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입장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내려가면 거대한 원통형 구조물이 우리를 맞이한다. 천장 높이까지 뻗어있는 이 구조물은 무려 16m에 달한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집과 사무실 창문에 매달아 놓는 블라인드가 보인다. 작가는 이 거대한 설치 작품을 154개의 블라인드로 만들었다. 작품은 두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깥쪽은 검은색의 블라인드, 안쪽은 코발트블루 색상의 블라인드다. 구조물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쪽의 블라인드가 천천히 회전하는 모습이 보인다. ‘침묵의 저장고―클릭 된 속심’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열린 구조물의 형태로, 완전히 개방되지도, 완전히 차단되지도 않는 상태를 보여준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 양혜규 작가의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명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O₂ & H₂O≫로, 2021년 2월 말까지 계속된다. 양혜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베를린과 서울을 기반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작가로, 현재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등 다양한 국제 미술 행사에 초대된 바 있으며, 2000년부터 현재까지 개인전 70여 회, 그룹전 및 프로젝트에 200여 번 이상 참여했다. 2008년 독일 「캐피털」 지의 세계 100대 미디어 설치미술가로 선정되었고, 2018년 볼프강 한 미술상(Wolfgang Hahn Prize)을 받기도 했다.

 

양혜규의 작품은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로 귀결되지 않지만, 대체로 디아스포라나 노마디즘으로 설명되곤 한다. 이는 양혜규가 1994년부터 전 세계를 누비며 여러 지역에서 작업을 전개해왔기 때문인데, 그는 늘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서 어느 한쪽에 완전히 속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노마디즘’이란 수식어에 대해 “물리적인 공간의 문제가 아닌, 자유로운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양혜규의 작업은 현재의 프레임에 반론을 제기하고, 고정관념과 이분법적 가치를 거부하는 상상력을 지녔다. 그는 늘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나가려 한다.

 

양혜규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5전시실에 들어서면 ‘크로마키 벽체 통로’를 지나게 된다. 크로마키는 이미지에 다른 배경을 합성할 때 사용하는 배경색으로, 방송국의 날씨 뉴스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파란색, 초록색의 배경 위에 CG를 입히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석고보드로 지어진 이 통로는 터널을 닮은 모양새로, 전시실의 벽 한쪽에 쭉 줄지어 세워져 있는데, 막힌 벽이 아니라 입구로 향하는 공간을 보여준다. ‘크로마키 벽체 통로’를 통과하고 있으면 마치 작가가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크로마키 벽체 통로를 단번에 지나칠 수도 있고, 이 안을 아늑하게 느끼면서 벽면에 전시된 ‘래커 회화’를 감상할 수도 있다.

양혜규, '래커 회화'(1994~) 연작 시리즈

‘크로마키 벽체 통로’의 벽면에 전시된 ‘래커 회화’는 호박이나 적양파 같은 식료품을 담았던 그물망을 공업용 래커를 사용해 나무판에 붙이고 이를 봉인한 작업이다. 래커의 냄새가 독하므로 여름철 야외에서만 제작할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작품의 제작 과정이 완성된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작품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물방울이나 꽃가루, 먼지, 벌레 같은 것들이 달라붙어 작품의 일부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래커 회화’를 보고 있으면 작가가 작품의 제작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작품은 단연 ‘소리 나는 가물(Sonic Domesticus)’이다. 작가는 다리미, 마우스, 헤어드라이어, 냄비 같은 일상의 사물을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각각의 사물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대칭을 이루며 복제돼 있다. 조각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조각을 움직이면 표면을 덮은 방울들이 흔들리면서 청량한 소리를 낸다. 방울은 한국의 무속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손잡이를 잡고 방울 소리를 내면 조각과 세계를 연결하는 샤먼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4점의 조각 작품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그 출발은 일상적인 사물이다. 우리는 ‘일상적’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이고 평범하다는 뜻으로 쓰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일상이야말로 특별하고 신비한 경험을 준다고 말하는 듯하다.

 

‘소리 나는 가물’과 같은 공간에 전시된 ‘솔 르윗 뒤집기’는 양혜규가 솔 르윗(Sol LeWitte, 1928~2007)이라는 미국 출신 작가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솔 르윗은 서양미술사의 흐름 중에서 1960~1970년대 미니멀리즘 사조에 속하는 대표 작가로, 입방체 조각을 주로 제작했다. 그의 입방체 조각은 최소 단위가 반복적인 규칙에 의해 무한대로 확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솔 르윗(Sol LeWitte), '무제 입방체 6(Untitled Cube 6)', Painted steel and aluminum, 39.7×114.9×114.9cm, 1968 Ⓒ 휘트니 미술관

