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인생길 위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사람의 삶은 변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고, 사람과 사물의 관계가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인연이라고 부른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인연은 사람이 사람 혹은 사물과 맺는 관계를 뜻하기도 하며, 때로는 일이 벌어지게 된 내력이나 이유를 뜻하기도 한다. 어떤 뜻이 되었건, 인연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사람이 누구(때로는 무엇)를 만나느냐에 따라 상황이 바뀐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공간 또한 그렇다. 공간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쓰임새와 성격이 달라진다. 대부분의 공간은 사람에 의해 그 쓰임새가 정해지기 때문에 건축가나 공간을 기획하는 기획자가 그 공간을 어떻게 쓰겠다고 규정할 때 비로소 그 공간의 정체성이 정해진다. 여기 더해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또 다른 한 요소가 있다면 바로 시대다.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공간이 다른 모습으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랜드마크 격의 건물을 한 번 지으면 자연재해나 사고 또는 심각한 노후화에 의한 철거가 아닌 이상 쉽게 부수기 어렵다. 그 공간이 지녔던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건물 안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에는 정말 다이나믹한 이야기를 지닌 건축물과 공간이 많다. 바로 세계 2차대전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시설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군사적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 도시마다 여럿 존재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건물은 남았다. 어떤 곳에는 아픔이 있고 어떤 곳에는 나치의 치밀함과 잔혹함이 남아 있다. 도시를 계획하고 사회에 필요한 건물을 짓는 일이 게임처럼 리셋 버튼을 누르고 처음부터 다시 세울 수 없는 일이기에, 그대로 잔존하는 건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치 당시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에는 더욱 그랬다. 오늘 소개할 베를린의 잠룽 보로스(Sammlung Boros) 또한 2차 대전 당시 벙커로 사용되던 장소가 서너 차례의 변신을 거쳐 지금의 미술관으로 변모한 경우다.

잠룽 보로스의 어제: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잠룽 보로스는 1941년 나치의 벙커로 지어졌다. 본래 이름은 Reichsbahn Bunker(라이히스반 벙커)이며 해석하자면 국영 철도 벙커라는 의미다. 건설 당시 기차역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잠룽 보로스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지상 벙커(방공호)라는 점에 있다. 벙커라 함은 보통 적군의 미사일이나 폭탄 등을 피하기 위해 지하에 짓기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지상에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다. 지상 벙커치고는 대규모라 할 수 있는데, 총 5개 층에 120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이 있을 때는 13,000명까지 대피했다고도 한다.

남아있는 벙커로서의 모습 Ⓒ guideforberlin

전쟁이 끝나고 베를린 내에서 서독과 동독 진영으로 땅이 나뉠 때, 이 벙커는 소련 쪽에 속하게 되었고 당시 소련군이 생포한 전쟁포로들의 수용시설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잠깐 직물 창고로 사용되다가 1957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서독과 동독이 통일하기 전까지는 동독 정부에서 쿠바 등에서 수입한 열대 과일들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 벙커는 1992년 Bunker라는 이름의 대형 클럽으로 변신했다. 당시 일렉트로 뮤직의 주류였던 테크노 장르가 확산될 때 이 클럽이 허브 역할을 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동시에 가장 하드코어했던 클럽으로도 평가받고 있는데, 다양한 판타지나 페티시 파티가 열려 당시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화제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워낙 넓은 공간을 보유한 까닭에 여러 종류의 파티나 성과 관련된 박람회가 열리는 단골 장소이기도 했다.

남아있는 벙커로서의 모습 Ⓒ Boros Collection

잠룽 보로스의 오늘: 현대미술의 집

Sammlung Boros를 영어로 해석하면 Boros Collection이다. 보로스의 컬렉션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여기서 보로스는 사람의 이름이다. 2003년 광고회사를 운영하는 크리스찬 보로스와 그의 부인인 캐런 보로스가 이 벙커를 구입하여 수년간의 공간기획과 리모델링 과정을 거친 뒤 2008년에 이르러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보로스 부부는 한 때 세계 100대 미술 컬렉터로 선정될 만큼 잘 알려진 미술품 수집가다. 그들은 오랜 기간 수집한 유명 작품의 전시는 물론 신진 현대 미술 작가들의 전시장으로서 이 공간을 재탄생시켰다.

