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ots
▪ 초상화 미술관은 다양한 인물들의 초상을 통해 한 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역사, 사회와 문화, 정체성과 가치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 전 세계 6개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초상화 미술관은 현대 초상화 예술, 지역 정체성과 문화유산, 사회정〮치적 변화, 다양한 민족적 배경 등 각 국가별로 주요한 특징을 살려 운영 중이다.
▪ 현재 주로 영미권에만 있는 초상화 미술관이 더욱더 다양한 국가에서 설립되어 그 국가의 고유한 역사와 정체성을 초상을 통해 표현할 수 있길 바란다.
특정 인물의 자태를 그린 초상화로 한 나라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기록하는 미술관이 있다. 바로 초상화 미술관이다. 초상화 미술관은 초상화를 통해 국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반영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담은 역사를 재구성하고 보존한다. 예를 들어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왕족과 정치가들을 포함, 다양한 인물의 초상을 통해 영국의 제국주의와 산업화, 사회 개혁 등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준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역대 대통령과 정치가, 예술가뿐 아니라 사회 변혁의 핵심 인물인 시민운동가들의 초상을 통해 미국이 직면한 사회 문제를 드러낸다. 이처럼 초상화 미술관은 단순히 특정 인물들의 초상을 전시하는 곳이 아닌, 한 국가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집단 기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문화적 자산을 후대에 전하는 상징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초상화 미술관은 전 세계 6개 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런던에는 최초의 초상화 미술관인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1856년 영국을 빛낸 저명인사의 초상 수집을 위해 시작되었다. 또 다른 영국의 초상화 미술관인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에든버러에서 1889년 설립되었다. 미국에서는 1962년 워싱턴 D.C.에서 미국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개관했다. 이어 1990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뉴질랜드 초상화 미술관이, 1998년 호주 캔버라에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2020년에는 캐나다에서 최초 온라인 초상화 미술관이 열렸다. 하지만 캐나다 초상화 미술관은 정해진 물리적 전시 공간이 아직 없다. 그렇기에 장소를 옮겨 다니며 특별전을 열거나 온라인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초상화 미술관이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와 같은 영미권 국가에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영미권에서 초상화는 개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 정체성을 기록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 16세기부터 왕가와 귀족들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 초상화를 제작했다.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군주의 초상화 중 하나가 바로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정체성과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 초상화를 이용한 첫 군주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목이 깊게 파인 순백의 드레스는 궁정의 미혼 여성을 상징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통해 왕가의 정략결혼 관습을 따르지 않은 버진 퀸(Virgin Queen)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처럼 왕가의 초상화는 각종 암시와 상징으로 왕권과 군주의 특징을 드러낸다.
이후 민주주의와 개인주의 사회로의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삶과 정체성을 기록하는 수단으로서 초상화의 의미는 그대로 이어졌다. 단순히 왕족이나 귀족뿐 아니라 정치인과 예술가, 일반인까지 초상화를 삶과 업적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특히 미국은 독립 이후 국가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의 초상화를 활용했다. 이러한 문화는 미국에 초상화 미술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발전으로도 이어졌다. 이처럼 세계 각국의 초상화 미술관은 국가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각 미술관의 특별전시를 살펴보면, 그 국가만의 독자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현대 초상화 예술과의 만남: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2024년 10월 10일부터 2025년 1월 19일까지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Francis Bacon: Human Presence> 특별전이 열린다. 전통적인 초상화가 외형 묘사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베이컨은 인물의 심리와 내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독창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인물의 형태를 일그러지게 하거나 흐릿하게 표현하는 추상적인 기법을 사용해 인물의 정체성을 담아냈다.
