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3 Dots

▪ 광둥어로 “큰 집”이란 뜻의 타이퀀은 19세기 영국군 사법 시설이었던 중앙경찰서와 교도소, 법원을 아우르던 복합 행정지구였다. 2008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시키자는 홍콩 정부의 결정에 따라 약 4억 5,80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10년에 걸친 복원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 건축은 헤어초크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맡아 “보존”을 키워드로 과거의 흔적 위에 현재의 감각을 덧입혔다. 역사성과 예술성이 중첩된 공간에 다양한 창작자들과의 협업이 더해져 타이퀀만의 건축 언어가 완성됐다.

▪ 오늘날 타이퀀은 유적지이자 동시대 예술 플랫폼으로서, 장소성과 시대정신이 교차하는 독자적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지역 커뮤니티와의 연결을 유지하면서도 아시아 현대미술 생태계 안에서 홍콩이라는 도시의 문화적 스케일을 재구성하는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홍콩은 아시아 현대 예술의 지형도에서 가장 역동적인 축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매년 봄 열리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 아트바젤 홍콩은 전 세계 미술 관계자와 컬렉터들의 발걸음을 이 도시에 묶어두고 있으며, 센트럴 지역에는 하우저 앤드 워스(Hauser & Wirth) 같은 세계적 갤러리들이 속속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퀸스로드에 문을 연 하우저 앤드 워스의 신규 공간은 단순한 갤러리 확장을 넘어 글로벌 현대미술 네트워크 속에서 홍콩의 존재감을 재확인시키는 사건이었다. 한편 서구룡문화지구에 들어선 M+ 뮤지엄은 “미술관 그 이상의 미술관(More than Museum)”이라는 슬로건 아래 현대 시각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건축, 영화,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등 움직이는 이미지를 비롯해 다양한 시각 문화 콘텐츠를 다루며 전통적인 미술관의 틀을 벗어난 실험을 이어가는 중이다.

 

이처럼 도시 전역에서 현대 예술의 외연이 확장되는 가운데 과거의 흔적과 예술적 사유를 소환하는 공간도 있다. 바로 타이퀀(Tai Kwun) 문화예술센터다. “타이퀀(大館)”은 문자 그대로 “큰 집”을 의미하며, 본래는 1850년대 영국군이 설립한 중앙경찰서, 빅토리아 감옥, 법원이 함께 자리해 있던 일종의 사법 복합 단지였다. 오랜 세월 도시의 법과 질서를 관장하던 이곳은 1995년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이후 약 5,000억 원(총예산 4억5,800만 달러)을 들인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10년 여의 리노베이션 끝에 2018년 문화예술센터로 다시 태어났다.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현재적 언어로 해석해 낸 타이퀀은 도시의 역사와 예술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특별한 장소는 예술이 공간과 시간을 매개로 도시와 나누는 대화를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고층 빌딩이 즐비한 홍콩에서 하나의 문화예술 오아시스와 같은 타이퀀 © Tripadvisor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홍콩식 문화공간

높은 빌딩 사이, 오래된 시간을 간직한 이 공간에 지금까지 약 2,000만 명이 다녀갔다. 개관 이후 타이퀀을 찾은 이들 중 다수는 10대와 20대, 이른바 MZ세대였다. 타이퀀 측은 이 젊은 방문객들이 이곳에 끌리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든다.

 

첫째, 감옥과 경찰서라는 공간의 이력에서 비롯되는 역사적 특별함

둘째, 고층 건물이 가득한 홍콩 도심 속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저층 구조와 탁 트인 녹지 공간

 

여기에 장소성과 맞물린 전시 프로그램 등은 MZ세대의 발걸음을 끌어당기는 주요한 흡인력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타이퀀은 단지 복합문화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기존 홍콩 내 예술 담론에서 벗어난 다른 궤적을 그리는 중이다. 과거 홍콩의 문화예술 개발 방식이 스타 건축가들과 손잡고 낡은 것을 허물고 완전히 새롭게 짓는 데 집중했다면 타이퀀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기존 건축을 철거하지 않고 그 자체를 보존하며 과거와 현재의 공존 가능성을 실험한 것이다.

 

타이퀀의 탄생 배경에는 문화예술 분야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홍콩 자키 클럽(Hong Kong Jockey Club, 香港賽馬會)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다. 홍콩의 문체부라 불리며 홍콩 문화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홍콩 자키 클럽(이하 자키 클럽)은 다른 이름으로 말하자면 홍콩마사회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경마 조직 중 하나다. 홍콩 내 경마와 복권, 스포츠 베팅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며 얻은 연간 수익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한다.

