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그야말로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 팬데믹이 일상 곳곳에 짙은 흔적을 남기면서, 우리가 몸담은 다양한 산업도 매일 파도를 타듯 과거와 미래를 오르내린다. 대중 가까이서 그들의 삶과 시간을 살피는 미디어 산업은 더더욱 그 흐름을 거부할 수 없는데, 그중에서도 애니메이션 산업의 변화는 분초를 다투며 첨예하게 일어난다.

지속가능했던 작업 방식에는 비대면 원칙이라는 장애물이 생겼고, OTT 플랫폼이 폭발적인 규모로 성장하면서 너도나도 독점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점점 높아지는 대중의 수준을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이 필요했으며 메타버스라는 가상현실의 등장까지 반겨야 하니, 이전과 같은 것을 찾기 힘들 정도다. 빠르고 복잡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파악하기 위해선 그 곁을 걷는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한 법. 현장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미국 라이카 스튜디오(Laika Studio)의 정희원 스토리보드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 작가, 정희원 © 정희원 작가 제공

먼저 작가님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스토리보드 작가라는 직업은 어떤 일을 하나요?

정희원 안녕하세요. 현재 라이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스토리보드 작가로 일하고 있는 정희원입니다. 많은 분이 제 직업에 대해 궁금해하시는데요. 스토리보드 작가란 대본이나 이야기의 시각화를 위해 러프하게 스케치 작업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한국에서는 콘티 작가라고도 불리더라고요.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 작가는 대본에 따라 한 장면이 어떤 샷으로 구성될지, 캐릭터가 어떤 액팅을 취할지, 카메라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 등을 스케치해요. 최종 영상의 청사진을 그리는 거죠.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에 가장 가까운 역할이네요. 작가님의 일터인 라이카 스튜디오의 소개도 듣고 싶어요.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 Tim Burton’s The Nightmare Before Christmas, 1993>으로 국내 대중에게 친근한 헨리 셀릭 감독과도 작업했다고요.

정희원 헨리 셀릭 감독의 <코렐라인: 비밀의 문 Coraline, 2009>은 가장 라이카다운 작품이라고 일컬어져요. 라이카 스튜디오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제작사라는 점이거든요. 아날로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스톱 모션 방식에 3D 기술을 결합하여 애니메이션을 만들죠. <코렐라인: 비밀의 문> 외에도 2020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은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Missing Link, 2019>가 대표작이에요.

 


스톱 모션(Stop Motion)은 정지된 모형이나 인형을 한 프레임마다 조금씩 움직이면서 카메라로 찍고, 그 샷을 전부 이어붙여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1898년 영화 <험티 덤티 서커스>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자연스러운 움직임 속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돋보여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만의 마니아층이 두껍다. 다만 스톱 모션은 엄청난 수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에 까다로운 제작 방식으로도 꼽히는데, 라이카 스튜디오는 3D 인쇄 기술을 도입하여 단점을 개선했다. 3D 프린터 덕분에 이전의 방식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미묘한 표정 연기나 감정 표현이 가능해졌으며, 제작자의 편리함도 높아졌다고. 라이카만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 효율까지 챙길 수 있는 영리한 작업 방식을 끝없이 고민한 결과다.


 

정희원 스토리보드 작가의 작업 예시 © 정희원 작가 제공
정희원 스토리보드 작가의 작업 예시 © 정희원 작가 제공

라이카 스튜디오의 작업 방식이 궁금해요. 한 편의 애니메이션은 어떤 단계를 거쳐 완성되나요?

정희원 애니메이션 제작 단계는 크게 프리-프로덕션과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의 과정으로 나뉘어요. 우선 정해진 각본에 따라 스토리보드를 제작하고 편집팀에서 애니메틱 형태로 제작하는 것까지가 프리-프로덕션이에요. 그 후에는 캐릭터와 세트, 음악 제작 및 성우 캐스팅뿐만 아니라 특수 효과와 사운드 편집, 후보정을 꼼꼼하게 진행하죠. 설명을 위해 간단히 말했지만, 이러한 과정을 전부 거치면 영화 한 편에 최소 3년의 세월이 흘러요(웃음). 하나의 작품을 위해 많은 사람의 애정과 노력이 담기는 거죠.

 

최소 3년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네요!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에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겼잖아요. 팬데믹으로 인해 기존 제작 방식도 변화를 거듭했을 것 같아요.