데이비드 호크니 역시 베이컨과 함께 현대 초상화 예술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특별전 역시 2023년 11월 2일부터 2024년 1월 21일까지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열렸다. <David Hockney: Drawing from Life> 전에서는 호크니가 다양한 기법으로 60여 년 이상 그려온 초상화를 만나볼 수 있었다. 연필과 목탄, 파스텔과 같은 전통적인 도구부터 아이패드로 제작한 디지털 초상화까지 그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호크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도구와 기법을 받아들이며 영국 현대 초상화 예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크니는 초상화를 그릴 때 각기 다른 감정을 담아내 자신과 초상화에 담긴 상대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독창적인 표현 방식으로도 주목받았다.
영국 국립 초상화 박물관은 현대 초상화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데이비드 호크니의 특별전 외에도 <Lucian Freud: Portraits>, <Taylor Wessing Photo Portrait Prize 2024> 등 다수의 특별전을 열어 영국의 현대 초상화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영국 국립 초상화 박물관은 현대적 초상화와 그 작가들의 가치를 조명하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역 정체성과 문화유산의 보고: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미술관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선보이는 전시는 뚜렷한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는 경우가 많다. 2024년 3월 23일부터 9월 15일까지 열린 <Before and After Coal: Images and Voices from Scotland’s Mining Communities>전은 미국 사진작가 밀턴 로고빈(Milton Rogovin)이 촬영한 스코틀랜드 광부들의 모습을 전시했다. 그들의 작업 현장, 가정에서의 시간, 여가 시간을 담은 사진은 한때 탄광 산업이 크게 발전했던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조명한다. 그에 더해 탄광 산업의 쇠퇴 후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의 지역 사회의 모습까지 드러내며, 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도록 한다. 사진 속 인물들이 원본 사진을 확대한 이미지 앞에서 주황색 광부 작업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찍은 사진은 한때 스코틀랜드 탄광 산업을 이끌었던 광부들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다.
2022년 3월 12일부터 9월 25일까지 열린 <Counted: Scotland’s Census 2022> 전은 스코틀랜드의 다양한 인구 통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특별전이다. 이 전시는 2022년 스코틀랜드 인구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사람들,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이후 유입될 사람들을 두루 드러내고 있다. 전시 목표는 스코틀랜드 사회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것이다. 초상을 통해 거주자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종교와 직업, 건강, 인종 등 다양한 요소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영국의 폭넓은 정체성을 강조하며 잉글랜드와 웨일즈, 아일랜드 및 옛 대영제국과 관련된 인물들을 다룬다. 반면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스코틀랜드의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자국의 정체성과 역사의 흐름, 문화 등 그들의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사회·정치적 변화의 초상: 미국 스미소니언 초상화 미술관
미국의 초상화 미술관은 사회·정치적 흐름과 변화를 뚜렷이 드러낸다는 특징이 있다. 2023년 10월 20일부터 2024년 9월 2일까지 미국의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Forces of Nature: Voices That Shaped Environmentalism>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19세기 중반부터 오늘날까지 미국 환경 운동에 영향을 준 과학자와 정치인, 사회 운동가, 작가, 예술가 등의 초상화를 담고 있다. 그들의 초상과 어록을 통해 환경주의의 발전과 여러 관점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자리다. 무조건적인 자연 보호에 의문을 제기하며 지속 가능한 선에서 천연자원의 보호와 사용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생물의 다양성과 인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파괴를 강력히 경고하는 자들, 환경주의가 인간의 필요를 소홀히 하며 지나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비판하는 자들의 다양한 관점이 초상을 통해 드러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전시다.
2019년 3월 29일부터 2020년 10월 5일까지 열린 <Votes for Women: A Portrait of Persistence> 전시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역사, 넓은 의미의 평등권 쟁취를 위한 운동을 다뤘다. 특히 주류 참정권 단체에서 배제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이 시민권과 투표권을 보장받기 위해 투쟁한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 과정은 사진과 초상, 인쇄물, 비디오, 신문, 엽서, 책, 투표용지, 전단, 배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드러난다. 이처럼 미국의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미국의 정체성과 역사 위에서 사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형태의 사회 운동과 변화의 흐름을 드러내고 탐구하는 것에 집중한다.
