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박람회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Milan Design Week)가 2023년 4월 18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됐다. 도시 전체를 거대하고 떠들썩한 전시장이자 축제의 장으로 만드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는 디자인 분야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전 세계 디자이너와 브랜드의 가장 급진적이고 창의적인 전시를 만나볼 수 있다. 유명한 산업 관계자들뿐 아니라 젊은 디자인학도들과 브랜드 운영자들, 심지어 동네 주민들까지도 밀라노 곳곳에서 펼쳐지는 각종 전시, 행사, 공연에 참여한다. 그만큼 규모도 상당하다. 특히 2023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작년 대비 더욱 커진 규모를 각종 수치로 증명했다.

 

숫자로 보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2023

  – 총 6일간 전 세계 181국 307,418명 방문 (2022년 대비 15% 증가)

  – 이탈리아 국적이 아닌 바이어와 관련 산업 종사자의 비율 65%

  – 공식 인증을 받은 취재 기자 5,400명 중 47%는 외국 출신

 

이렇듯 전 세계의 이목을 끈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가장 큰 매력은 박람회장을 벗어나 도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하고 실험적인 전시다. 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가 로 피에라(Rho Fiera) 박람회장에서 열리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메인 전시라면, 푸오리살로네(Fuorisalone)는 밀라노 도처의 디자인 지구에서 열리는 장외 전시다.

캔버스가 된 도시, 밀라노 Ⓒ Salone del Mobile

지속가능한 미래 연구소: 푸오리살로네

푸오리살로네는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행사라는 점에서 더욱더 특별하다. 1980년대 초반 가구와 산업 디자인 밀집 지역에 있던 브랜드와 기업들은 살로네 델 모빌레가 열리는 기간에 자발적으로 전시를 선보였다. 이후 매년 푸오리살로네에 참여하는 지역 쇼룸과 브랜드가 점점 더 늘어났고, 분야 역시 예술, 패션, IT, 음식 등 더욱더 다양해졌다. 덕분에 현재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도시 전체의 축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푸오리살로네는 각 지역의 역사와 개성을 품은 장소에 디자이너와 브랜드의 예술적 색채가 덧입혀진 개성 넘치고 실험적인 전시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2023년에는 푸오리살로네에서 총 953개의 전시가 열렸다. 브레라 국립 미술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패션과 디자인 쇼룸이 모인 브레라(Brera) 지역, 오래된 공장의 특색을 활용한 실험적인 전시가 열리는 토르토나(Tortona) 지역 외에도 5VIE 아트&디자인(5VIE Art+Design), 벤투라 첸트랄레(Ventura Centrale), 람브라테(Lambrate), 포르타 베네치아(Porta Venezia), 이솔라(Isola) 등 다양한 디자인 지구에서 푸오리살로네의 열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2023년 푸오리살로네의 큰 주제는 미래 연구소(Laboratorio Futuro)였다. 해당 주제는 기후변화, 에너지 위기, 전쟁 등 수많은 문제에 맞닥뜨린 현 상황에서 디자인이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그 개념 아래 지속가능한 디자인, 순환 경제, 재료 혁신, 도시 재생, 인공 지능을 세부 키워드로 지정하고 미래를 향한 상상을 디자인으로 마음껏 풀어내는 다양한 전시가 밀라노 디자인 지구 도처에서 열렸다.

 

푸오리살로네에는 매년 전 세계 수많은 디자이너와 브랜드, 기업이 참여해 독자적인 최신 기술과 디자인을 고유한 스토리를 담은 전시와 함께 선보인다. 이번 2023 푸오리살로네에서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의 <공예의 변주(Shift Craft)>, 기아의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 LG의 <특별한 인생(A Life Extraordinary)>, 노루그룹의 <미라지(MIRAGE, 신기루)> 등 한국 기업들의 전시가 큰 주목을 받았다.

 

앞서 언급한 전시들은 뛰어난 기술력,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고민, 브랜드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전시로 녹여내 하나의 통합적인 경험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관람객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올해 푸오리살로네의 주제인 미래 연구소가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여한 한국 기업과 브랜드의 철학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변주되었는지 한번 살펴볼 만하다.

