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코로나 이후 전 세계는 경기 불황을 맞았다. 이어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무역 공급망의 마비를 일으켜 모든 원자재 값을 오르게 했고 고육지책으로 실행했던 대규모 양적완화의 끝은 인플레이션을 야기해 금리 인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경제 상황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높고, 주요 산업 원자재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우리나라엔 특히 치명적이다. 소비자들의 지갑이 닫힐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합리적인 소비는 결국 가성비를 추구한다. 대다수는 지불한 금액보다 더 큰 효용을 얻을 수 있는 질적 소비를 지향한다. 이런 상황적 배경 탓인지 코로나 전후로 구독경제 시장은 급격히 성장했다. 2023년 KT경제경영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구독경제 시장의 규모는 40조에 다다른다고 한다.

 

구독 경제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다양하다. 매달 일정 금액을 내고 무제한 서비스를 이용하거나(예: 콘텐츠 플랫폼) 처음부터 물건을 구입하는 대신 구독료를 지불하고 상품 혹은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하고(예: 침대 렌탈), 구독료를 지불하면 나의 소비 주기에 맞춰 특정 상품을 배송해 주기도 한다(예: 뷰티 박스). 이처럼 종류는 다양하지만 기업이 소비자에게 약속하는 내용은 동일하다. 구독이라는 제도를 통해 개별 구매를 할 때 보다 더 큰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지갑이 점점 얇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소비자들에게는 때에 따라 꽤 합리적인 소비 활동이 될 수 있다. 매번 결제창을 띄운 채 망설이고 주저하기를 반복하는 수고를 덜어내는 것은 보너스다.

 

초창기 구독 경제의 흥행을 이끈 것은 넷플릭스와 같은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소유보다 비교적 가벼운 구독을 지향하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구독 서비스의 범주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구독 서비스도 흔해지는 추세다. 최근에는 구독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가전, 가구, 자동차 등도 대중적인 구독 서비스의 반열에 올랐다.

 

가전 구독의 경우, 대여와 관리라는 전략적인 렌탈 형식의 구독 서비스 마케팅이 업계에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때 국내 영업 시장에 신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웅진 코웨이 정수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차원적 생활 가전을 넘어 구독의 범위와 대상이 매우 다채로워지는 추세다.

살 때부터 쓸 때까지 책임지는 브랜드 중심 구독 서비스

삼성전자 ‘큐커’

 

국내의 경우, 구독 전문 회사보다 브랜드 중심의 구독 서비스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1년 하반기, 디자인 브랜드 비스포크의 라인업 중 주방 종합가전 큐커를 더해 출시했다. 큐커는 기존에 존재하던 에어프라이어, 직화 그릴, 토스트, 전자레인지의 기능을 하나로 품은 혁신적인 제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출시 직후부터 조리 과정을 단축하고 요리를 쉽게 만든다는 장점을 내세워 1인 가구 및 바쁜 현대인 소비자층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큐커는 제품 기획 단계에서부터 관련 상품을 연계한 식품 플랫폼, 큐커 식품관을 함께 구축해 사용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주방 가전은 결국 요리할 식품이 있을 때라야 쓸모가 있다. 큐커 식품관에서는 밀키트, 가정 간편식, 수산 식품 등 큐커로 조리할 수 있는 모든 식품군을 구매할 수 있어 소비자가 큐커를 그냥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끔 돕는다.

 

큐커만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구독 서비스를 결합해 가전제품과 식료품 구매를 동시에 유도한다는 점이다. 큰 줄기에서 볼 때 큐커 이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구독 유형이 있다. 첫째는 특정 회사 카드를 통해 24개월 동안 직영몰에서 매월 3만 9천 원 이상을 쇼핑하는 조건으로 큐커를 5만 원에 구매하는 식이다.

 

두 번째는 직영몰에서 매월 3만 9천 원 이상의 큐커 관련 제품들을 쇼핑하면 신용카드 캐시백 또는 청구할인으로 1만 5천 원의 혜택을 주는 방식이다. 여기에 더해 구독 서비스를 통해 일정 금액 이상을 소비하면 무료 배송 서비스도 제공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기업 입장에서는 자사 쇼핑몰에서의 지속적 구매를 유도하는 락인(Lock-in) 전략인 동시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구매할 식료품에 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매력적인 구독 서비스가 될 수 있다.

원하는 차를, 원하는 만큼

현대자동차 ‘셀렉션’

 

국내 브랜드 가운데 또 다른 주목을 받는 구독 서비스 사례로는 현대자동차가 있다. 현대자동차는 국내 자동차 브랜드 중 처음으로 구독 서비스를 개시했다는 이력이 있다. 사실 자동차 구독 서비스는 자동차 업계에서 낯선 개념이 아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수많은 자동차 딜러가 제공하는 구독 서비스가 성행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제조사 직영 매장에서 차를 구매하기보다 한 지역을 거점으로 여러 자동차 브랜드를 취급하는 딜러를 통해 구매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대형 딜러 회사들은 자체적으로 취급하는 자동차 종류가 많다는 장점을 활용해 고객들에게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고객이 원하는 신차 또는 중고차 모델을 원하는 만큼 타다가 언제든 반납할 수 있는 구독 시스템이다. 장기 렌터카 프로그램 방식과 유사하지만 자동차 구독은 원하는 차종을 계약(요금) 변경 없이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한 차이가 있다. 이런 시스템이 성행하자 제조사에서도 직접 구독 서비스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프리미엄 브랜드에 속하는 포르쉐와 볼보에서도 시장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차량 구독 서비스를 도입했다.

