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종이책이 들고 나선 세 개의 창”

 

옷을 팔아도, 음식을 팔아도, 기계를 팔아도! 제아무리 뛰어난 제품력의 상품이라도 오프라인 매장에 덜렁 놓는 것만으로 잘 팔리는 시대는 끝났다. 사람들의 일상을 촘촘히 파고든 인터넷 연결선, 그 선을 따라 제품과 브랜드를 직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판매 관문인 뉴미디어 시대가 뒤를 이었다.

 

스마트 디바이스의 폭발적인 증가와 멀티미디어형 콘텐츠의 지배라는 시대적 흐름 앞에서는 아날로그의 정수인 종이책도 별수 없었다. 물론 변화하는 소비자 니즈에 맞춰 전에 없던 콘셉트의 서점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아 사라진 출판사와 서점의 수를 넘지는 못했다.

 

“출판계는 뉴미디어가 정보를 담는 그릇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책의 정의를 다시하여 확장을 꿈꾼다.”

– 주일우, 이음출판사 대표

 

독서율, 도서관 이용률, 출판 유통업 매출. 셋 중 무엇도 상승세가 없는 현실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옥스퍼드 핸드북’ 프로젝트를 주도한 마이클 바스카Michael Bhaskar는 디지털 시대를 직면한 출판업을 구시대적 산업이라 칭했다. 듣다 보면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책의 꼴이다. 하지만 이음출판사 주일우 대표의 인터뷰를 읽은 순간, 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책은 영양 가득한 맛있는 음식이다. 책이라는 음식을 담아낼 그릇으로 활용해야 할 대상이 온라인과 뉴미디어 플랫폼인 것이다.

 

A. bookstagram <Insta Novels> .

B. book podcast <빨간책방>과 <책읽아웃>

C. book trailer <책 끝을 접다>

A. bookstagram <Insta Novels> 

Instagram : @nypl

책 읽으라는 광고는 십중팔구 지루하다. 하지만 형태 자체를 SNS의 플랫폼 특성에 맞춰 바꾼 책이라면? 한 번쯤 첫 페이지를 넘겨볼 만하다. 어차피 책장이라야 손가락으로 아이콘을 누르면 끝이기 때문이다. 뉴욕공립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은 대중들, 특히 게임과 SNS 같은 모바일 콘텐츠의 시간 점유율이 월등히 높은 젊은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문학 작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인스타 노블Insta Novels을 선보였다. 15초 내외의 일상을 사진과 동영상, 이모지 등으로 공유하는 인스타그램의 스토리 기능을 그릇 삼아 텍스트와 그래픽으로 소설과 시를 담아낸 혁신적인 프로젝트다.

 

뉴욕공립도서관의 인스타그램 계정(@nypl)을 들어가 보면 하이라이트로 등록된 5개의 스토리가 올라와 있다. 튜토리얼부터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2부,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노란 벽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갈가마귀’를 10~80여 장 분량으로 볼 수 있다. 고전 소설과 시를 간결한 레이아웃으로 화면에 배치하고, 유명 아티스트의 그래픽에 사운드까지 곁들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전자책 중 하나겠지만, 대표적인 이북 리더인 킨들Kindle에 비해 몰입하기 좋은 데다 훨씬 간단명료하게 읽을 수 있다.

 

SNS은 대개 누가 어떤 책을 언제 냈는지를 광고하는 플랫폼이었다. 유저에게 주어지는 콘텐츠는 책의 ‘홍보’ 뿐이다. 하지만 인스타 노블은 같은 시간을 들여 ‘홍보’ 대신 ‘진짜 책’을 즐길 수 있다. 게다가 가공된 요약본도 아니다. SNS로 읽는 행위가 부담되거나 피로하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작품 선정, 아름다운 그래픽, 몰입도를 높이는 음향효과, 간편한 인터페이스는 책이 고루함에서 탈피하도록 만들었다. 소비자 행동 수집뿐 아니라 책의 공유와 확산도 수월해졌다. 인스타그램이라는 제본기로 영리하게 찍어낸 멋진 책 아닌가.

B. book podcast <빨간책방>과 <책읽아웃> 

이동진의 빨간책방 : http://www.podbbang.com/ch/3709

책읽아웃 : http://www.podbbang.com/ch/15135

글자를 따라 읽어내리며 계속 움직여야 할 눈, 책을 들고 있어야 할 한 손, 페이지를 넘길 다른 손, 문장을 씹어 소화할 두뇌. 독서에 필요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북 팟캐스트를 들을 때 필요한 것을 생각해보자.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을 귀, 이야기를 듣고 소화할 두뇌면 끝이다. 게다가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다른 할 일을 할 수도 있다. 시간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독서지만 북 팟캐트스트라면 조금 편안하게, 하지만 알차게 책을 소비할 수 있다. 무엇보다 라디오와 달리 24시간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들을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6년 차 장수 북 팟캐스트인 <이동진의 빨간책방>은 분야 1위에서 내려올 기색이 없다. 책의 위기를 인식한 위즈덤하우스 출판사가 멍석을 깔았지만, 출판사에 상관없이 모든 책을 소개한다. 라디오였다면 진행자가 모르는 책이어도 대본에 적혀있으니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빨간책방>은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직접 고르고 읽은 책을 소설가 김중혁과 함께 심층적으로 이야기한다. 단 한 번도 대본을 준비하거나 미리 합을 맞춘 적 없다는 이들의 모든 발화는 그 깊이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작가로써 내밀한 이야기, 박식한 배경지식, 지적인 작품 분석, 지루할 틈 없는 위트로 밀도 있게 채운 2시간은 독자에게 책을 파고드는 방식을 넘겨준다.

