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예술의 동시대성(contemporary)은 어느 시대에 들어도 흥미롭다. 동시대성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생산하는 복잡한 담론 때문이다. 단일한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다중성을 통해 의미를 확장하는 동시대성이란 개념은 현대 미술과 관련해 여러 모순된 입장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동시대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역사적 논란이 아닌, 2000년대 이후부터 현대 예술을 동시대적인 것으로 통합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과 관련된다.

 

도널드 커스핏(Donald Kuspit)은 현대 예술을 조각이 맞지 않는 퍼즐로 정의하면서 단일한 이론으로 수렴되지 않음을 지적했다. 미술사학자인 테리 스미스(Terry Smith)는 동시대 예술을 즉각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미술 비평가인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와 유사하게 모더니즘과는 단절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태동한 예술들은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난 예술이라는 점에서 이론적 모델이 정확했던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예술들은 이론 자체가 결여되어가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론적 결여의 원인을 총체화된 신자유주의라고 지목하면서 논의가 가속화되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비엔날레의 확산이 있다.

 

동시대성은 바로, 지금, 여기라는 의미로, 인간에게 즉각적으로 인식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자신(도시 혹은 국가)의 예술을 동시대적인 것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1990년대부터 확산된 신생 비엔날레의 유치는 국제적인 동시대성의 흐름에 포함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따라서 이러한 비엔날레의 확장 뒤에는 지역의 특수한 예술성을 소거시킨 채 예술의 트렌드만을 따라가게 만든다는 비판과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globalization)에 일조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독일 출신의 예술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전 지구화적 동시대 예술을 조망하려는 비엔날레가 일종의 조세 피난처의 역할을 수행한다며 이것을 치외법권의 미술관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미술가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 또한 비엔날레 전시가 시장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2015년 <All the World’s Future>라는 제목의 56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를 맡은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는 해당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비엔날레를 초국가적 예술적 교류의 장으로서 탈식민지주의적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역설하며 비엔날레를 옹호하기도 했다.

 

비엔날레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비엔날레 자체의 모순된 정체성에서 기인한다. 즉 비엔날레는 특정 지역의 예술을 전 지구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형식이지만, 형식을 채우는 내용을 트렌디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전지구화를 비판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엔날레가 각 지역의 특수성을 지운 채 하나의 트렌드를 지향하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세계화에 기여한다는 비판적 인식은 비엔날레의 필수불가결한 문제점일까?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비엔날레가 어떤 주제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Uffe Isolotto, We Walked the Earth, Pavilion of Denmark, Biennale Arte, 2022 Ⓒ Ugo Carmine

베니스 비엔날레(La Biennale Di Venezia)
: 트렌드와 독자성의 교차적 장소

앞서 언급한 베니스 비엔날레를 먼저 살펴보자. 2022년 4월 23일부터 시작해 11월 27일까지 열리는 59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제목은 여성 화가 리어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의 동화책 제목에서 따온 <꿈의 우유(The Milk of Dreams)>다.

 

총감독을 맡은 세실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는 약자와 잡종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힌 바 있는데, 실제로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소수자를 다룬 작품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참여 작가 213명 중 여성 작가가 188명으로 90%에 육박했고, 여성을 포함한 다양한 소수자를 통해 비엔날레의 주제를 보다 구체화했다. 한국의 참여 작가인 정금영과 이미래 또한 여성으로서의 소수자성에 집중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미래는 비체적 형상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작가로서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와 정확히 부합하는 작업을 전시했다.

 

실제로 베니스 비엔날레는 예술의 전 세계적 트렌드(Political Correctness)를 단선적으로 재현하는 듯 보인다. 사회적 책무에 의해 미학적 기쁨을 포기한다는 비판은 단순히 PC주의에 대한 히스테리적 반발감보다는, 다양한 작품의 주제를 전시해서 다층적인 실질 예술의 동시대성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비판인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곧장 지역의 특수성을 소거한다는 근거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지역의 특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의 교차적 장소 또한 전시의 중요한 축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국가관(National Pavilion) 체제를 운영하는데, 유럽관은 올해 Smi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관을 운영했다. Smi는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의 이름으로, 이들의 전통을 모티브로 삼았다. 광주비엔날레재단 또한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의 소설인 『소년이 온다』 6절의 소제목인 “꽃 핀 쪽으로”라는 이름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을 미학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를 열었다.

휘트니 비엔날레(The Whitney Biennial)
: 과거를 통한 동시대성

2022년 4월 6일에 개막해 9월 5일까지 개최된 제80회 휘트니 비엔날레의 전시 주제는 <Quiet as it’s kept(숨죽인 채로)>이다. 토니 모리슨(Tony Morrison)의 소설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s)』의 첫 문장을 인용한 “Quiet as it’s Kept”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 인종차별 등과 같이 말 그대로 숨죽인 채 존재해 온 것들을 전면화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적 존재를 미학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다.