원주민의 역사와 다양한 민족적 배경 조명: 호주와 뉴질랜드의 초상화 미술관
호주와 뉴질랜드의 초상화 미술관은 원주민의 역사와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드러내는 특이점이 있다. 호주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2025년 5월까지 <Ryan Presley: Paradise Won> 전시가 진행된다. 이 전시에서는 호주의 원주민 예술가인 라이언 프레슬리(Ryan Presley)가 담아낸 그의 친구와 가족, 그가 속한 집단의 생생한 경험을 만나볼 수 있다. 그것을 통해 호주 원주민 청소년의 수감과 수감 중 사망사고, 도시 개발로 인한 원주민들의 강제 이주와 같은 사회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룬다는 점도 주요 특징이다.
2023년 3월 10일부터 6월 18일까지 진행된 <Portrait23: Identity> 전은 호주 각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정체성을 드러냈다.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의 초상화와 작품을 통해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현대 호주 사회에서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탐구할 수 있다. 그에 더해 성별, 성적 지향, 세대 간의 차이와 같은 주제를 다뤄 현대 호주 사회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와의 관계를 구축하는지에 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뉴질랜드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2024년 8월 22일부터 11월 10일까지 <Robyn Kahukiwa: Tohunga Mahi Toi>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마오리 작가인 로빈 카후키와(Robyn Kahukiwa)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카후키와의 작품은 마오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마오리 여성들을 주목한다. 거기에 더해 마오리 전통과 신화, 역사적 사건, 식민지 역사를 시각적으로 담아내고 그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한다.
2024년 9월 12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린 <Abhi Chinniah: A Migrant’s Path>전은 뉴질랜드 이민자들과 작가 아비 치니아(Abhi Chinniah) 개인의 이주 여정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뤘다. 치니아는 사진을 통해 이주 경험과 인종 차별, 문화 정체성을 묘사한다. 이러한 초상은 이주가 단순한 이동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상실과 소속감 등 여러 감정을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전시 이외에도 호주와 뉴질랜드의 초상화 미술관은 특별전을 통해 원주민과 이주민의 관점에서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 각국의 초상화 미술관은 국가의 역사, 문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전시의 초점을 다른 곳에 맞춘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왕족과 정치 지도자 등 국가 정체성과 직결된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를 전시한다면, 미국의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역대 대통령과 인권 운동가들, 예술가와 운동선수 등 미국 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온 인물들의 초상화를 전시한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초상화 미술관은 원주민 예술가와 이민자에 대한 전시를 통해 다문화적 배경을 강조한다.
이러한 특징은 상설 전시뿐만 아니라 특별 전시에서도 나타난다.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영국 문화사에 한 획을 그은 주요 예술가들이나 현대 사진작가들,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 작가들의 특별전을 주로 연다.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자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전시를 주로 선보인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인권 운동이나 환경 운동 등 미국 사회에 변화를 일으킨 인물이나 사건에 집중한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원주민 예술가와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특별전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각국의 초상화 미술관은 개성 있는 전시를 통해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고, 사회 변혁에 기여한 인물들을 기념하고 있다.
초상화 미술관은 한 국가의 주요 인물을 모델로 한 초상화를 수집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전 세계의 초상화 미술관은 국가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서술하고 정체성을 표현하며, 예술적 가치를 지닌 초상화의 역사를 보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설립 목적에 따라 각국의 초상화 미술관이 지향하는 방향이 다르며, 이러한 특징은 한 나라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초상화 미술관은 주로 영미권에서만 만날 수 있지만, 사실 어느 나라든 초상화 미술관의 한 면을 채울 그들만의 작품을 가지고 있다. 영미권을 넘어 더욱더 다양한 국가에서 그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진 초상화 미술관을 만나길 바라는 이유다. 초상화는 국가의 역사와 정체성을 드러내며, 현대사회에 던지는 다양한 메시지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해 온 한국의 다양한 초상화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우리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초상을 만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초상화 미술관 설립 논의가 가까운 미래에 시작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