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수많은 담론과 인식, 삶의 궤적이 집합된 공간이다. 많은 사람이 오늘도 도시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주변의 건조 환경(built environment)을 인식하고 지형을 습득해 체화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비로소 주변의 건조환경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일상 속 건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은 결코 공간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질서가 도시 환경에 확산되며 도시는 어느덧 배타성을 가진 상품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기능했던 과거의 장소들은 문화재로 등록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이 두 현상의 출발 지점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건조 환경에 대한 접근성 저하를 초래했다는 부분에서 일맥상통한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건축물들은 언급된 집합의 구성물로서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지만, 대개 특정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접근조차 하기 힘들다. 즉 시민들은 건물 입구에서 돌아서게 됨으로써 도시로부터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보안, 훼손, 위생 등 각종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건축물의 출입을 배타적으로 허용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고려하면서 시민들의 도시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은 장기적으로 도시와 시민들 사이 유대감과 상호작용을 원활하게 만들어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오픈하우스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이 축제는 한정된 기간에 평소 일반인의 접근을 불허했던 산업 단지, 정부 건축물, 개인 사유지, 문화재 등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들을 전면 개방하는 이벤트다. 이 기간에 시민들은 건축물뿐 아니라 건조 환경의 건축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그간 시야 속에 익숙하게 서 있던, 또는 완전히 새로운 도시 환경을 접하거나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런던에서 시작된 오픈하우스는 현재 영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운영 중이며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공공건축의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오픈하우스의 역사와 대안 공간의 의미
1992년, 오픈하우스의 설립자 빅토리아 손튼(Victoria Thornton)은 오픈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런던에 17개의 프로그램을 열었고, 약 100명의 인원이 소형 버스를 타고 런던 시내 곳곳을 방문했다. 손튼에 따르면, 오픈 하우스가 처음 개최되었을 당시 행사에 대한 반응은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런던의 건축물을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원했지만 사람들은 경제 위기와 함께 동시대 건축물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계획이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며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2년 후 프로그램 참여 건물의 수는 200개로 증대했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방문객 숫자가 1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많이 증가했다.
오픈하우스가 전 세계적으로 정착하게 된 2019년에는 무려 100만여 명의 참여자가 200만여의 건축물 탐방했고, 18,000여 명의 봉사자가 행사를 도왔다. 지금도 본거지인 런던에는 매년 9월, 약 25만 명의 방문객이 800개의 건축물을 탐방하고 있다.
오픈하우스 축제를 주관하는 곳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이 행사의 근원은 영국의 오픈 시티(open city)라는 단체다. 오픈 시티의 목표는 지역 주민들 혹은 공동체원들이 자신의 거주 지역에 대해서 학습하고, 경험하며, 장소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중 오픈하우스는 이들이 담당하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데, 그렇다고 해서 오픈하우스가 오픈 시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전부는 아니다.
오픈 시티는 각종 건축 관련 단체와 협력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강좌를 개설하거나 Accelerate와 같이 다양한 연령을 대상으로 한 건축 학습 워크숍을 연다. 또한 연중 즐길 수 있는 건축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픈 시티의 철학은 결과적으로 오픈하우스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전세계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한 디딤돌이 되었다.
그렇다면 손튼이 말한 공공건축에 대한 대안적인 움직임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걸까? 이 질문에 르페브르(Lefebvre)의 이론을 적용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과 관련된 세 가지 개념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공간의 실천으로, 사회 구성원이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 공간을 생산하고 점유하는 방식이자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산물이다. 두 번째는 공간의 재현으로, 도시 공간에 대한 지식을 보유한 과학자들, 도시계획자들, 건축가들 혹은 정치 관료들이 인식하는 공간으로서 합리성과 효율성에 입각한 공간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공간의 재현과 공간의 실천이 경합하며 만들어지는 의미와 상징으로 점철된 공간으로, 전환적인 생산과 점유 행위가 발생할 수도 있는 토대다.
그동안 사회는 과학의 발전과 그 중요성이 확산함에 따라 인식 공간의 비중이 점차 커져 왔다. 이에 따라 접근성이 발생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실천도 수동적으로 변해갔다. 곧 공간의 재현에 따라 공간의 실천이 종속적으로 변해온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픈하우스는 그동안 규범으로서 통제되어 있던 건축물들의 제한된 접근성을 개방이라는 대안적인 실천을 통해 새로운 재현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이 재현 공간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그저 건축물을 지나치거나 혹은 들어가서 반복적인 업무를 보는 등의 일상적이고 수동적인 실천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는, 더욱 능동적인 실천을 해 나가는 행위자가 된다. 즉 행사를 경험하면서 공간적 실천의 범위 역시 확장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연중 내내 오픈하우스 행사를 진행할 수 없다는 한계 탓에 짧은 행사 기간만으로는 공간에 대한 완전한 패러다임 변혁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수반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상황과 달리 현재 오픈하우스에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고, 세계 곳곳의 크고 작은 실천들이 응집되면 변화의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 실제로 오픈하우스는 공공건축에 대한 담론이 이미 어느 정도 정착된 지역을 넘어, 도시 담론이 이제 막 생산되는 지역들로까지 확산하는 중이다.
