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폐의 모습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형상화한 작품이 있다. 세계적인 무대 디자이너 에즈 데블린(Es Devlin, 1971~)의 <우리의 숲(Forest of Us)>이다. 2021년 4월 미국 마이애미에 개관한 대규모 인터랙티브 아트 전시장인 슈퍼블루 마이애미(Superblue Miami)는 개관전 《모든 벽은 문이다(Every Wall Is a Door》에서 팀랩(TeamLab),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그리고 에즈 데블린의 미디어아트를 선보였다. 이 중 데블린의 설치 작품인 <우리의 숲>은 인간의 폐를 연상시키는 구조물에 숲의 이미지를 담아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의 장기에서 영감을 얻은 데블린의 조형물은 2016년 명품 브랜드 샤넬(Channel)과 협업한 《다섯 번째 감각(The Fifth Sense)》 전시에서 먼저 등장했다. 그의 <거울 미로(Mirror Maze)> 작품은 분당 5만 개의 결정을 내리는 전두엽의 모습을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미로로 은유한 것으로, 관람객들은 반사된 이미지 사이를 거닐면서 우리가 전두엽을 통해 후각을 인지하는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이를 통해 향수를 처음 맡았을 때의 추억 속으로 관객을 빠져들게 만든다.

에즈 데블린, <우리의 숲(Forest of Us)>, 2021, 설치 전경. © 에즈 데블린
에즈 데블린, <거울 미로(Mirror Maze)>, 2016, 설치 전경. © 에즈 데블린

에즈 데블린은 대규모 설치미술과 무대 디자인을 통해 예술계에서 명성을 쌓아온 미술감독으로,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과 2016년 리우 올림픽 개막식의 총괄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비욘세, 카니예 웨스트, 아델, 위켄드 같은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무대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연극 무대 디자인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 <파르지팔(Parsifal)>, <맥베스(Macbeth)> 같은 오페라 무대를 디자인했으며, 최근에는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인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에 소개되기도 했다.

 

에즈 데블린은 다른 디자이너들이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전개해나간다. 그는 고정된 형태의 공간에 숨결이 느껴지도록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연극 무대를 디자인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연극 무대가 너무나도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으로 보였다고 회고한다. 에즈 에블린은 기존의 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 비를 뿌려 무대의 ‘막’을 나누거나, 거울을 이용해 무대를 반으로 가르고, 거대한 구조물을 무대 한가운데 설치하는 방식을 선보인다.

 

에즈 데블린은 관객들에게 메시지가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 조형물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에 대해 “가장 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을 찾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시적이라는 말은 노래 가사처럼 가장 압축된 형태의 언어를 뜻한다. 예를 들어 비욘세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그의 음악의 가사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이를 무대 조형물로 형상화한다. “Formation”이라는 가사를 표현하기 위해 화면을 반으로 쪼개고 가수의 얼굴을 영상화하는 식이다. 2016년 비욘세의 월드 투어 무대에 등장한 18m 높이의 회전하는 조형물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무대는 스타 그 자체가 되고 관객의 경험은 조형된다.

무대 디자인은 공간을 창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정서를 불러일으켜 예술 작품의 의미를 배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예술적 줄거리를 이해하고 은유적 표현 수단을 활용해 아티스트의 삶과 예술세계를 담아내는 그릇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에즈 데블린의 작업은 아티스트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더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겉으로 보기엔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설치물이 주를 이루는 듯하지만, 관객이 아티스트의 심리적 감정을 공유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된다.

 

가치를 담아내는 그의 디자인은 비단 무대라는 공간에만 그치지 않는다. 2020 두바이 국제 엑스포에서 선보인 영국 전시관 포임 파빌리온(Poem Pavilion)을 보자. 목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원뿔형 구조물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디지털 합성 이미지처럼 보인다. 이 파빌리온은 20m 높이로, 전시장 입구는 원뿔 기둥 바닥 면 아래에 있고 전시장 내부로 들어갈수록 면적이 좁아지는 구조다. 눈에 띄는 점은 외관에 장식된 LED 조명인데, 이 조명은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아 우주로의 메시지(Message to Space)라고 이름 붙였다. 관람객은 입장할 때 특정 단어를 말하도록 요청받고 인공지능(AI)은 이 단어들을 조합해 시(詩)를 만들어 건물 외관에 조명으로 표현한다. 영국이 인공지능과 우주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지금까지 에즈 데블린은 다른 아티스트의 완성된 결과물에 무대라는 요소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작업해왔지만, 최근에는 제작 단계를 앞당겨 작품 자체에 개입하기도 한다. 캐나다의 유명 싱어송라이터인 위켄드(The Weeknd)가 그의 앨범이 완성되기 훨씬 전 데블린에게 조형물을 의뢰한 것이 그 예다. 또 미디어아트 조형물을 만드는 등 자신만의 작업을 하거나, 직접 연극 시나리오를 쓰는 등 독자적인 작업 또한 넓혀나가는 중이다.

에즈 데블린의 디자인이 특별한 이유는 화려해 보이는 조형물 이면에 정신적 측면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티스트들이 지니고 있는 은유적인 표현을 이해하면서 철학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다. 인간의 정서는 논리적, 추론적 사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데, 그렇기에 시각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공간 디자인을 통해 예술로서의 상징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즈 데블린은 시각적인 은유를 통해 관객들에게 해석이라는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그 해석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되면서 가치를 전달한다. 그의 디자인은 관객이 그 공간에서 얻고자 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아티스트의 작품을 관객들과 호흡하는 예술로 다루면서 창조적이고 무한한 공간연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디자인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의 경험을 직조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