푸오리살로네가 열리는 밀라노 길거리의 풍경 Ⓒ Fuorisalone
밀라노 디자인 위크 중 푸오리살로네가 열리는 지역들 Ⓒ Fuorisalone

한국 공예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공예의 변주(Shift Craft)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이 주관하는 한국 공예전은 참여 횟수가 벌써 열한 번째에 이를 만큼 밀라노 디자인 위크와 긴 시간을 함께했다. 한국 공예전은 공예라는 가장 오래된 예술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다채로운 이야기를 여러 한국 공예가의 목소리로 풀어내며 푸오리살로네의 주요 전시로 매번 언급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다. 2023년 푸오리살로네에서 선보인 전시<공예의 변주(Shift Craft)>는 구병준 PPS 대표가 총감독을 맡았고 총 2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는 다양한 디자인 소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브레라 지구에서 열렸다.

 

<공예의 변주>는 한국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기법을 담은 도자기, 금속, 목재, 유리, 자개, 칠기, 낙화장 등 다양한 전통 공예 기법이 현대 예술로 이어지는 여정을 그려냈다. 전시에는 윤광조, 황갑순, 김윤관, 정정훈, 김영조 등 한국 대표 작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전통 공예 기법의 정점에 새로운 해석과 변주의 매력을 덧붙인 매력적인 작품을 소개했다.

 

더불어 한국 공예가 오랜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통 예술의 지속가능성과 새로운 물질의 혁신을 선보이며 그려온 변곡점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더욱더 의미 있었다. 푸오리살로네는 특집 기사에서 “전통과 현대의 조화, 다채로운 변주에서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보았다”라며 <공예의 변주>가 보여준 가치를 언급했다.

사람, 그리고 환경을 이롭게: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

KIA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기아는 아트갤러리 라 페르마넨테(Museo della Permanente)에서 단독 전시 <오퍼짓 유나이티드(OPPOSITES UNITED)>를 선보였다. 오퍼짓 유나이티드는 2021년에 출시된 기아 최초의 전용 전기차 EV6부터 모든 신차에 적용된 브랜드 디자인 철학이다. 그 가치관에는 인간을 위한 모빌리티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혁신적인 기술과 디자인을 통해 추구해 나가겠다는 기업의 목표가 담겨있다. 그러한 브랜드 디자인 가치를 미디어 아트로 표현한 전시 <오퍼짓 유나이티드>는 2023년 푸오리살로네 어워드(Fuorisalone Award)의 후보작으로 올랐으며, 기술(Technology) 분야 심사위원 특별 언급상을 받기도 했다.

 

<오퍼짓 유나이티드>는 그 이름처럼 상반된 개념이 창의적으로 융합된 세계관을 보여줬다. 전시에서는 삶을 위한 기술, 자연과 조화되는 대담함, 이유 있는 즐거운 경험, 미래를 향한 혁신적 시도, 평온 속의 긴장감 등 총 다섯 가지의 하위 주제를 담아낸 몰입형 미디어아트 작품을 총 일곱 개의 공간에서 선보였다.

 

전시 기간에는 <오퍼짓 유나이티드>의 주제를 다루는 대담과 포럼, 네트워크 파티가 이어졌다. 기아 글로벌 디자인센터장 카림 하비브 부사장을 포함한 디자인 담당 임원들, 디자인 평론가 앨리스 로손, 철학가 에마누엘레 코치아 등이 연사로 나서 브랜드 철학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한편, 관람객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이어갔다.

 

<오퍼짓 유나이티드>는 인간이 그를 둘러싼 다양한 물질과 생태계와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과 관계에 주목하고, 기술과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는 브랜드의 가치를 담아낸 전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푸오리살로네 어워드의 심사위원은 “<오퍼짓 유나이티드>는 최신 기술의 적용과 단순히 미적인 영역을 넘어 더 깊은 의미와 가치를 끌어내며, 새롭고 혁신적인 비전을 보여주었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예술이 된 가전, 예술이 된 삶: 특별한 인생(A Life Extraordinary)

LG전자 X 모오이(Moooi)