 

문화예술 분야도 그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데, 홍콩의 대표 축제인 홍콩아트페스티벌의 메인 스폰서이자 홍콩무대예술학교를 설립해 예술 인재 육성, 다양한 무대 공연장 건립 등 홍콩 내 문화예술계에 여러모로 이바지해 왔다. 자키 클럽은 단순히 홍콩이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게 아닌, 동서양의 문화가 절묘하게 융합된 곳으로 도시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띠길 원한다. 그렇기에 타이퀀 역시 그 연장선 속에서 역사가 살아있는 독특한 문화공간으로 세워지길 원했다. 

타이퀀 교도소 마당에 설치된 예술 작품에서 노는 아이들 모습 © 매일경제
<오픈 더 박스 2025 : 블룸 오브 라이트>에서 꽃을 새겨넣는 관객들 © Hong Kong Tourism Board

홍콩 역사를 그대로 품은 타이퀀

이처럼 타이퀀은 홍콩의 과거를 품고 있는 공간으로, 그 역사를 면면히 살펴보는 게 공간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타이퀀이 자리 잡은 곳은 할리우드 로드 10번지(10 Hollywood Road)인데 사실 미국의 LA 할리우드와는 무관하다. 이 도로명에 관해 가장 유력한 설은 영국군이 점령하던 당시 홍콩의 두 번째 총독이었던 존 프랜시스 데이비스 경(Sir John Francis Davis)이 자신의 가족 저택의 이름을 따와 이 도로를 명명했다는 설이다. 그만큼 할리우드 로드는 홍콩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거리로, 한때 선원과 상인들이 즐비하던 무역 중심지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에는 온갖 종류의 장신구와 골동품이 가득한 유서 깊은 거리였다. 그러다 최근에는 수많은 현대 예술 갤러리가 문을 열며 홍콩 현대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타이퀀과 더불어 이 거리의 주요 랜드마크는 19세기에 지어진 만모사로,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도교 사원이다. 참고로 만모사는 장국영이 자신의 화보집 <레슬리의 모든 것>(1999)을 찍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19세기 영국군이 홍콩을 점령하던 시절의 타이퀀은 영국군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만든 원스톱 사법 지구였다. 중앙경찰서, 중앙행정처, 빅토리아 교도소, 법원, 경찰과 치안 판사를 위한 주거 시설 등 총 16개의 사법 및 행정 건물이 이 부지에 모여 있었고 빅토리아 교도소에는 베트남 독립을 이끈 호찌민 전 국가주석도 수용됐었다. 그래서 오늘날 타이퀀에 방문하면 많게는 수십 명이 감금됐던 감옥을 실제로 볼 수 있으며 해당 공간에는 죄수들의 생활 방식을 묘사한 설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 교도소 마당에는 역사와 현재 속 시간의 흐름을 탐구하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 <웨이팅 파빌리온(Waiting Pavilions)>이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건축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타이퀀이 어떻게 역사성을 수용했는지를 아는 것은 이곳을 제대로 이해하게 만드는 또 다른 열쇠다.

 

<웨이팅 파빌리온>은 예술이 어떻게 역사와 호흡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파빌리온(Pavilion)은 특정 행사 및 전시를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되는 임시 구조물을 뜻한다. 폴란드 출신 설치 예술가 일리샤 크와데(Alicja Kwade)가 제작한 감옥 같은 임시 구조물은 교도소 마당 곳곳에 자리 잡은 채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 한계와 감금의 의미를 전달한다. 이 임시 구조물은 유리, 금속, 돌을 활용해 만들어져 관객은 구조물 내부에 들어가 외부와 내면 사이의 벽, 한계, 불투명한 연결을 감각할 수 있다. 특히 이 공간이 과거 실제 교도소였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관객은 자유와 속박 등 감금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며 작품을 통해 공간의 역사적·물리적 맥락을 떠올릴 수 있다. 이렇듯 타이퀀은 공간의 역사성과 현대 예술의 실험성을 융합하려는 시도를 자주 선보이는 데, 이는 관객에게 왜 하필 이 작품을 이 공간에서 봐야 하는지, 그 필수 불가결함을 충족시켜 준다.