 

“좋은 책을 읽으면 이야기하고 싶어지고, 남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다. 빨간책방이 그런 욕구를 채웠다.”

 – 김은주, 위즈덤하우스 부사장

예스24와 BC카드의 캐주얼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은 이제 갓 1년이 됐지만 꽤 두터운 마니아층을 자랑한다. 작가 김하나와 시인 오은이 각자의 개성을 살려 ‘김하나의 측면돌파’, ‘오은의 옹기종기’ 코너로 격주 진행한다. 신・구간을 가리지 않고 좋은 책의 저자를 스튜디오에 초대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재치있고 캐주얼하게 나누는 것이 특징이다. 책을 덮은 후의 소소한 이야기들이나 청취자의 상담, 핑퐁처럼 치고받는 게스트 스피드 퀴즈도 매력이지만 진행과 출연 모두 작가들이 도맡은 것이 <책읽아웃>의 구심력이다. 영화 감독이 다른 감독과 함께 좋은 영화를 언급하면 궁금하고 신뢰가는 것처럼, 책읽아웃에 모인 작가들의 이야기도 신뢰하기 충분하다. 작가가 초대한 작가, 그 특별한 시간을 함께 공유하면서 유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저자와 책에 한걸음 가까워진다.

C. book trailer <책 끝을 접다>  

https://1boon.kakao.com/dogear

친구가 재밌는 영화를 발견했다며 트레일러 링크를 보내온다. 수 분 내외의 트레일러는 영화 제목도 모르던 내게 당장 예매를 해야 할 것 같은 욕구를 자극한다. 영화계에서 쓰이던 트레일러가 출판계에서도 쓰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마침 출퇴근이나 이동, 식사 때처럼 수십분 내의 짧은 시간에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스낵 컬쳐snack culture가 트렌드인 참이었다. 편당 4~50분인 드라마나 예능마저 3분 내외로 재편되는 등 쇼트 클립short clip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대형 서점들은 앞다투어 영화 예고편 같은 쇼트 영상 등의 북 트레일러를 내놓았다. 그중 63만 여명의 구독수와 함께 국내 도서 시장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책 끝을 접다>는 스타트업 ‘디노먼트’의 작품이다. 요점만 축약해서 알려주는 카드 뉴스의 편의성을 책 소개에 적용하되, 책마다 어울리는 그림 작가를 섭외해 감성적인 삽화로 트레일러를 완성했다. 삽화가 모인 섬네일 화면은 마치 네이버의 웹툰 화면을 연상시킨다. 이들의 타깃은 2~30대의 디지털 네이티브니, 책을 찾는 과정의 심리적인 장벽을 효과적으로 없앤 셈이다. 무엇보다 길고 긴 책의 중심 줄거리를 간략하게 이미지화한 수 장의 삽화 카드는 책의 전체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하면서 소화하기 쉬웠다.

완성된 북 트레일러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 1boon, 다음 포털, 유튜브 등 대부분의 SNS 채널에 배포했다. <책 끝을 접다>에 새로 업로드된 책은 즉시 판매 부수가 껑충 뛰었다. 어지간한 화제 아니면 오를 일 없는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도 이름을 올려 업계에서 놀란 눈치다. 200만에 육박하는 조회 수를 기록한 트레일러나, <책 끝을 접다>가 소개한 책만 읽는 독서 모임의 등장에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가파른 성장세를 등에 업어 출판사 백여 곳 이상과 마케팅 협업을 진행했고, 그중 하나인 전자책 브랜드 리디북스에 지난 8월 인수되었으니 앞으로 어떤 북 트레일러를 만들어낼지 기대해도 좋겠다.

얼마 전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로 전철을 타고 이동할 일이 있었다. 전철에 올라타면 앉으나 서나 당연히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을텐데, 무료함에 지쳐 오랜만에 같은 칸에 탄 사람들을 스쳐봤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휴대폰에 있었다. 넋을 놓고 있다든지, 화장을 한다든지, 뭐라도 먹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책 읽는 사람도 당연히. 휴대폰 화면 속의 야구 중계, 웹툰, 유튜브, 쇼핑몰, 메신저 등이 사람들의 시선을 뺏고 있었다. 달리는 스낵 컬쳐의 순간이었다.

 

물론 책이 전철에서 꼭 읽혀야 하는 콘텐츠는 아니다. 독서에 집중하기 쉬운 환경도 아니다. 하지만 책의 시간점유율이 낮아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잠재 독자를 발굴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책은 사용자가 어떤 한 권을 선택하고 완전히 소비하기까지 드는 시간과 에너지의 리스크가 큰 콘텐츠다. 표지와 앞의 열댓 페이지를 정독하고, 뒤에 쓰여진 명사들의 추천 한 마디를 뜯어 읽고, 결제하고, 수일이 걸려 다 읽었는데 책이 영 별로일 때의 허탈감은 다들 겪어봤을 것이다. 러닝타임이 끝난 영화가 마뜩찮을 때와의 실망과는 다르다.

 

유저가 수많은 매력적인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뒤로하고 책에 시간을 투자하도록 만드는 능력있는 설득자가 나타나야 한다. 구매조차 오프라인 서점 대신 온라인 서점 이용률이 높아진 지금, 책의 ‘디지털적 발견성’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에 대한 출판 종사자들의 고민이 깊다. 인스타그램과 팟캐스트, 트레일러에 책을 결합한 오늘의 사례를 다시 생각해보자. 책을 해체해 새롭게 가공하거나 흥미로운 포장지로 포장해 유저에게 건네줬을 뿐이다. 안에 어떤 선물이 들어있을지 설레여지며 포장을 뜯는 과정이라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