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 그 행복의 배경은 모든 시민이 예술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덴마크는 자그마치 176년 전부터 인생 예술교육을 책임지는 시민학교,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를 세웠다. 이곳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 비정규 교육 기관으로서, 청년과 노인 모두를 아우르는 커리큘럼으로 앞선 문화예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커리큘럼 중 약 40%가 미술, 공예, 음악, 조각, 미디어아트 등의 예술 분야이다.

덴마크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차로 약 40분 정도 떨어진 도시, ‘힐레뢰드(Hillerød)’에는 또 다른 시민학교 ‘프레데릭스보르 학교(Frederiksborg)’가 있다. 이 학교의 교장, 야곱 닐슨(Jacob Nilsson)은 “문화예술만큼 인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는 교육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문화예술은 인간이 자신의 예술성을 찾고 삶의 시간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한다. 덴마크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시민 모두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필수 서비스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학령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덴마크의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코펜하겐의 ‘아마게르(Amager)’에 위치한 어린이 문화원, ‘BKA(BørneKulturhus Ama’r)’는 처음 문을 연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매주 700여 명의 어린이가 찾아올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곳에서는 문화예술을 통해 아이들을 온전한 자아를 가진 개인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이 어떤 교육 환경과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주목해보자.

 

<목록>

A. BKA의 공간 : 모험을 꿈꾸는 아이들의 아지트

B. BKA의 프로그램 : 경쟁이 없는 예술 놀이

C. BKA의 핵심 가치 : 경험의 확장

A. BKA의 공간 : 모험을 꿈꾸는 아이들의 아지트

 

공간은 사람의 움직임과 경험을 지배한다. 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도르트 만드룹 건축사무소(Dorte Mandrup Arkitekter)’는 아이들의 상상력과 행동에 힘을 실어주는 공간을 생각하며 BKA를 설계했다. 건축가는 BKA의 진정한 주인인 지역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상상과 희망을 과감히, 혁신적으로 현실 속에 그려냈다. 개관 당시, 시에서 건축상을 받기도 한 BKA의 건물은 지붕과 정면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고 확장된 외관을 갖고 있다. 이는 이곳을 이용하는 아이들의 열린 사고를 자극하면서 동시에 BKA가 지향하는 열린 교육을 상징한다.

외관만큼이나 실내 공간도 매력적이다. 우선 내부에서 열리는 행사의 성격과 참여 인원의 연령대에 따라 내부 구조를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아이들의 유연한 사고를 돕는다. 곳곳에는 아이들의 신체 발달과 근력 향상까지 생각한 클라이밍 벽도 설치했다. 꼬마들의 영원한 로망인 다락방도 자리싸움이 필요 없도록 넉넉히 설계했다. 건축가는 아이들의 꿈과 생각, 상상이 가장 크게 발현되는 곳이 바로 다락방이라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을 중심으로 철저히 연구하고 설계한 건축가의 세심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아이들은 한 가지 특정한 물건이나 공간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쉴새 없이 일어나는 복잡하고 신나는 모험을 꿈꾼다. 이런 아이들에게 이곳은 마치 해변의 놀이터, 늪지대의 동굴, 높은 산과 같이 다양한 환경을 제공한다. 아이들은 기존의 건물과 유연하게 이어지면서도 평범하지 않게 비틀어진 공간 속을 탐험하며 창의성과 탐색 욕구를 키운다.

B. BKA의 프로그램 : 경쟁이 없는 예술 놀이

 

BKA는 16세 이하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음악, 춤, 연극, 요가, 디자인 등 각종 문화예술 워크숍과 이벤트를 제공하고 있다. 모든 프로그램에는 재미와 함께 명백한 교육적 가치를 담는다.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자기 주도형 콘텐츠’가 주를 이룬다. 아이들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문화예술의 즐거움을 느끼고 자기계발을 하게 된다. 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키운다.