 

휘트니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애드리안 에드워즈(Adrienne Edwards)와 데이비드 브레슬린(David Breslin)이 주축이 되어 기획했는데, 이들은 뉴욕을 벗어나 활동했던 기억을 상기하면서 멕시코와 텍사스 국경에서 활동하거나 섬나라 출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선정했다. 일반적으로 비엔날레는 동시대 예술을 밝히기 위해 신진 작가들을 주축으로 하는 반면, 휘트니 비엔날레는 신진 작가뿐 아니라 원로작가 혹은 작고한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전시하면서 과거 미술과 현대 미술의 관계를 밝힌다. 중견작가인 릭 로웨(Rick Lowe)와 찰스 레이(Charles Ray) 등이 참여 작가로 포함되면서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매개되어 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현대 예술이 과거와는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통념적인 인식과 비엔날레가 동시대성을 밝히기 위한 경쟁 구도 속에서 다층적인 예술을 다양성(혹은 PC)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한다는 비판적 인식과는 달리, 휘트니 비엔날레는 다양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과거와 현재 예술의 관계적인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회화뿐 아니라 설치, 조각, 페인팅, 미디어, 키네틱 아트 같은 다양한 시각 예술의 스펙트럼을 전시함으로써 과거 예술의 핵심이었던 회화가 어떻게 현대 속에서 변주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런던 디자인 비엔날레(London Design Biennale)
: 미래를 통한 동시대성

2021년 6월 팬데믹의 한 가운데서 열린 런던디자인비엔날레(이하 LDB)는 서머싯 하우스(Somerset House)에서 <공명(resonance)>이라는 주제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디자인”에 대한 질문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무대 디자이너이자 LDB 아트 디렉터를 맡은 에스 데블린(Es Devlin)은 변화를 위한 숲(Forest For Change)이라는 이름의 전시 장소를 일종의 무대처럼 구성하면서 나무를 심고, UN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17개의 목표를 적은 17개의 기둥을 세웠다.

 

지속가능성과 환경보호라는 주제는 다소 진부한 주제라고 인식될 수도 있지만, 이 진부한 주제에 대해 디자인이 어떻게 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디자이너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러 디자이너에게 대답을 요구한 런던 디자인 비엔날레의 물음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망하는 휘트니 비엔날레와 유사하게 현재를 통해 미래를 조망한다.

 

판매를 위해 만들어진 디자인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즉 자본의 논리로 포섭되지 않는 예술적 디자인이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도 이해되는 LDB의 주제 의식은 단순히 산업과 예술의 이분법적 경계를 설정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 아니다. 2021년 7월부터 플라스틱 식기를 금지한 유럽의 결정에 대해 LDB는 플라스틱 식기가 언젠가는 고고학적 유물이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에 착안해 플라스틱 식기를 전시 중인 독일, 석유 이후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아보카도 씨앗 기획 등 미래와 공존할 수 있는 현재 상황을 제시한다. 산업의 형식을 통해 예술의 내용을 표현하는 LDB의 기획은 진부한 주제 속에서도 언제든 새로운 대답이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이치 트리엔날레(あいちトリエンナーレ)
: 검열과 (부)자유

2019 아이치 트리엔날레(あいちトリエンナーレ)는 한국에서 <평화의 소녀상> 철거 사건을 둘러싼 논란으로 이슈화되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소녀상 철거를 강제한 일본이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제국주의적 인식을 유지하고 그것을 공고히 하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일본 내부에서는 더욱 복잡한 담론이 형성되었다.

 

일본에서는 해당 사건을 일부 우익의 제국주의적 인식에서 태동한 문제라기보다는, 예술의 검열 문제를 전면화하는 사건으로 초점화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놓인 전시회의 제목이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인 점을 상기해본다면, <평화의 소녀상> 철거 사건은 단순히 제국주의적 인식에서 출발했다기보다, 예술의 검열과 관련된 표현의 (부)자유 문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본질에 가까운 접근일 것이다.

 

이처럼 2019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국제적 예술 프로젝트들이 예술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정부의 투자로 이루어진 동시에, 투자로 인한 정부의 검열 문제를 보여준다. 국제적인 성공을 위해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로 개최된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일본 정부에게 정치적으로 불리한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이율배반적인 구조를 일본 행정이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일본의 제국주의적 사례로만 한정 지을 수 없다. 자본의 논리로 유통되는 비엔날레 속에서 자본의 논리를 공격하는 작품은 검열의 억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가? 동시에 비엔날레 자체가 그것을 투자하는 행정부의 감시-권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전시를 진행할 수 있을까? 2019 아이치 트리엔날레 사례는 비엔날레가 지닌 여러 가지 구조적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국제적 예술 프로젝트의 중단을 요구하는 결론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모순을 다루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모순이 끊임없이 드러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비엔날레를 살펴보면서 각각의 비엔날레가 지닌 내부적 모순과 다층적인 논의를 살펴보았다. 비엔날레가 동시대적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트렌드만을 좇고 지역의 특수성을 소거한다는 비판, 그리고 자본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정부와의 관계에서 기인한 예술 검열 문제 등은 이를 그저 예술의 국제적 축제로서만 즐길 수는 없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강조했듯 비엔날레는 자신의 모순을 가리기보다는 그것 자체를 전면화하면서, 그것을 다시 비엔날레의 전시 주제로 활용한다. 예술의 검열 자체를 문제시한 전시에서 검열 문제가 발생한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검열과 관련한 여러 다층적인 논의를 생산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또한 소수자성이 한 국가의 미학을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생산시켰다.

 

비엔날레는 언제나 초국가적 자본의 논리를 통해 유통되고 전시되지만, 예술이 초국가적 자본을 통해 유통된다고 해서 그 자체로 부적절하고 예술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비엔날레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 자본 이후의 삶을 논의할 수 있는 전복적인 전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비엔날레를 예술 축제로만 즐기거나, 자본주의의 노예라는 비판적인 인식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술의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여러 이론이 생산되는 가능성의 장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