2025년 8월 1일에서 10월 5일까지 진행되는 여름 전시 <언더커버 언더월드(Undercover Underworld)>도 흥미롭다. 총 여덟 편의 홍콩 영화를 통해 실제 도시에서 활동하던 잠복 경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프로젝트다. 잠복(언더커버)은 홍콩 영화계에서 빈번한 소재로 쓰이곤 했는데 이들이 처한 흑과 백, 그림자와 빛, 악과 정의 사이에서의 위태로운 외줄타기가 상당히 매력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실제 홍콩에 있던 잠복 경찰들의 삶을 조망하기에도 탁월하기 때문이다. 전시의 공동 큐레이터인 서니 찬(Sunny Chan)과 크리스토프 반 덴 트루스트(Kristof Van den Troost)는 영화 속 잠복 경찰들의 명장면을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으로 재현해 관객이 직접 체험하게끔 했다. 여기에 타이퀀이 과거 경찰서가 있었던 공간이란 점을 상기하면 이번 전시 또한 공간의 역사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해 꽤 창의적인 전시로 기획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타이퀀 전시회에 참여했던 비주얼·컨템퍼러리 아티스트 에녹 쳉(Enoch Cheng)은 이와 연관해 타이퀀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타이퀀은 1800년대부터 홍콩에 존재했기에 많은 변화를 목격했고 말할 수 있고 재해석할 수 있다. 사람들은 타이퀀의 그러한 역사성과 참신함에 이끌렸고 예술가로서 본인 또한 타이퀀의 그러한 특수성 안에서 작업했다. 이러한 타이퀀만의 독특한 특성이 관객들이 이곳을 다른 전시장과 다르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타이퀀 (구)교도소 마당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 © 매일경제
과거 감옥으로 사용된 공간에 설치된 작품, 과거 수용자의 삶을 상상한다 © designhouse

보존하는 개혁, 타이퀀만의 건축 언어

타이퀀은 그 설계 과정에서도 역사성을 철저히 보존하고 문화유산을 기억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췄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이자 홍콩 M+ 미술관을 설계한, 스위스 바젤에 본사를 둔 헤어초크·피에르 드 뫼롱 건축 사무소(Herzog & de Meuron)가 설계를 맡았는데 이들은 타이퀀 설계의 핵심 키워드를 “보존”이라 밝혔다. 일단 여러 건물 중 역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중앙 경찰서 단지는 총 세 차례의 콘셉트 검토 과정을 거쳤다. 가장 초기 디자인은 홍콩 건축을 상징하는 대나무 비계(飛階)에서 영감을 받아 건물의 모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비계 디자인으로 고안되었는데 추후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공중 볼륨을 특징으로 하는 두 번째 디자인으로 수정됐다. 

 

대나무 비계는 건물 외벽을 가로 세로로 감싸안은 대나무 구조물로 인부들이 자재와 장비를 올려 작업할 수 있도록 임시 발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 홍콩에는 비계 전문 직공이 별도로 있어 대나무에 나일론 노끈으로 스스로를 묶어 하나씩 타고 오르며 건물 외벽에 비계를 설치하는데 이는 마치 스파이더맨을 연상케 한다.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중국에서는 비계 설치를 금지해 세계적으로 대나무 비계를 건축 현장에 쓰는 곳은 홍콩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대나무 비계는 딤섬, 빨간 택시, 삼합회와 더불어 홍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홍콩을 배경으로 한 성룡 주연의 액션 영화 <러시아워2>에서는 대나무 비계가 액션 장면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헤어초크·피에르 드 뫼롱은 세 번째 디자인에서 이 부지의 증축 높이와 면적을 줄이는 방향으로 재설계했다. 이는 기존 건물의 변형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결과 하늘을 향해 끝없이 뻗은 홍콩의 고층 건물 속에서 보기 드문 저층 건물과 탁 트인 부지로 타이퀀이 도심 속 오아시스로 자리매김하게끔 했다. 보존 전문 건축가 퍼셀(Purcell)과 협력해 교도소 마당과 연병장 주변에 지어진 총 16개 역사적 건물을 보존하되 현대식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가능한 전통적인 건축 기법과 자재를 사용했으며 자재를 부득이하게 교체할 경우에는 그 비율을 최소화했다. 그 결과 타이퀀은 만들어진 지 170여 년이 흘렀지만 과거 중앙경찰서에 쓰였던 빨간 벽돌, 박공 지붕(책을 엎어놓은 모양의 지붕 양식) 모두 그대로이며 대부분의 부속 건물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00년도 된 옛 경찰 기숙사 건물이었던 PMQ는 현재 신진 작가들의 작업실 겸 아트숍으로 바뀌었다. 