정희원 기존의 방식이었던 대면 근무가 금지되면서 비대면을 선호하게 되었어요. 인형을 움직이면서 카메라 팀과 함께 작업하는 스톱모션 팀을 제외하곤, 아직도 많은 직원이 재택근무로 일하고 있죠. 펜데믹을 기점으로 발생한 가장 큰 변화였어요. 제작뿐 아니라 마케팅 업무도 달라졌는데요. 모든 이벤트를 온라인으로 컨택하고 조율해요. 대면보다 훨씬 세밀한 진행이 요구되긴 하지만, 비대면 방식의 협업은 즉각적인 피드백과 아이디어 공유가 무척 수월해서 편하더라고요. 또 유통과 관련해서는, 극장 개봉이 어려우니 OTT 플랫폼 등 관객을 만날 다양한 통로를 찾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나 메시지도 이전과 달라졌나요?

정희원 누군가와 직접 만나 감정을 나누는 일이 어렵다 보니 당연한 가치들의 의미가 더욱 중요해진 것 같아요. 가족 간의 사랑이나 친구들의 우정, 지구촌의 협력처럼 사람이 모여 만드는 가치가 주목받는 거죠.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사람 사이에 쌓인 애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무기력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선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팬데믹. 그 안에서 대중은 보다 우리가 훨씬 강하다는 희망과 확신을 기다렸다. 그 때문일까? 믿음과 용기를 다룬 디즈니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Raya and the Last Dragon, 2020>과 <엔칸토: 마법의 세계 Encanto, 2021>, 가족의 사랑을 말한 소니 애니메이션의 <미셸 가족과 기계 전쟁 Mitchells vs the Machines, 2021>은 모두 팬데믹 시대에 개봉했지만, 대중의 큰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진 상황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변하지 않길 바라는 것을 떠올린 게 아닐까.


<미셸 가족과 기계 전쟁>의 경우,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작품인데도 꽤 주목을 받았어요. 애니메이션 업계의 변화를 논할 때 팬데믹뿐 아니라 OTT 플랫폼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된 거죠. 다양한 OTT 플랫폼 덕분에 이제는 극장이 아닌 집이 애니메이션의 주요 무대로도 여겨져요.

정희원 더는 극장 개봉이 필수가 아니라는 사실은 저에게도 아직 놀라워요(웃음). OTT 플랫폼이 극장보다 다양한 관객층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저는 영화관만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거든요. 오로지 영상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를 제공하니까요. 제가 속해있는 라이카 스튜디오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 때문에 라이카 스튜디오의 작품은 극장 개봉을 기본값으로 두고, 플랫폼에서의 추가 개봉은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진행해요. 이런 부분에서는 다른 스튜디오와의 차이점이 두드러지네요.

 


대부분의 미디어 제작사는 라이카 스튜디오와 사뭇 다른 방식으로 OTT 플랫폼 시대를 만끽한다. 미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선두를 이끄는 디즈니는 자사 플랫폼 Disney+를 선보였다. 국내에서는 미흡한 화질과 자막 서비스 때문에 성장세가 주춤하지만, 픽사와 마블 시리즈, 내셔널지오그래픽까지 챙긴 Disney+의 독점 콘텐츠는 그야말로 막강하다. 또한 미국의 메이저 영화 제작사 HBO도 자사 플랫폼인 HBO Max를 앞세워 디즈니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국내에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은 시트콤 프렌즈 Friends, 워너 브라더스의 고전 영화들과 카툰 네트워크 애니메이션 시리즈, DC 유니버스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까지 모두 독점 공개하는 HBO Max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7,000만 명의 구독자를 끌어모았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기존의 플랫폼들까지 떠올린다면, 유통과 소비의 새로운 방식은 이미 만연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Disney+나 HBO Max 등 많은 제작사들이 OTT 플랫폼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정해진 자리에서만 영화가 상영되던 때와 달리 제작사들이 앞다퉈 플랫폼을 만들고 직접 관객을 끌어오고 있죠. 누구나 볼 수 있었던 걸 누군가에게만 보여준다고 선언한 그 모습, 작가님은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정희원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당연한 듯 여겨지던 극장 개봉이 이제는 기본 옵션이 아니라는 뜻일 테고요. OTT 플랫폼에서의 수익만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이 가능해진 것도 저는 굉장히 새로웠는데요. 미국의 작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은 특정 OTT 플랫폼에서의 스트리밍만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아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극장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OTT 플랫폼 덕분에 풍요로운 기회의 땅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플랫폼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대중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신기술도 연거푸 등장하고 있죠. 그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메타버스라는 가상현실 플랫폼이고요. 미국의 애니메이션 업계는 메타버스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요?