 

현대자동차는 2018년, 국내 시장에서 처음으로 제네시스 모든 차종을 구독할 수 있는 제네시스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이후 2019년에는 구독 대상을 전체 라인업으로 확대하여 현대 셀렉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매달 일정액의 구독 요금을 내는 제도인데, 요금제에 따라 탈 수 있는 차종이 다르다. 예를 들어 프리미엄 플러스 요금제에 가입하고 월 109만 원을 지불하면 아이오닉6, 더 뉴 팰리세이드, 디올뉴 그랜저를 포함한 15개 차종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차를 탈 수 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세금, 보험료, 소모품 교체의 비용이 전혀 없고, 동일 등급 안에서 월 2회까지 차량을 교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당장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차를 운행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차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구독 서비스는 기존의 내비게이션이나 반자율주행 기능뿐만 아니라 갈수록 진화하는 편의 사양에 대한 옵션 적용, 전기차 충전 요금 할인 등 다양한 형태로 확대될 전망이다.

일상을 반짝이는 작은 박스

브레오, 가젯 디스커버리 클럽 

 

해외에는 이미 구독 서비스 전문 기업이 많으며 광범위한 분야에서 구독 서비스가 적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전에 다루지 않았던 범위의 제품들까지 구독 서비스의 영역으로 외연을 확장해 나가는 추세다. 흔히 럭키박스로 불렸던 큐레이션 형식의 정기 배송 구독 서비스가 코스메틱이나 뷰티 제품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아이디어 기반의 트렌디한 테크 상품까지 구독의 방식을 통해 소개되는 상황이다.

 

미국 브레오 박스(Breo Box)의 경우, 분기별로 구독자들에게 생활에 도움이 되는 소형 가전들을 배송해 준다. 연간 $145가량의 구독료를 내면, 1년에 총 4번 $1200 상당의 상품을 보내 주는데 박스 하나에 4~8개의 상품이 들어있다. 상품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한데 대부분 기발함이 돋보이는 소형 생활 가전이다. 다용도 핸드폰 무선 충전 트레이, 수면 유도등, 노트북 청소기, 자전거 램프, 여행용 차 인퓨저 등 소소하지만 일상에 도움이 되는 제품들로 구성되었다.

 

가젯 디스커버리 클럽(Gadget Discovery Club)의 경우도 비슷한 형식이다. 이 서비스에서는 혁신적인 제품들을 주로 소개한다. 최대 네 가지의 스마트 디바이스 또는 엔터테인먼트 관련 제품을 모아 매 분기 배송하는데 무선 이어폰, 휴대용 스무디 블렌더, 휴대용 자외선 살균 소독기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구성된다. 모든 상품에 1년의 보상 정책을 담보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사용자 중심의 구독 마케팅

그로버 

 

독일의 가전 구독 서비스, 그로버(Grover)는 공유와 구독을 합친 형태다. 스마트폰, 노트북 등의 장비를 구독료를 받고 월 단위로 빌려준다. 가전제품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전체 서비스에 대한 구독료가 아닌 해당 가전에 대한 개별 구독료를 지불한다.

 

기존의 가전 렌탈과 운영 방식이 흡사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기본 원리는 다르다. 가전 렌탈의 경우 한 가지 상품에 대해 장기간 계약을 체결하고 할부로 제품을 사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지만, 그로버는 사용하고 싶은 만큼 월 단위로 결제할 수 있으며 이미 중고품이 된 물건을 일정한 비용으로 장기간 대여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렌탈에 비해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적다. 가전제품을 미리 경험하고 구매해 보기 원하는 개인뿐 아니라 비용 절감을 목표로 하는 스타트업 회사들에게 인기가 많다.

 

2020년에는 삼성전자와 손을 잡고 스마트폰을 구독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요즘의 스마트폰은 노트북과 값이 비슷한데 비싼 만큼 새로운 제품을 살 때 망설여지기 일쑤다. 이때 그로버를 이용하면 플래그십 모델을 미리 경험해 볼 수 있어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로버의 성공을 본 삼성과 애플이 자체적으로 구독 서비스 운영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이처럼 그로버는 단순히 가전 시장의 새로운 활로를 연 차원을 넘어 자원 순환을 도모하고 전자 폐기물을 줄이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으며, 이로 인해 여러 투자사와 가전 관련 대기업의 투자를 끌어냈다.

구독은 어느덧 보편적인 서비스가 되었다. 실제로 요즘의 우리는 누구나 하나쯤 구독 서비스에 가입해 있다. 종종 편의성과 독점 때문에 구독을 택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구독은 내가 지불한 금액보다 더 큰 효용을 얻을 수 있을 때 그 계약이 성사된다. 그 때문에 1인 가구가 늘어나고 고물가 시대가 지속될수록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많은 소비자는 당장의 비용을 줄이기 위한 구독 서비스에 호의적일 것이다. 시장은 이런 흐름을 놓치지 않고 더욱 다양하고 신선한 구독 서비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더 많은 경쟁이 있을수록 시장은 발전하고 소비자들은 즐거울 수 있다.

 

다만 구독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소비하게 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다수의 소비자를 테두리에 가두어 지속적인 소비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반대로 소비자들에게는 합리적 소비를 위해 구독을 택했지만, 오히려 더 나은 구매 대안을 찾는 것에 소홀해지는 비합리적인 소비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소유에 대한 거리낌이 있는 이 시대에 구독 경제는 계속 성장할 것이며 매력적인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