도시의 문을 열어 에스토니아를 알린
오픈하우스 탈린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수도이자 경제적, 산업적, 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통시적으로 독일,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이 지역은 중세 시대부터 동부 유럽과 서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지역이자 연합 무역 공동체였던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에 소속되어 있었다. 19세기에는 러시아에 의해 산업화가 이루어졌으며 항구도시로 개발되었고,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을 당시에는 공업화가 추진되기도 했다. 독립 후 디지털 인프라를 조성함에 따라 현재는 유수의 스타트업이 집합된 곳이기도 하다.
2022년 탈린은 네 번째로 오픈하우스 축제를 개최했다. 10월 15일에서 16일 이틀 동안 진행된 이 행사는 탈린에 있는 30채 정도의 건축물을 전면 개방하는 이벤트로 시작되었다. 개방된 건축물들은 문화공간인 에스토니아 국립극장, 공장을 재생해 세워진 쿨투리카텔 창의공간(Kultuurikatel Creative Hub)부터 이전의 산업 지대 경관을 유지하고 있는 크룰 산업 단지(Krull quarter), 푀얄라 공장 지대(Põhjala factory), 정부 기관이 위치한 사리넨 건물(Saarinen Building)과 외교부건물, 그리고 해안지역과 연관된 탈린 상부 등대와 팔야사레 항구(Paljassaare harbor)까지 다양하게 선정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약 6,300명의 인원이 방문하였으며, 이 숫자는 오픈하우스가 처음 열린 2019년 이래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노블레스너 잠수함 공장과 박물관으로 개조된 스토커(Stalker) 박물관 벙커의 방문객은 799명에 달해 가장 많았다.
성공적으로 개최된 오픈하우스 탈린의 핵심 주체는 에스토니아 건축 센터(Estonian Center for Architecture, 이하 ECA)였다. 에스토니아 예술아카데미와 에스토니아 건축연합회가 설립한 이 비영리기관은 영국의 오픈 시티와 유사하게 자국의 건축 문화를 발전시키고 에스토니아의 건축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목표를 지니고 있다.
ECA는 오픈하우스가 열리기 이전인 같은 해 2022년, “지속가능한 도시 건축 시스템”을 주제로 한 탈린 건축 비엔날레를 주최한 적이 있다. 또한 이러한 대규모 건축 행사 외에도 공공건축과 관련된 각종 포럼, 강의, 투어,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한다. 이번 오픈하우스의 경우, 에스토니아어를 비롯해 영어와 러시아어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에스토니아 건축 환경을 자국민 이외에 전 세계 시민에게 알릴 좋은 기회였다. 또한 큰 규모로 진행되었던 만큼 ECA의 활동 저변을 넓힐 수 있는 플랫폼으로도 기능했다.
도시 공간과 도시민, 그 사이를 잇다
오픈하우스 타이베이
타이베이는 대만의 수도이자 동아시아 지역의 핵심 도시다. 본래 케타갈란 원주민 부족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지역은 18세기 중국 본토의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무역 거점지역으로 거듭났고, 공식적으로 수도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청일 전쟁 후 일본의 영토였던 시기에는 도시 발전과 함께 행정적 중심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949년 국공내전 이후 인구가 유입된 뒤로는 도시의 규모를 확장하게 되었다. 현재는 각종 교통, 금융, 산업 시설들이 집결된 글로벌 시티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타이베이 101을 포함한 여러 유명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타이베이에서도 2022년 11월 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간 오픈하우스 축제가 열렸다. 지난해 오픈하우스 타이베이의 주제는 사교 타이베이(Social Taipei, 원어 社交台北)로, 사람들이 어떻게 공간을 형성하고 공간이 어떻게 사람들을 이어주는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서 “사교”라는 단어는 “사회적”이라는 맥락을 가지고 있으며, 타이베이라는 도시 안에서의 공간과 시민 사회의 연결과 공공건축에 대한 담론 생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교 타이베이라는 대주제를 두고 100여 개의 건축물이 개방되었으며 이들은 각각 13개의 세분된 카테고리에 소속되었다. 예를 들면 “건축가의 아이들”이라는 뜻을 가진 카테고리인 “建築師的寶貝們”에는 유명한 건축사무소와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래된 재생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은 해시태그인 “老屋子的再生”에는 현재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된 낙후 공간이 포함되었다.