헤어초크·피에르 드 뫼롱이 디자인한 타이퀀의 초기 콘셉트 안 © H&dM
<러시아워2>에 등장한 대나무 비계 © imdb

여기에 건축가는 두 채의 현대식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 하나는 JC 컨템포러리(JC Contemporary)로 현대 미술관이고 다른 하나는 JC 큐브(JC Cube)로 공연, 영화, 행사 등을 위한 200석 규모의 큐브형 강당이다. 두 건물은 모두 이 프로젝트를 위해 특수하게 공정된 알루미늄 벽돌로 마감되어 있는데 이는 기존 건물의 화강암 요소를 참고해 만들었다고 한다. 알루미늄 벽돌은 과거와 현대가 절묘하게 융합된 타이퀀의 정체성을 시각화한다. JC 컨템포러리는 빅토리아 교도소 옆에 지어졌는데 주로 현대 예술의 실험적인 전시가 많이 열리는 곳으로, 영화 <중경삼림>에 나오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이곳과 연결돼 있어 영화 팬들이 많이 방문한다. 

 

전시는 주로 건물 1층과 3층에서 열리고 2층에는 아티스트 북 라이브러리가 자리해 있다. 전시의 기획 방향은 예술의 실험성을 드러내는 것과 더불어 타이퀀이 품은 역사와 유적지로서의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든 사유하고 반응하는 예술가들과의 협업이다. 아티스트 북 라이브러리에는 아시아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서적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책의 개념, 내용, 형식에 도전하는 전시를 기획한다. 연례행사인 홍콩 아트 북 페어(BOOKED: Hong Kong Art Book Fair)도 개최하는데 가지각색의 출판사, 서점, 작가들을 초청해 강연, 라이브 이벤트, 전시, 워크숍 등 다양한 프로그램 제공한다. 건물 중앙에는 이 미술관의 상징인 나선형 계단 Mind Your Step이 설치돼 있다. 이곳은 미술관을 방문한 수많은 관객이 꼭 인증샷을 남기는 핫한 포토존이기도 하다. 또 JC 컨템포러리가 위치한 교도소 마당 쪽의 반대편으로 가면 JC 큐브가 있다. JC 큐브는 약 102㎡의 크기의 강당이자 다목적 공간으로, 최대 관객석이 205석인데 다양한 퍼포먼스와 상영이 이뤄진다.

 

헤어초크·피에르 드 뫼롱의 일차적 목표는 옛 사법 지구를 문화유산 및 예술 센터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탈바꿈이 아닌 보존이었다. 이는 설계 당시 홍콩과 중국 내에 자리 잡고 있던 기존의 건축이란 관념을 뒤엎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때 트렌드는 오래된 건물은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는 일이 흔했다. 건축가들은 이러한 방식이 타불라 라사(Tabula Rasa)임을 언급한다.

 

타불라 라사는 라틴어로 깨끗한 석판을 뜻하며 일종의 백지상태를 말한다. 건축에서 모더니즘 사조와 개념의 궤를 함께하며 오래된 것들은 낡고 초라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깨끗하게 청소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매일 사용하는 것들은 창의적으로 재활용하는 대신 무심코 버리는 게 그간 건축의 모더니즘이자 타불라 라사였다. 이 사조 속에서 1970년대부터 건축 작업을 시작한 이들은 이전과는 다른 건축 언어를 찾고자 기존의 세계에 반하는 것이 아닌 함께하는 방식을 찾고자 했다. 그 노력 속에서 그들은 새로움이 아닌 기존 세계에 철저히 발판을 디디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돌망태를 그대로 건물 외벽에 활용한 도미너스 포도주 양조장부터 오래된 화력 발전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테이트 모던에 이르기까지 예상치 못한 혁신적인 결과를 도출했으며, 이는 타이퀀에서도 이어졌다. 2018년 우리나라 도산대로에 송은문화재단 신사옥 ST송은빌딩을 설계한 이들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설계의 해답을 늘 현지에서 얻는다고 밝혔다. “설계의 해답은 주로 건물이 지어질 지역의 문화를 공부하고 함께 협업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세계에서 일하며 얻은 결론은 현지 사람들과 협력할수록 건축이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거주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도시를 보고 경험하려 해왔다.”