덴마크의 아이들은 다양한 예술가와의 워크숍을 통해 즐거운 문화예술 체험을 할 수 있다. © Børnekulturhus Ama'r Facebook

BKA의 프로그램이 가진 특별함 중 하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다.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작가나 디자이너, 건축가, 문화예술 전문가 등이 직접 아이들을 만난다. 커리큘럼 역시 이들의 손에서 탄생한다. 나만의 동화 속 상상의 동물을 3D 프린터로 제작하는 무대 디자이너의 워크숍, 의상을 만들거나 수선하는 패션 디자이너의 워크숍, 그리고 바닷가를 모형으로 설계해보는 건축가의 워크숍, 오로지 아이패드로만 그림을 그리는 삽화 작가의 디지털 드로잉 워크숍 등은 아이들의 두뇌와 감각, 창의력을 고루 발달시킨다. 동시에 지역의 능력 있는 인재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사례로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신체와 정서 발달의 균형을 위해 ‘춤’이라는 장르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큰 특징 중 하나다. 전용 댄스 홀을 갖추고 있어 연령과 장르에 따른 다양한 댄스 클래스를 제공하고 있다. 공과 스카프, 드럼 등 도구를 사용해 재미있는 소리와 움직임을 만들기도 한다. 감각 운동 기반의 이 놀이 수업은 어린이와 가족에게 호응이 좋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발레와 현대무용, 거리 댄스, 브레이크 댄스 정기 수업은 자체 팀도 결성했다. 하지만 덴마크의 여타 시민학교에서 경쟁과 성적 평가가 금지된 것처럼, BKA 내에서는 경쟁심을 유발하는 경연 대회는 열지 않는다. 결과보다 과정을 생각하는 전형적인 선진국의 교육 방식이다.

 

아직 나이가 어려 워크숍에 참여할 수 없는 영유아에게는 매주 화요일마다 댄스홀을 놀이방으로 개방하고, 각종 놀이기구와 탈것을 제공한다. BKA는 보호자가 직원에게 아이를 맡기고 방관하는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 등 가족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패밀리 잼(Family Jam)>, 가족끼리 팀을 이뤄 요가를 배우는 <가족 요가(Family Yoga)>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부모가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독려한다.

중고등 학생은 작곡가, 연극작가 등의 예술가와의 심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한다. © Børnekulturhus Ama'r Facebook

중・고등학생을 위한 심화 워크숍도 진행한다. 극단 소속 작가의 지도로 연극 시나리오를 직접 써 보고, 배우의 지도로 습득한 연기 솜씨로 실제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한다. 연극 하나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문화와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함을 생각하면, 연극 워크숍은 문화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문화예술교육이다. 작곡가의 지도로 자신이 창작한 음악을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서 연주하는 워크숍 역시 창의력과 자기 표현력을 기를 수 있는 학습 방법이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무대를 꾸며보는 경험은 사람들 간의 조화와 단합을 이해하는 자양분이 된다.

 

방학이 찾아오면 장・단기 캠프 프로그램을 주 단위로 진행한다. 그 중 하나가 ‘덴마크 작곡가 협회(Dansk Komponist Forening)’와 함께 기획하는 ‘작곡가 캠프(Komponist Camp)’다. 이 협회의 회원과 음악인들이 아이들과 일주일간 함께 지내며 음악을 창작하는 다양한 방법을 소개한다. 친구들과 화합해 몸과 목소리로 낼 수 있는 음을 알려준다. 또, 아이들이 다양한 악기와 전자음악 기기를 익힐 수 있게 도와준다. 이를 활용해 즉흥 연주를 해보면서 아이들은 일상 속에서 예술이 얼마나 친근한 것인지 알게 된다.

C. BKA의 핵심 가치 : 경험의 확장

 

BKA는 아이들의 일상적인 놀이와 관찰이 특별한 경험으로 확장되는 것을 지향한다. 특정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관찰할 지, 그리고 관찰 중 수집한 것으로 아이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지, 그 사고의 확장에 주목하는 것이다. 탐구와 분석의 즐거움을 느끼는 아이의 주체적인 예술성을 포착해, 그만의 작품과 전시로 끌어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BKA의 역할이라 믿는다. 그들이 아이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숨어있는 의도와 의미를 발견하려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동네를 담은 보스 비 프로젝트 © Børnekulturhus Ama'r Facebook

‘우리 동네’라는 뜻의 전시 프로젝트 ‘보스 비(Vores By)’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마게르 지역의 현재와 미래를 담았다. BKA가 ‘아마게르 문화센터(Amager Kulturpunkt)’에서 건축가 ‘로아 레아크(Roar Lerche)’, ‘줄리 뒤푸(Julie Dufour)’, 사진작가 ‘옌스 히멜(Jens Himmel)’과 함께 기획한 지역 커뮤니티형 전시였다. 코펜하겐의 공립 학교인 ‘피더 리케 스콜레(Peder Lykke Skole)’와 초등학교 ‘션비외스터 스콜레(Sundbyøster Skole)’의 재학생 260여 명이 작품에 참여했다. 한 달간 동네를 활보하며 자신의 눈에 비치는 동네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았다고 한다.