이 모든 행사의 핵심 주최 측은 오픈하우스 타이베이, 또는 오픈 타이베이다. 오픈하우스 타이베이는 본 축제 이전인 11월 5-6일, 대만 국립극장과 콘서트홀의 35주년을 기념하는 협력 행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이 행사 역시 오픈하우스와 같은 맥락에서 시민들이 해당 공간을 깊이 알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오픈하우스의 주최 측은 개방 공간과 협업하여 각종 생산품을 구매할 수 있는 바자회, 예술 및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워크숍,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특별강연과 투어 등 다채로운 이벤트들을 기획했다. 사실 타이베이에는 과일주 공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한 화산1914창의문화원구와 같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 있어 왔는데, 이번 행사는 그동안의 노력을 고유한 방식으로 집대성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로사리오의 집으로 놀러 오세요
오픈하우스 로사리오
아르헨티나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로사리오(Rosario)는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서 방향으로 29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지역은 항구 도시이자 산업과 무역,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설립 초기인 17세기부터 내전 직후인 19세기까지는 소규모 정착지였지만, 1852년 산타 페(Santa Fe)의 주지사에 의해 공식적으로 도시의 자격을 갖추게 되면서 국제 무역을 통해 급성장했다. 이후 몇 차례 경제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현재는 농산물 수출과 관광 등으로 회복해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가 되었다.
올해 열린 오픈하우스 축제는 로사리오에서 다섯 회를 맞이했다. 9월 10일-11일 이틀 동안 개최된 행사에서는 총 103채의 건축물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번 연도의 오픈하우스 테마는 바로 집(원어: La casa)이며, 특별히 거주 지역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최 측은 집이 거주자들과 이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나타내며, 도시의 역사와 변화를 담은 표상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2022년 오픈하우스 로사리오의 슬로건은 “누군가의 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는가?(¿Nunca sentiste curiosidad por conocer la casa del otro?)”로 결정되었다. 주요 장소도 팬데믹 이후 새롭게 개방한 주택 및 젊은 건축가들이 설계한 주택들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소개되는 건축물들은 주택에만 국한되지 않고, 군부 독재 피해를 겪었던 비질 도서관(Biblioteca Vigil), 다수의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지는 서큘로 극장(Teatro el Circulo), 유럽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엘살바도르 묘원 등 역사적인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장소들도 포함되었다.
행사의 주최 측은 오하체(OHACHE)로, 공공건축과 관련된 여러 분야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비영리 단체다. 이번 행사에서 이들은 건축물 개방 이외에도 로사리오 출신 여성 건축가인 마틸데 루에티시(Matilde Luetich)의 생애와 건축학적인 업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기획했으며, 역사 문화적인 가치가 있으면서도 방문객이 건축물을 탐방하며 취식하거나 쉴 수 있는 40개의 카페와 식당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저녁 시간에는 건축물들의 야경을 살펴볼 특별한 기회도 제공하였다. 전반적으로 이번 행사는 특유의 개별성과 폐쇄성으로 공공건축 분야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집이라는 영역을 오하체가 대주제로 선정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 또한 로사리오만이 지니고 있는 건축적인 자산을 한껏 활용했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픈하우스를 통한 공공건축의 새로운 담론은 지금도 전 대륙으로 퍼지고 있으며, 각 도시의 특징들을 십분 반영한 형태로 진화해 가는 중이다. 오픈하우스가 확장됨에 따라 시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환경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하고 도시환경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다.
도시는 더 이상 소수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도시는 시민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공유 자산이 되었다. 오픈하우스는 바로 이 메시지를 세계 여러 도시와 그 도시를 채운 시민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다만 짧은 기간 탓에 참여 여건에 제한이 생긴다는 점은 앞으로 차차 개선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다. 단 이틀 동안 그간 관심 있었던 도시의 다양한 건축물을 돌아보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무적이게도 2주간 진행된 오픈하우스 런던이나 1주간 진행된 오픈하우스 서울은 비교적 긴 기간 탓에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었다. 오픈하우스의 지향점이 도시민의 도시환경에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 만큼 접근성 면에서 조금 더 긴 기간을 확보해 주는 일이 절실해 보인다. 오픈하우스를 통한 시민들의 다채로운 경험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데 크게 일조하는 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