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그야말로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변화라는 숙제를 안겨 주었다. 대인 관계, 삶의 방식 같은 사적 범위에서부터 소비와 공급 방식, 브랜딩과 마케팅 같은 공적 범위까지. 변화의 물결에 몸을 맡기지 못하면 금세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여러 패션 브랜드도 그 거친 물살에 몸을 띄웠다. 흔히 ‘패션쇼’라고 하면 대중들이 곧바로 떠올리는 이미지와 감각이 있다. 빼곡히 앉아 있는 관객들,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그 사이로 이어지는 모델들의 캣워크가 바로 그 예다.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는 모델과 뛰어다니는 현장 스태프들, 몸속까지 쿵쿵 울릴 정도로 강렬한 비트의 음악은 현장감에서 비롯된 패션쇼의 생기와 같았다. 동시에 그 현장감은 패션쇼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런웨이가 뒤집어졌다. 비대면이 코로나 시대의 대원칙이 되면서부터 쇼의 현장감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레 패션쇼를 취소하게 된 지난해에는 허겁지겁 준비한 라이브 방송이나 녹화 영상으로 컬렉션을 공개하거나 아예 시즌 자체를 포기한 브랜드도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길어지는 팬데믹 상황을 기꺼이 수용한 기업은 관객들을 스마트폰과 모니터 앞에 앉혔다. 온라인으로 만나는 매력적인 영상과 화려한 스케일의 패션쇼에서는 브랜딩의 새로운 미래까지 엿볼 수 있었다.

거침없는 시도와 발상이 돋보이는 해외 브랜드

이름만으로도 역사와 가치가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의 해외 브랜드들은 기대 이상의 무대를 선보였다. 루이비통(Louis Vuitton)은 2021 F/W 런웨이를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행했다. 미켈란젤로 갤러리로 들어서는 모델의 뒷모습과 함께 쇼가 시작되자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음악이 흐른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부터 오늘날의 다프트 펑크까지, 시대적 거리감을 넘나드는 쇼의 구성 요소들은 어색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롭다. 다프트 펑크의 음악과 함께 현장감을 재현한 듯 작게 들려오는 환호 소리가 감각을 일깨운다. 루이비통은 새로운 시도 속에서도 과거 오프라인 패션쇼의 주요 요소들을 군데군데 녹여내 완전히 낯설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갔다. 온라인 쇼와 오프라인 쇼의 경계, 그 어딘가 즈음을 절묘하게 포착한 덕에 어렵지 않게 쇼에 몰입할 수 있었다. 들어서는 순간 눈을 뗄 수 없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보다 더 시선이 가는 온라인 쇼를 만들어 낸 루이비통의 발상이 무척 돋보였다.

미우미우(Miu Miu)는 2021 F/W 컬렉션에서 감히 상상도 못할 장소를 런웨이로 탈바꿈시켰다. 해발 2743m의 알프스 스키 휴양지인 코르티나담페초가 그 주인공. 눈으로 뒤덮인 산맥이 얼핏 드러나는 강렬한 순간부터 쇼는 시작된다. 하얀 눈밭 위에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모델들과 감각적인 음악을 따라가다 보면 현장감이라는 틀이 과감히 부서지고 압도적 스케일의 쇼만 남는다.

 

아름다운 설산과 눈밭에서 빛을 발하는 미우미우의 컬렉션은 조화로운 영상미를 만들어 냈고, 관객들로 하여금 경이로운 광경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한 높이의 설산에서 쇼를 진행한다는 것에서부터 미우미우의 거침없는 행보가 느껴진다. 변화의 흐름에도 오프라인 피지컬 쇼만을 고수하며 버티는 여타 브랜드와 달리, 미우미우는 브랜드를 대중에게 완벽하게 각인시키며 팬데믹 이후의 모습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비대면 디지털쇼로 성공적인 브랜딩을 보여 준 2021 서울패션위크도 주목할 만하다. 서울시 주최 아래 매년 오프라인으로 개최했던 서울패션위크는 올해 처음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올해 서울패션위크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을 런웨이 무대로 활용했을 뿐 아니라 이승택, 양혜규 등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등의 유물도 등장시켰다. 판소리나 한국무용 같은 한국 고유의 문화는 패션과 결합하여 아름다운 쇼로 재탄생했다. 대중에게 익숙한 마포 문화 비축기지나 한강과 같은 장소들도 패션과 결합하며 시선을 끄는 무대로 탈바꿈했다.