 

그 중 ‘물질 시리즈’는 돌담과 나무 울타리, 콘크리트 바닥까지 동네를 이루는 소재들을 기발한 각도로 촬영한 작품이다. 또,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만 촬영한 ‘자전거 이웃 시리즈’에도 아이들의 순수하고 이색적인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학생들은 추가로 건축 워크숍에 참여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공간을 그래픽이나 모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살피고, 친구들의 작품을 관찰하는 과정을 통해 타인과 생각을 교류하고, 공유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런가 하면 ‘솔스킨스터널(Solskinstunnel)’은 BKA의 예술부서 소속인 ‘마리아 라우 크로그(Maria Lau Krogh)’ 작가와 피더 리케 학교, 그리고 지역 유치원이 협업한 예술 프로젝트다. 아이들의 창의력을 공공시설 디자인에 투입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주민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지하 터널이 있었다. 분명 이동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지름길인데도 특유의 음침함 때문에 주민들이 잘 사용하지 않았다. 2017년쯤, 조명을 교체하고 벽도 산뜻하게 칠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좀 오래걸리더라도 지상의 길을 택했다.

 

300여 명의 아마게르 지역 아이들이 이 터널에 밝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기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작가는 아이들과 함께 수백 개의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모자이크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한 태양 광선을 상징하는 붉은색 삼각형과 프리즘 패턴이 그려져 있다. 어둡고 퀴퀴하던 지하가 갤러리로 재탄생했다. 공공시설 디자인에 참여한 아이들은 새롭게 단장한 터널을 이용해달라며 홍보대사의 역할도 기꺼이 소화했다. 아이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의 주인이자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히 인정받는 경험을 얻게 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BKA의 사례처럼 덴마크의 문화예술교육은 어린이의 주체성과 협동심 강화에 집중한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또, 경쟁보다 교류의 즐거움을 느끼도록 화합의 순간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태도를 가르치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가 우선이다. 아이들의 행동에는 각자의 의도와 주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계속 일깨워 주되, 과잉 보호나 무리한 조기 교육은 지양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이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성인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기에 가능한 태도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그들의 교육 방식은 아이들을 무한한 창의력과 개성 있는 생각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게 한다.

 

국내에서도 어린이를 위한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 지 오래다. 두뇌와 창의력은 물론이고, 예술적 감수성까지 발달시키는 워크숍과 놀이도구를 갖춘 키즈 카페도 등장했다. 엄마를 위한 불어 수업과 꽃꽂이 워크숍, 레스토랑까지 갖춘 프리미엄 키즈카페도 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는 문화예술의 공간임을 강조하며, 값비싼 장난감과 거대한 놀이시설을 구비해 두었다. 직원들은 아이들이 심심할 틈 없이 극진하게 놀아주고 보호한다.

 

이런 곳이 정말 아이들을 위한 창의적인 문화예술공간일까? 이곳에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이 다시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와 한숨 짓듯, 아이들도 잠시 잠깐의 문화예술을 맛보고 집으로 돌아와 허무함을 느낄까 걱정이다. 특정 공간과 수업 안에 그 즐거움을 가둬두지 말고 문화예술의 힘이 아이들의 일상을 휘감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분리와 단절에서 연결과 확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들과 문화예술을 함께 즐기며 가능성을 끌어내 줄 어른이 필요하다. 옆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아이들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 부모와 가족은 물론, 학교와 지역 차원에서 타인과 문화적 교류를 즐기는 기회를 만들어 주자. 이렇게 경쟁을 앞세우던 교육 방식을 벗어나 아이들의 주체성과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환경을 조성해 나간다면, 아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