알루미늄 파사드를 이루고 있는 JC 컨템포러리의 외관 © H&dM
JC 컨템포러리 미술관의 상징 나선형 계단 "Mind Your Step" © designhouse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공간

이 외에도 타이퀀에는 홍콩의 핫한 레스토랑과 바, 서점 등이 입점해 있어 방문객의 발길을 끈다. 아르누보 컨셉의 칵테일바 드래곤플라이(Dragonfly)는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 애슐리 서튼(Ashley Sutton)이 만든 곳으로 잠자리를 모티브로 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특징이다. 교도소였던 공간의 콘셉트를 살린 디스펜서리는(The Dispensary) 벽에 작은 글씨가 적힌 비하인드 바스(behind bars)가 인상적이며 교도소 독방에서 바텐더가 술을 내준다. 독일의 세계적인 예술 서적 전문 출판사 타센(TASCHEN)도 입점해 있다. 

 

또한 타이퀀에서는 지역 커뮤니티와의 접점을 모색하는 다양한 페스티벌도 열린다. 2019년에는 홍콩의 대표 예술 축제인 아트 페스티벌의 공식 무대로 활용되었으며 축제 공식 프로그램으로 예술가 워크숍과 댄스 배틀 등이 열렸다. 올해 5월에는 타이퀀 개관 7주년을 기념해 타이퀀 곳곳에서 피클볼, 보드게임 등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타이퀀 게임보드 프로그램이 열리기도 했다. 시민들은 사람 크기의 커넥트 포(직사각형 판을 위로 세워 말을 떨어트려 가로, 세로, 혹은 대각선 4개를 만들면 이기는 보드게임), 거대한 틱택톡(삼목 게임), 젠가 등을 즐겼고, 모든 세대가 어우러져 놀고 웃으며 타이퀀의 생일을 기념했다. 

 

지금은 JC 컨템포러리에서 일본 출신의 신지 오마키(Shinji Ohmaki)가 기획한 프로젝트 <오픈 더 박스 2025 : 블룸 오브 라이트>가 진행 중인데 관객이 꽃 모양의 패턴을 예술 작품에 직접 새겨 넣어 전시를 완성하는 식의 관객 주도형 전시이다. 참고로 매년 여름마다 진행되는 이 오픈 더 박스 프로그램은 지역 사회와 미술(관)이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일반적으로 미술관 내 화이트 큐브는 큐레이터와 예술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는데 오픈 더 박스는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껴 주체 안에 관객 그리고 지역 사회가 참여해 함께 만드는 공동 작품을 추구한다. 그 외에도 빅토리아 교도소, 중앙경찰관 등 유적지 투어 가이드를 운영하며 이 모두를 문화 예술과 결합한 재밌는 시도들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게 난간 DIY 워크숍으로, 과거 병영시설이었던 건물에서 참여자가 직접 자신의 미니 난간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이처럼 타이퀀에서는 세대 구분 없이 모두가 참여할 수 있고 지역 커뮤니티를 향해 손을 뻗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페스티벌이 운영되고 있다. 

타이퀀에 입점해 있는 칵테일바 드래곤플라이 인테리어 내부 © Hong Kong Tourism Board
과거 병영으로 쓰였던 건물의 난간 기둥을 만드는 워크숍에 참여 중인 관람객 © TAI KWUN

그렇다면 내일의 타이퀀은 어떤 비전을 꿈꾸고 있을까? 2023년 타이퀀에서 패트리샤 파치니니 개인전을 기획한 큐레이터 토비어스 베르거(Tobias Berger)가 동아일보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한국에서 오랫동안 좋은 전시를 선보인 아트선재센터처럼 되는 것이 타이쿤의 목표라 한다. 그는 문화적으로 지켜봐야 할 차세대 도시가 서울이라 답하며, 한국에서는 대안공간 루프를 비롯한 비영리 공간에 대한 지원이 오래전부터 활발하게 이어졌고 공간 중심인 홍콩보다 한국이 더 시스템을 잘 만들어 가고 있다고 답했다. 다만 한국과 일본에는 미술 관련 여러 기관이 있으나 자국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홍콩의 (미술) 기관들은 향후 아시아 내 여러 지역과 연결하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타이퀀은 역사적 뿌리를 단단히 내린 채 설계된 유무형 공간인 만큼 그 비전은 예술, 문화, 유산을 통해 지역 사회에 영감을 불어넣는 일과 맞닿아 있다. 지역 사회 청소년에게는 필요한 (예술적) 기술과 발전 기회를 제공하고 역사적 유적지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예술 유산 센터로 탈바꿈시키는 게 목표라고. 그 공을 인정받아 2019년 타이쿤은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보존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홍콩을 대표하는 유적지이자 역사를 품은 미술관으로서 타이퀀의 여정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