양혜규는 2015년부터 솔 르윗의 작품을 가져와 순백색의 블라인드로 새롭게 해석하는 시리즈를 선보인다. 르윗의 작품을 일정 비율로 확장하거나 축소한 뒤, 이를 뒤집어 천장에 매라는 방식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솔 르윗 뒤집기―3배로 축소된, 구조물'(2020)과 ‘솔 르윗 뒤집기―21배로 확장된, 열린 모듈 입방체'(2020)는 각각 원작을 3배 축소, 21배 확대한 조각이다. 두 작품은 모든 면이 70cm로 이루어지고, 블라인드는 뒤집어진 채로 매달려 있다. 여기서 ‘뒤집기’라는 제목이 나온다. 작가는 르윗의 큐브 면을 물리적으로 ‘뒤집고’, 또 작품을 재해석하면서 원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뒤집는다. 양혜규는 이 작품을 통해 원작을 변형시키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본 전시에서는 선보이지 않았지만, 양혜규가 국제무대에서 입지를 확고하게 한 작품은 그가 런던의 델 피나 파운데이션(Delfina Foundation)의 레지던시에 입주했을 당시 제작한 ‘창고 피스(storage piece)’이다. 레지던시는 시각예술 작가들의 창작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1년가량의 입주프로그램을 통해 유망한 작가들을 지원하는 제도다. 그는 레지던시에 입주했을 당시 여러 국제전시를 마치고 온 상황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자 이 작품들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쌓아 ‘창고 피스’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양혜규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작업 환경을 한눈에 보여주었고, 자본주의를 둘러싼 국제 전시나 미술시장의 담론을 작품에 담아내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한다.

 

작가가 겪은 이러한 노마드적 삶의 경험은 그의 다른 작품에도 드러난다. 그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모은 소재들로 ‘중간 유형'(2015~) 시리즈를 제작한다. 양혜규는 이 시리즈에서 짚이라는 소재를 통해 개별 문화의 전통성을 다루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인공 짚을 사용함으로써 자연과 문명, 문화의 개별성과 보편성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자 한다. 작품의 제목처럼 ‘중간’의 ‘유형’을 창조한 것이다. 시리즈의 초기작에서는 황색 인조 짚을 사용하여 비교적 전통적 이미지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짙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질적인 재료와 기법, 색상을 혼합하면서 문화의 다변화를 꾀한다.

 

양혜규의 ‘중간 유형’은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Homi Bhabha, 1949~) 그의 책 ‘문화의 위치’에서 이야기한 ‘혼종성’ 개념과도 잇닿아 있다. 바바는 ‘고향을 떠난 듯한 낯선 감정(unhomely)’에 대해 말하며 이 경험은 공포처럼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중간 유형’에서처럼, 문화적으로 어중간한 공간은 ‘사이에 낀 곳(in between)’, 즉 ‘경계’가 되며, 이 과정에서 그동안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이분법적 체계가 무너지고, 문화에 우열이 있다는 사고 체계 또한 흐려진다.

(왼쪽부터) 양혜규, '중간 유형―삼구 아래 사각뿔 토템'(2015), '중간 유형―성계 용놀이'(2016), '중간 유형―확장된 W 형태의 우흐흐 생명체'(2017), '중간 유형―염색한 구렁이 생명체'(2017) Ⓒ 양혜규

전시 자료는 보통 도록으로 만들어지지만, 이번에는 독특하게 ‘양혜규에 관한 글 모음: 2001~2020 공기와 물’이라는 단행본으로 정리되었다. 이 책에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와 미술 평론가들이 지난 20년간 양혜규 작가에 관해 쓴 글 36편이 번역돼 실려 있다. 양혜규의 예술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다면 참고할 만하다.

 

전시를 모두 감상하고 나니, 단행본 제목과 전시명이 ‘O₂ & H₂O’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더운 공기 중의 수증기가 찬 물병 표면에서는 물방울로 변하듯, 대부분의 물질은 온도나 다른 조건들에 의해 그 모습이 달라진다. 양혜규는 이처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물질의 의미에 주목했다. 그는 전시 서문에서 “온도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물의 응결은 조용하고 신중한 소통의 모델이다. 다름을 인지하고 유지한다면, 눈물과 땀이 흐르더라도 함께 공존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즉, 이제까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키는 작업을 주로 해왔던 작가가 이번에는 ‘현실의 추상성’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새로운 도약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시가 다소 어렵거나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오브제로 작업하지만, 관람자 입장에서는 작품에서 어떤 정보를 읽어내야 할지 난처해지기도 한다. 그가 어느 한 영역으로 자신의 작업을 한정 짓지 않고, 다양하면서도 추상적인 주제를 자유롭게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모호한 것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들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다. 양혜규의 작업에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관람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느끼는 방식대로 양혜규를 만나면 된다. 추상적인 주제를 자유롭게 표현한 양혜규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 안에 내재한 다양한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사실 당신의 일상에 이미 예술적 실천이 깃들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전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