있는 이들도 방문할 수 있고, 보조인이나 간병인도 동반할 수 있다.
전문 치유 원예 코디네이터가 이끄는 프로그램은 참가자의 필요에 맞게 세심하게 설계되었으며 일부 프로그램에 한해 외부 파트너 시설에서 진행되기도 한다. 테라리움 만들기, 허브 화분 정원 만들기, 다육식물 장식하기, 꽃꽂이, 압화 등의 활동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참가자들은 식물의 잎을 만지고 향을 맡으며 시각·청각·촉각을 깨운다. 이는 스트레스 감소와 정서적 안정으로 이어진다. 식물에 둘러싸여 있으면 안전하고 평온하다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한 프로그램 참여자는 인터뷰를 통해 “남편을 돌보는 책임감으로 지친 상태에서 가드닝 세션에 참여했는데 큰 위안이 되었고, 해방감을 안겨줬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퇴역 군인 프로그램 참여자 중 한 명은 군 복무 이후 민간인으로 생활을 전환하는 데 있어 본인의 직업적 개인적 성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치유의 경험은 1시간 남짓한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계속된다. 그 식물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거나 집에 가져가서 잘 자라도록 돌보는 과정은 치유의 감정을 지속시킨다. 프로그램 중에 대화를 권장하지만 강제하지는 않는다. 다행인 것은 식물이 사람과 사람 사이 연결을 끌어내고 대화 소재가 되며 자연스럽게 교류의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정원은 단순히 식물을 감상하는 공간을 넘어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사회적 인프라로 확장 중이다. 호레이셔스 가든의 사례는 환자와 가족이 병동의 한계를 넘어 자연과 만날 수 있는 물리적·정서적 통로가 됨을 보여주었고, 시카고 식물원의 인에이블링 가든은 모두에게 정원 경험을 개방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정원”이라는 원칙을 실현해 왔다. 두 사례의 맥락은 다르지만 정원이 사회적 약자와 지역 커뮤니티 모두를 포용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공유한다.
무엇보다 이 정원들은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프로그램과 활동을 결합해 일상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 있다. 호레이셔스 가든은 원예, 예술, 음악, 공예 활동을 통해 환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성취감을 끌어내며, 시카고 식물원은 치유 원예 프로그램을 통해 아동·노인·재향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식물과 교감하며 회복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외처럼 치유·교육·공동체를 결합한 정원 모델을 구축한다면, 정원이 일상적인 휴식 공간을 넘어 사회적 돌봄 인프라의 일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정원의 가치는 사람, 감각이 서로 연결되고 회복을 돕는 과정에서 나온다. 이러한 해외 사례는 정원이야말로 도시의 필수적인 공공 자원이며 시민 삶의 질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