정희원 VR 기술과 메타버스 세계관이 발전하면서 매력적인 디자인 프로그램들이 출시됐는데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VR 드로잉 툴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가상현실 안에서 직접 세계를 그리고 디자인할 수 있으며, 평면을 배경으로 그리면 3D 그림으로 자동 변환되는 프로그램이거든요. 약간의 수정만 거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어 무척 유용해요. 오큘러스의 Quill이나 구글의 Tilt Brush가 대표적이죠.

 


예술과 만난 메타버스는 애니메이션 산업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었다. 그 시작은 바로 VR 기기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페인팅 툴. 오큘러스와 구글에서는 각각 QuillTilt Brush를 공개하며, 예술의 영역을 메타버스까지 확장했다. 두 가지 툴 모두 모션 카메라가 부착된 VR 고글과 터치 컨트롤러를 착용한 채로 공중에서 움직이면, 손의 움직임이 인식되며 그림이 그려진다. 다양한 브러시와 컬러가 제공될 뿐만 아니라, 공간을 마음대로 확대하거나 축소하고 방향 회전도 가능하기 때문에 아티스트의 상상력이 제한 없이 펼쳐진다. 작은 도구로 온 세상이 캔버스가 된 것이다.


 

디자인 툴 외에도 앞으로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메타버스의 활용이 기대되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정희원 메타버스로 인한 변화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모습은 메타버스가 품고 있는 가능성 중 빙산의 일각일 테니까요. 미국에서 메타버스 산업이 가장 크게 발전한 게임 업계에서는 모션 캡처(Motion Capture)라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어요. 실시간 움직임의 렌더링이 가능하다는 장점 덕분에 몇 년 전부터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도입되었는데요.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봤을 때 제작 분야에서 모션 캡처 위주의 실시간 애니메이팅 기술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돼요. 메타버스 안에서 애니메이션을 선보일 수도 있겠죠.

 

직사각형 화면에서 벗어나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면 관객들은 보다 실감 나게 즐길 수 있겠네요. 메타버스라는 가상현실이 다양한 산업 곳곳에 빠르게 스며드는 현상을 작가님은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궁금해요.

정희원 메타버스라는 신기술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바라봐요. 결국 메타버스는 우리가 만드는 걸 보고 공감해줄 사람들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상을 뜻하니까요. 다만 모든 대중이 같은 취향을 가진 게 아니고, 여전히 아날로그의 감성을 원하는 소비자가 있죠. 또 스톱 모션처럼 가상의 공간이 아닌 대면으로만 가능한 기술도 많고요. 따라서 저는 온 세상이 통째로 메타버스로 옮겨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상현실을 다루는 기술이 빠르게 성장하는 만큼 언제나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맞아요. 성장의 속도가 빠르다고 안정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니까요.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순수 애니메이션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어요. 가상현실 플랫폼에서 펼쳐지는 애니메이션은 전통적인 제작 방식을 따른 순수 애니메이션과는 성질이 다르잖아요. 최근 10년간 대부분의 미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2D가 아닌 3D 또는 그 외 기술로 제작되기도 했고요.

정희원 한 프레임마다 그림을 그려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2D 애니메이션 시장은 미국에서 2000년대 초기 이후 급격히 수축했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2012년 디즈니의 <페이퍼맨 Paperman>, 2018년 소니 애니메이션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처럼 2D와 3D의 결합물은 큰 인기를 끌었죠. 그뿐만 아니라 저희 라이카 스튜디오도 아날로그 방식에 3D를 더해 꾸준히 작품을 만들고 있고요. 투박한 그림체와 흑백 컬러, 또는 무성 영화더라도 소비자의 니즈는 여전한 거예요. 제작자는 대중의 니즈에 기꺼이 따르는 직업이기 때문에, 순수 애니메이션을 찾는 소비자만 있다면 어떤 변화가 밀려와도 장르가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산업의 선두에 위치하진 않더라도 다른 분야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좋은 작품들이 탄생할 거라고 믿어요.

