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화가, 얼굴 없는 예술가, 게릴라 아티스트, 아트 테러리스트…. 이름 앞뒤로 다양한 수식어가 뒤따르는 예술가가 있다. 바로 뱅크시(Banksy)다. 최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현대미술관(GoMA)에서 열린 뱅크시 개인전 《컷 앤 런(CUT & RUN)》 (2023.6.15.~8.28.)에는 10주 동안 18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15분 단위로 입장객을 받은 이번 전시는 관람객이 많이 몰리는 탓에 금요일과 토요일엔 새벽 5시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그 덕에 주변 호텔 및 숙박업소들의 요금이 급격히 치솟았음에도 전시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 14년 만에 열린 뱅크시의 공식 개인전이었던 만큼 많은 인파가 몰리는 등 반응이 뜨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뱅크시는 공식 개인전의 전시 장소로 글래스고 현대미술관을 선택한 데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 작품인 웰링턴 공작의 동상이 전시장 바로 앞에 심벌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동상은 글래스고의 상징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로, 동상의 머리에 주황색 트래픽 콘이 얹어져 있다. 술 취한 대학생이 장난삼아 씌운 콘이 상징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덧 도시의 작은 랜드마크가 되어 어두운 날에도 글래스고 현대미술관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뱅크시는 “시의회와 경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상은 지난 40년 동안 계속 교통 콘을 머리에 달고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권위에 대한 비판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삼는 뱅크시가 이곳을 전시 장소로 택한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번에 진행된 전시 《컷 앤 런》은 뱅크시가 작품을 제작해 온 과정을 비하인드 스토리로 보여주며, 원본 스케치 및 스텐실 작품도 전시했다. 또한 뱅크시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사건이 된 소더비 경매에서의 뒷이야기도 공개했다. 2018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자신의 그림을 분쇄하며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던 이 사건의 과정을 설명하는 모형도 전시되었다.
얼굴 없는 뱅크시
뱅크시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길거리에 그래피티를 그리는 행위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알려지면 예술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점이 그가 익명성을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럼에도 뱅크시에 대해 이미 알려진 몇 가지 사실이 있다. 뱅크시는 1974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백인 남성이며, 본명은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라고 한다. 이메일로만 소통해 오던 뱅크시가 딱 한 번 『가디언』과 대면으로 인터뷰했을 때 알려진 사실이다. 뱅크시는 코로나 시기에 자기 집 화장실에 그려진 그림을 올리면서 “아내는 내가 재택근무 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덧붙였는데, 그 메시지 덕에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지기도 했다.
뱅크시는 10대 중후반인 1990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주변인들의 도움 때문이기도 하다. 인터뷰하려고 접근하면 공통적으로 “뱅크시가 이 요청을 승인했나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 덕인지 그들의 팬들마저도 그가 누구인지 알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뱅크시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모르는 게 더 재미있고 유익하죠.
– 로빈 바턴, 아트 딜러
이제는 뱅크시의 정체가 밝혀지더라도 그가 재물손괴죄로 잡혀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 뱅크시가 그림을 그린다면 복권에 당첨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미스터리한 정체성은 뱅크시의 예술세계를 구성하는 한 축인 만큼, 이제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인정되는 분위기다.
뱅크시의 그림은 그래피티가 아니다?
뱅크시의 그림을 그래피티(Graffiti)라고 규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래피티는 아니다. 먼저 그래피티는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파생된 말로,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벽에 낙서처럼 그린 그림을 뜻한다. 벽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고대의 동굴벽화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필라델피아 지역에는 콘브레드(Cornbread)와 쿨 얼(Cool Earl)이라는 서명을 남긴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활동했고, 뉴욕 브롱크스 지역에서도 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등장했다.
그래피티에는 이 장르를 규정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먼저 그래피티에서 태그(tag)는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선택한 이름을 뜻한다.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가 SAMO라는 태그를 남긴 것이 대표적이다. 다음으로 스로우 업(throw up)은 두 가지 색을 이용해 윤곽선을 그리고 내부를 채운 글자를 말한다. 그 뒤에는 두 가지 색으로 쓴 풀 네임인 더브(dub)가 나온다. 다음으로는 배경 위에 정교하게 쓴 이름인 피스(peice)가 등장한다. 와일드 스타일(wild style)은 다른 그래피티 아티스트를 공격하는 경쟁적인 서체 형식으로, 글자를 퍼즐처럼 엮은 형태다.
이러한 그래피티의 요소들을 고려했을 때 뱅크시의 그림을 그래피티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래피티보다는 스텐실에 가깝다. 스텐실은 투명 필름지 같은 곳에 도안을 그리고 모양대로 오려낸 후, 종이나 벽 등 자신이 원하는 곳에 필름을 댄 뒤 오려낸 자리에 물감을 두드려 바르는 기법이다. 도안만 있으면 초보자도 쉽게 채색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시간이 덜 걸린다는 장점이 있다.
뱅크시는 자신이 그래피티를 포기하고 스텐실 방식을 도입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10대 시절 스프레이 캔으로 그래피티를 그리던 중 경찰이 들이닥쳤는데, 다른 친구들은 다 마치고 도망쳤으나 자신만 손이 느려서 멀리 가지 못했다고 한다. 기차 바퀴 아래에서 6시간 엎드려 숨어있는데 그때 벽에 있던 다른 사람의 스텐실 작업이 눈에 띄었고, 자신도 그 방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는 2002년 『옵저버(Observer)』와의 인터뷰에서 “빠르고 깨끗하고 선명하고 효율적이며, 꽤 섹시했다”라고 덧붙인 적이 있다.