 

공간의 재탄생 과정에는 유명 글로벌 건축회사 CMK의 공동대표 중 한 명인 Jen Capser가 참여하기도 했다. CMK는 더현대 서울의 1층 전체와 현대백화점 목동점의 실내 정원을 디자인해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건축설계 회사다. 이전의 공간은 본래 벙커로 디자인되었던 까닭에 여러 방이 분리되어 있었고 공간의 연속성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보로스 부부가 건물을 리모델링하며 전시의 스토리텔링과 연속성을 위해 전체 공간이 상호연계가 가능하도록 재배치했다. 그러면서도 벙커의 특성을 살려 공간과 공간 사이의 독립성은 확보했으며 이전 건물에 있었던 감옥, 창고, 그리고 클럽의 정체성을 최대한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 공간은 지나온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팔색조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Cyprien Gaillard, Lesser Koa Moorhen, 2023 Ⓒ Boros Collection

잠룽 보로스의 컬렉션은 조각, 사진, 회화 등 현대 미술을 총망라한다. 최근 현대 미술의 트렌드를 꿰뚫고 있기에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독일을 방문했을 때 꼭 거쳐야 하는 장소로도 꼽힌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터너상을 수상한 독일의 사진가 볼프강 틸만스, 마찬가지로 터너상을 받은 영국의 뉴미디어 예술가 마크 레키, 중국의 반체제 설치 예술가 아이웨이웨이, 덴마크의 설치 예술가 올라퍼 엘리아슨 등 현대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잠룽 보로스를 통해 소개되었다.

 

전시의 구성은 일정 기간마다 바뀌는 체제다. 그런데 그 주기가 굉장히 길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보통의 미술관들은 길어봤자 몇 달을 주기로 전시를 기획한다. 하지만 잠룽 보로스는 4년 정도 주기로 전시를 진행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전시의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 소소한 변화를 준다. 2008년부터 2012년을 1기, 2012년부터 2016년을 2기, 2017년부터 2021년을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현재는 4기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지금은 독일의 퍼포먼스 작가이자 57회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안네 임호프, 쿤스트할레 바젤, 뉴욕 휘트니 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닉 모스 등의 작품이 새로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잠룽 보로스는 개관 후 4년 만에 누적 관람객 10만 명을 돌파했으며, 2021년까지 54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언뜻 듣기에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관람이 가이드 투어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잠룽 보로스는 쾌적하고 여유 있는 관람을 위해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총 9개 타임으로 나누어 영어 및 독일어 가이드 투어를 진행한다. 한 타임당 12명의 제한된 인원만 관람이 가능하기에 일일 최대 방문객은 108명으로 제한된다. 관람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해야 하는데 비수기에는 보통 한 달, 성수기에는 두 달 전에 예약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보로스 부부는 잠룽 보로스를 구상하며 이 공간을 단지 자신의 컬렉션을 통해 예술계의 명망을 얻거나 지위를 자랑하려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현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우선의 가치로 여긴다. 그 때문에 유명한 교수나 큐레이터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부부가 직접 자기 팀과 함께 그 공간을 구성한다.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꺼내오기도 하고 때로는 최근 이슈가 된 작가들의 새 작품을 요청하기도 한다. 미술을 사랑하는 부부가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 공간인 셈이다. 보로스 부부는 잠룽 보로스의 맨 위층인 펜트하우스에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공간을 각별하게 생각하며 실제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교류 장소로 사용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크리스천 & 캐런 보로스 Ⓒ Boros Collection

잠룽 보로스는 불과 5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여러 번의 변신을 거쳤다. 나치 정권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벙커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라도 가고 싶어 하는 현대 미술계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샤넬은 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개막을 축하하는 후원 만찬을 잠룽 보로스에서 열었다. 그만큼 잠룽 보로스는 이미 베를린에서 문화예술계의 인정을 받는 장소가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공간에도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의 대상은 시대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인연을 품은 공간일수록 담아내는 이야기의 폭과 깊이가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담아내는 이야기가 많아질 때 공간의 특별함과 매력은 배가 된다. 잠룽 보로스 또한 그저 평범한 미술관이 아닌, 시대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매력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