 


거대한 바다는 크고 작은 강줄기가 모여 이뤄지는 것처럼, 산업은 하나의 흐름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중의 선호에 따라 물줄기의 크고 작음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꾸준한 관심이 있다면 강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융합하며 더 나은 모습을 만들기도 한다. 최근 국내에서는 애니메이션 산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융합이 주목을 받았다.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을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내거나, 배우가 등장하던 뮤직비디오에 컬러풀한 캐릭터를 등장시킨 것이다. 그들의 예상치 못한 만남은 기대 이상의 시너지를 보여주며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애니메이션 산업과 게임이 만났다. 바로 라이엇 게임즈의 리그 오브 레전드 League of Legends 애니메이션 <아케인 Arcane, 2021>이다.


산업 간의 융합과 관련해서,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 <아케인>이 떠올라요. 게임 속 세계관을 각색한 스토리에 실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크게 주목받았죠. 리그 오브 레전드를 잘 모르는 저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무척 재미있었어요.

정희원 미국에서도 <아케인>이 게임과 애니메이션 산업의 콜라보이자 탄탄한 스토리로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해당 작품은 무려 6년 이상의 긴 제작 기간이 소요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미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증거겠죠. 산업과 산업을 연결해서 신선한 제작물을 선보이고 단순한 흥미 이상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거든요.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신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정체되지 않은 스타일로 시각적, 기술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미디어 제작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해요.

 

대중의 눈이 높아질수록 현장에서 필요한 제작자의 능력도 달라지겠죠? 작가님은 미디어를 제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정희원 저는 변화를 제때 받아들이는 힘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같은 프로그램도 매년 기능이 추가되고, 매일 새로운 기술과 작업 방식이 탄생하죠. 변화에 맞추어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찾고, 새로움에 기꺼이 순응하는 제작자는 언제나 환영받을 거예요. 엔터테인먼트 분야는 언제나 대중의 시선에 따라 급변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소비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보고 듣고, 또 제작하며 공부하는 건 필수 덕목이겠죠? (웃음)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갖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애니메이션 산업의 많은 변화를 이야기했는데, 그 가운데서 라이카 스튜디오는 앞으로 대중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요.

정희원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캐릭터나 화려한 영상미도 물론 좋지만, 스톱 모션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만의 색깔이 있는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 제작되는 스톱모션의 색을 유지한 채로 모션 캡처나 VR, 3D 기술의 장점을 흡수하려고 합니다. 어떠한 이름 하나로 정의되거나,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시각 미디어가 아닌 새로운 스타일을 앞으로도 보여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질문이에요. 작가님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나요?

정희원 세상은 언제나 우리의 속도보다 빠르게 흘러가잖아요. 바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간직하고 싶은 장면이나 소중한 의미, 깊은 감정들을 잠시 음미하는 행위가 삶을 지지해 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 순간들을 한 번 더 만끽할 기회를 관객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상기시킬 수 있다면 더욱더 기쁘고요. 앞으로 라이카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정희원의 작품을 많은 기대와 애정으로 지켜봐 주시길 바랄게요.

라이카 스튜디오(Laika Studio)의 <Helicopter Mom> © 정희원 작가 제공

제작자는 소비자의 니즈에 기꺼이 따른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정희원 작가의 말은 애니메이션 산업의 현장에서 변화를 마주한 이들의 결연한 의지처럼 느껴졌다. 애니메이션 산업은 새롭게 일렁이는 물결 앞에서 주저한 적이 없다. 상상을 눈에 보이는 현실로 만들기 위해 탄생했던 짧은 영상은 흑백의 무성 영화를 거쳐 환상적인 월트 디즈니의 세상과 만났고, 영사기가 아닌 TV의 등장으로 더욱더 풍성한 이야기가 제작되었다.

 

더 나아가 독자적인 제작 방식을 3D 기술과 접목한 작품들 덕에 양적 성장까지 이룬 애니메이션 산업은 또 한 번의 발돋움을 준비한다. 변화를 기꺼이 수용하고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경계를 넓혀가고 있다. 쉽게 정의되거나 이전의 개념을 반복하지 않을, 마침내 애니메이션 산업이 보여줄 무한한 가능성의 신대륙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