어렸을 땐 힙합에 빠져 살면서 뉴욕 스타일로 그래피티를 시도했지만 잘 그리지 못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그래피티의 요소들을 도입하지 않는 탓에 그래피티 아티스트 사이에서는 뱅크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지만, 뱅크시는 스텐실의 방식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등극했다.
스텐실의 정치적인 의미도 좋아. 모든 그래피티는 단순한 수준의 저항이지만 스텐실에는 특별한 역사가 있지. 그건 혁명을 시작하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 쓰였으니까.
– 뱅크시
보이지 않아 더 선명한 목소리
뱅크시의 작품은 정부, 권력, 경찰, 권위 등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는 내용이 많다. 그의 작품에서 권력의 이미지는 경찰, 왕실근위대, 여왕 등으로 표현되고, 이들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비판을 가한다. 이처럼 뱅크시는 법과 질서, 정의의 이면을 들춰내기 위해 풍자의 방식을 사용한다. 제도권에 대한 비판의식은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전쟁에도 주목하게 만든다. 뱅크시의 작업에서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옹호하는 메시지들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의 작품 속 시위대는 화염병이 아닌 꽃을 투척한다. 이 같은 이미지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일어난 미국의 학생운동에서 비폭력 저항의 의미로 사용했던 플라워 파워(Flower Power)를 연상시킨다. 반전과 평화를 희망하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누군가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경찰이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더 좋아 보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거리의 테러리스트’가 된다.
– 뱅크시
뱅크시가 비판하고 있는 제도권은 예술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그의 미술관 테러 행위는 소수의 관계자에 의해 행해지는 권위주의적인 미술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그는 2005년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 들어가 몰래 자기 작품을 걸어두고 나오는 퍼포먼스를 행했다. 브루클린 미술관에는 <스프레이 페인트 통을 들고 있는 남자>를 걸어두었는데, 금방 발견되지 않아서 12일 동안 전시되기도 했다. 뉴욕 자연사박물관에는 미사일과 폭탄으로 중무장한 <딱정벌레>를 걸어두었는데, 마찬가지로 12일 정도 놓여 있었다. 물론 몰래 걸어둔 작품이 거의 즉시 발견돼 폐기된 경우도 있었다.
미술시장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지속해 오던 뱅크시는 2018년 10월 소더비 경매에서 104만 파운드(약 15억 4천만 원)에 낙찰된 자신의 작품을 파쇄기로 분쇄해 버리는 파격적인 일을 벌였다.그는 액자 속에 파쇄기를 숨겨 놓은 채, 작품이 낙찰되는 순간 리모컨으로 파쇄기를 작동시켰다. 파쇄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인지 작품 절반은 남았지만, 왠지 절반만 훼손시킨 것조차 그의 의도가 담긴 게 아닌가 싶다. 뱅크시는 이 망가진 작품에 <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n the Bin)>라는 제목을 새로 붙이고 진품 인증서도 발행했다.
우리가 보는 미술 작품은 단지 선택된 소수 화가들의 작품일 뿐이다. 소수의 사람이 전시를 기획, 홍보하고 작품을 구입해 전시하면서 미술 작품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 뱅크시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도 뱅크시가 자주 다루는 주제 중 하나다. 뱅크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부작용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작품으로 만들어왔다. 그는 물건이 담긴 마트의 카트와 함께 추락하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무제> 작품을 통해 물질의 노예가 된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뱅크시는 이러한 물신주의가 기업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브랜드 게스(GUESS)가 런던 매장에 뱅크시의 <분노, 꽃을 던지는 사람>을 무단으로 게재한 사건이 일어났다. 뱅크시는 매장에 가서 똑같이 옷을 훔쳐도 되겠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브랜드 측이 뱅크시가 브랜달리즘(Brandalism)을 주제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브랜달리즘은 브랜드(Brand)와 반달리즘(Vandalism)을 합쳐 만든 뱅크시의 용어로, 기업의 광고나 브랜드를 공격하는 작업을 뜻한다. 뱅크시는 공공장소에 보이는 광고물들은 우리가 보고 싶든 보고 싶지 않든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광고들을 마음대로 바꾸고 재사용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브랜달리즘을 허가받아야 한다는 건, 마치 돌을 던진 사람에게 이 돌을 가져가도 되는지 물어보는 것과 같다는 게 뱅크시의 주장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술계의 권위와 작품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뱅크시 또한 자기 작품이 비싸게 팔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남긴 벽화를 뜯어 경매에 부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유명 연예인들이 앞다퉈 그의 작품을 구매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뱅크시는 일관된 태도를 취하면서 자기 작품 이미지를 고화질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자신의 작품을 거래하는 컬렉터들에게 바보들이라며 일침을 가한다. 작품이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은 작가의 의지가 개입된 일은 아닌 만큼, 그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상황은 아닌 듯하다.
뱅크시는 미술비평가들에게도 거의 인정받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의 작품이 쉽게 이해된다는 측면이 한몫했을 것이란 평이 많다. 현대미술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가치를 부여받는 것도 중요한데, 작품이 일차원적으로 해석된다면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뱅크시는 거리예술을 통해 정치·경제·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풍자하면서 시각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대중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현상 이면의 것들을 들춰내면서 이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낸다는 것이 그 어떤 현대미술 작품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다.
그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그저 재치 발랄한 장난이 아닌, 하나의 호소처럼 보인다. 특히 전쟁 반대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는 그가 그만큼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뱅크시는 최근 러시아의 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우크라이나의 보로디안카 지역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림이었다. 체구가 작은 소년이 거구의 남성을 업어치기 하는 이 벽화는 유도 애호가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한 것으로 보인다.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볼 것을 권한다. 더 많은 사람이 소통하면서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기를 유도하는 그의 작품은 비판하며 더 많은 것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