 

참신한 시도 덕인지 온라인으로 공개된 런웨이 영상은 한 달여 만에 조회 수 470만 건을 넘어서며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런웨이 콘텐츠는 서울패션위크 홈페이지와 유튜브, 네이버 TV로 공개됐는데, 유튜브의 관람자 수는 무려 22만 8000여 명에 달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중 절반이 넘는 57.4%가 미국과 일본,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서 유입된 관람객이라는 사실이었다. 한국 문화가 해외 여러 국가에서 주목을 받는 요즘, 서울패션위크의 시도는 패션 산업뿐 아니라 한국과 서울의 브랜드 가치까지 높였다고 평가받았다.

팬데믹에도 끄떡없는 브랜딩은 무엇일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전환한 뒤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쇼를 만들어 냈던 앞선 사례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패션 업계가 어떤 브랜딩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관객들을 매혹하는 성공적인 브랜딩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틀을 깰 필요가 있다. 앞서 소개한 쇼들이 과감히 부순 첫 번째 틀은 고정된 공간이다. 주목받은 패션 브랜드들은 모두 참신한 장소를 런웨이로 활용했다. 앞서 예를 든 루이비통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미우미우의 알프스산맥 외에도 디올은 베르사유 궁전 위에 모델들을 세웠다. 브랜드들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긴 세계적 명소를 런웨이 장소로 활용하여 관객들의 갈증을 해소할 뿐 아니라 쇼의 품격을 높였다.

두 번째 틀은 고정된 경계이다. 패션 업계는 특정 유명인의 이름이 붙은 좌석이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는 쇼를 만들기 위해 영상 매체를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패션과 기술 간의 경계가 열리며 새로운 융합이 발생했다. 그 예로 버버리(Burberry)와 게임 방송을 라이브로 스트리밍 하는 애플리케이션 트위치(Twitch)의 콜라보가 있다. 손을 맞잡을 거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두 브랜드였으나 버버리는 기꺼이 트위치의 손을 잡고 컬렉션 무대를 선보였다. 그 결과 대중들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새로운 형식의 쇼가 탄생했다. 어쭙잖은 변화로는 관객들의 기대에 부흥할 수 없다. 견고한 틀을 깨는 완벽한 혁신만이 브랜드를 각인의 길로 이끈다.

 

이와 동시에 온라인 쇼는 현장감을 대신할 탄탄한 영상미도 갖춰야 한다. 단순히 홍보를 위한 패션 화보나 필름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쇼 다운 스케일이 필요하다. 이는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컬렉션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것이 우선인 과거와 달리, 이제는 보는 재미가 있는 공간을 섭외하는 일부터 지루하지 않은 카메라 스냅, 공간과 패션의 조화라는 과제가 덧붙었다. 관계자들의 체크리스트 항목이 늘어난 만큼 콘텐츠의 질은 더 높아졌다. 코로나-19를 핑계로 낮은 퀄리티를 변명하기보다는 한 차원 더 높은 지점에서 제품만큼 값어치 있는 퀄리티로 패션 업계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해소해야 한다.

 

패션 브랜드 발렌티노(Valentino)는 밀라노를 대표하는 극장 피콜로 테아트로를 런웨이로 만들고 교향악단의 연주를 배경 삼아 쇼를 진행했다. 극장들의 문이 다시 열리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고급스럽고 풍요로운 쇼를 구성했다고 한다. 부족함 없는 영상미에 브랜드의 가치관과 시대적 상황의 감정까지 빠뜨리지 않고 넣었으니, 그들의 쇼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 2021 F/W 서울패션위크 Ⓒ 파이낸셜뉴스
사실 패션쇼의 변화를 무한한 긍정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도 거대한 상징이었던 오프라인의 피지컬 쇼가 무산되고, 몇 번이고 녹화 가능한 카메라로 담은 컬렉션은 많은 관객들에게 낯설고 어색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기대했던 것만큼 콘텐츠의 퀄리티가 높지 못할 때면 대중은 금세 과거의 상징적인 쇼를 떠올리며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션 브랜드들은 한정된 좌석과 제한된 쇼의 장벽을 거침없이 무너뜨렸다. 불가피하게 초대받지 못한 관객이 생겨났던 오프라인 쇼 대신 모두를 공평하게 무대 1열로 앉힐 수 있는 온라인을 택한 것이다. 기약 없이 길어지는 팬데믹 상황 속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과감하고 똑똑한 결정이었다.
끊임없는 우려 속에서도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대중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매력적인 콘텐츠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세찬 변화의 흐름을 지나고 있는 바로 지금이 브랜드에게는 오히려 황금 같은 기회이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든 막이 오를 쇼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