LG전자는 올해 푸오리살로네에서 네덜란드의 유명한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모오이(Moooi)와의 협업 전시를 선보였다. 포르타 베네치아 디자인 지구에서 열린 전시 <특별한 인생(A Life Extraordinary)>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바꾸는 디자인과 삶을 한층 편하게 만들어 주는 뛰어난 기술력의 조합을 보여주며 큰 주목을 받았다. 특별히 이 전시는 감각을 극대화하는 뛰어난 몰입 경험을 만들어 낸 전시에 주는 푸오리살로네 어워드 인터랙션(Interaction) 분야 심사위원 특별 언급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특별한 인생>에서는 동물과 자연의 다양성이 녹아든 모오이만의 독특한 디자인과 컬러 패턴이 담긴 다양한 가구와 조명을 편안하게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장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 LG 올레드 오브제컬렉션(Objet Collection) 포제(Posé)와 이젤(Easel), LG 스탠바이미(StanbyMe), LG 엑스붐(XBOOM) 360 스피커, LG 퓨리케어 에어로퍼니처 등 다양한 가전제품이 어우러져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미래지향적 홈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이처럼 <특별한 인생>은 예술과 삶의 분리가 아닌, 삶이 그 자체로 예술이자 디자인, 그리고 기술이 되는 브랜드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LG전자는 지난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도 기능을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된 가전제품의 가능성을 선보인 바 있다. 올해는 네덜란드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와의 콜라보를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각종 유럽 매체의 이목을 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특별한 인생이라는 전시의 제목처럼 감각적인 디자인을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으로 치환하며 관객들의 큰 호응을 끌어냈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열린 <특별한 인생>은 전시관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VR 전시로 확인할 수 있다.

<특별한 인생(A Life Extraordinary)>에 전시된 LG 올레드 TV Ⓒ Fuorisalone
<미라지(MIRAGE)> 메인 스페이스 전시장 모습 Ⓒ NMDS

다채로운 희망의 신기루: MIRAGE

노루그룹 X UAU Project

노루그룹은 다양한 아트 콜라보를 선보이며 감각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색채의 미학을 선보여 왔다. 올해 노루그룹이 푸오리살로네에서 선보인 전시<미라지(MIRAGE, 신기루)>는 3D 프린팅 아트 전문 폴란드 디자인 스튜디오 UAU 프로젝트(UAU Project)와의 콜라보 작업이다. <미라지>는 48가지의 2023 글로벌 트렌드 컬러를 오감으로 경험하고 즐기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려졌다. 특별히 푸오리살로네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역사가 깊은 토르토나 지역에서 열려 전 세계의 수많은 관람객과 만날 수 있었다.

 

<미라지>는 총 두 개의 파트로 각기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한밤중 숲의 모습을 담아낸 다크 포레스트(Dark Forest)를 지나면 신기루의 모습을 담아낸 메인 스페이스가 펼쳐졌다. 색채, 빛, 소리로 가득한 전시장은 사막에서 나타난 신기루처럼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잠시나마 오아시스와 같은 휴식을 주는 공간처럼 꾸려졌다. 작품에 사용된 색은 유연성(Flexibility)을 키워드로 팬데믹 이후 새로운 미래를 향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선정된 올해의 트렌드 컬러이다.

 

노루그룹은 지난 2019년, 국내 페인트 업계 최초로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진출하며 이광호 작가와의 협업인 <조류(TIDE)>라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큰 주목을 받았던 <조류>는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최대 디자인 경연 대회인 2020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노루그룹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아티스트들과의 다양한 협업, 자연을 소재로 색상을 통해 감각을 열어가는 경험을 끌어내며 공간 디자인의 미래를 조망해 나가고 있다.

전 세계의 축제이기도 한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매년 그 규모를 늘려가며 점점 더 다양한 분야와 주제를 다루는 중이다. 그중 자생적으로 각 디자인 지구에서 생겨나 가장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주제를 탐구하는 푸오리살로네의 전시는 미래의 디자인을 향한 인사이트를 불어넣는 가장 강력한 촉진제의 역할을 한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라는 거대하고 치열한 디자인의 각축장에서 한국 기업이 보여주는 저력은 실로 대단하다. 글로벌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동시에 추구하는 가치를 가장 새롭고 특별한 디자인과 경험으로 끌어내는 한국 기업들의 도전은 푸오리살로네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다음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한국 브랜드와 기업,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보여줄 더욱더 다양하고 깊은 작품 세계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