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기차가 첫 기적을 울린 지 100년하고도 25년이 지났다.
그동안 기차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연결 통로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답답함을 벗어날 수 있는 일탈의 파트너였다. 또한 고향, 학창시절, 첫사랑 등 잊지 못할 기억을 이어주는 ‘아련한 그리움과 설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스마트폰으로 얼굴을 보며 통화하고 SNS로 서로의 일상을 꿰뚫어 보는 지금도 명절만 되면 사람들은 기차표 확보에 전쟁을 치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4년 고속철도시대가 열리며 기차는 또 다른 변화의 국면을 맞았다. 시속 300km로 질주하는 KTX가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이어 준 것이다.
올해로 15살이 된 KTX는 그동안 7억 2천만 명을 태우고 지구를 1만 바퀴나 돈 거리 만큼 달렸다고 한다. 계산상으로 전 국민이 1인당 14번 탄 셈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KTX를 이용하면서 철도의 영향력이 커지고 철도에 대한 이미지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서울역을 출발해 부산 광안리에서 회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홍대에서 저녁 약속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또한 KTX로 천안, 세종은 물론 심지어 대전에서도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른바 ‘KTX 춭퇴근족’. 또한, 사람이 모이고 경제가 움직이며 KTX가 정차하는 역은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현재도 그 지역 생활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KTX가 시간의 거리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의 거리까지 좁혀 놓은 것이다. 어느새 생활공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철도역, 이번 글에서는 그 철도역들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보려 한다.
대한민국의 관문으로 하루 13만명이 이용하는 서울의 상징 중 하나인 서울역.
지하철 4개 노선, 전국의 주요 도시로 떠나는 KTX와 새마을, 무궁화 그리고 알록달록 관광전용열차. 인천공항과 서울을 바로 연결하는 공항철도. 여기에 도심공항터미널과 버스환승센터까지. 말 그대로 서울역은 교통의 메카다. 오늘은 교통수단으로서의 서울역이 아닌 ‘라이프, 컬처 인프라’를 중심으로 서울역을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목록>
A. 공연하는 서울역
B. 회의하는 서울역
C. 맛있는 서울역
D. 신상이 좋아하는 서울역
A. 공연하는 서울역
서울역 3층 대합실인 맞이방에는 오픈 콘서트홀이 있다. 콘서트홀은 KTX 개통과 함께 새로이 지은 역사에 마련된 종합 이벤트 공간이다. 주로 각종 이벤트 행사장으로 쓰이지만 때로는 무대로, 때로는 라이브 공연장으로, 때로는 야생화로 가득한 인공 정원으로 변신한다. 채용박람회 등 여러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또, 지난 4월에는 강원 산불 피해 지역에 관광객을 다시 유치하기 위한 ‘어게인, 고 이스트(Again, Go East)’ 캠페인 행사가 열렸다.
한편, 코레일은 전 국민 대상 오디션으로 아마추어 음악인들을 선발해 ‘코레일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정기 공연도 콘서트홀에서 개최되어 여행객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이처럼 오픈 콘서트홀뿐 아니라 맞이방과 승강장도 종종 무대와 런웨이로 변신한다.
B. 회의하는 서울역
기차역은 비즈니스 공간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코레일은 서울, 용산, 광명, 동대구,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역 20여 곳에 임대회의실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역 회의실은 맞이방이 아닌 4층에 있는데, 총 7개다. 8명부터 많게는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과 심플한 소회의실부터 특급호텔 못지않은 인테리어 회의장까지 다양하며 소모임, 세미나, 컨퍼런스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온라인 코레일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으며 노트북, 빔 프로젝트 등을 빌릴 수 있다. 기본 2시간부터 시간 단위로 이용료를 지불하면 된다.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역 회의실의 최대 장점은 접근성이다. 특히 서울역은 서울 도심은 물론 수도권과 지방, 인천국제공항과 연결되어 어디서나 빠르게 오가는 장소다. 그래서 전국 단위의 단체나 기관들이 특히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지방에서 서울 도심으로 올라와 강남 등 서울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과 시간 허비 없이 역에서 바로 회의와 행사를 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역 회의실 임대 서비스는 KTX 등장과 함께 코레일의 히트 상품이 되어 다른 철도 운영사도 도입하고 있다. 공항철도(주)도 임대 회의실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역의 도심공항터미널 쪽으로 내려가는 서울역사 지하 1층과 3층에 6개의 공항철도 회의실이 있다. 또한,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존(Business Zone)도 서울역 2층 맞이방에 있다. 여행 중에 문서 편집, 프린트, 복사, 스캔 등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이외에도 지방에서 서울로 출장 오는 기업인들이 간단한 업무를 보고 쉴 수 있는 비즈니스 라운지 2개가 있다. 부산, 울산, 경남 상공회의소가 운영하는 비즈니스 라운지가 지역 기업인들에게 반응이 좋아 대구, 경북 기업인 라운지도 들어섰다.
C. 맛있는 서울역
먹거리를 빼고는 여행을 이야기할 수 없다.
기차 안에서 열차 판매원이 끌고 다니며 파는 호두과자, 오징어구이, 삶은 달걀, 바나나맛 우유 그리고 캔맥주 등 군것질거리가 없다면 기차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추억과 낭만은 미완성일 것이다.
아직도 기차여행 하면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겠지만, 아쉽게도 이젠 KTX를 포함한 모든 기차 안에서 이동하며 먹거리를 판매하는 카트는 없다. 모두 자동판매기로 대체됐다. 이곳에서는 간단한 음료와 과자 등을 판다. KTX 도입으로 열차 이용시간이 짧아지면서 카트판매의 이용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주요역이 민자역사로 바뀌고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유명 맛집 등 다양한 음식점이 역사 내에 입점하면서 생긴 변화이기도 하다.
오히려 기차역별로 ‘머스트 해브(Must Have)’ 아이템이 등장했다. 대전 성심당, 부산 비앤씨, 대구 삼송빵집, 전주 풍년제과 등 기차역 ‘빵지순례’가 유행하고, 빵집뿐만 아니라 지역 장사를 하다 기차역에 입점하며 입소문을 타고 전국 장사로 체급을 올린 음식점들도 꽤 된다.
서울역에도 여러 종류의 음식점이 있다. 현재 문화역서울 284로 모습을 바꾼 옛 서울역에 기차가 들어오던 시절부터 영업해온 우리나라 최초의 경양식집 ‘서울역그릴’을 비롯하여 한식, 일식, 중식 전문 식당가와 푸드코트 등 다양한 음식점이 서울역 맞이방과 민자역사에 걸쳐있다.
맞이방에서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의 ‘선상 통로’에는 기차 이용객이 찾으면 좋을 10여개의 매장이 있다. 샌드위치, 주먹밥, 김밥 같은 분식과 한식 도시락, 태국 음식까지 다양하다. 테이크아웃이 기본이다. 즉석에서 조리하는 음식이지만 열차 시간에 맞춰 3~4분 내 완성되어 내어놓을 수 있도록 시스템화되어 있다.
기차 내부에서 먹는 것을 고려하여 비교적 음식 냄새가 덜 나고 국물이 적고, 포장이 용이한 것이 특징이다. 열차 시간을 고려해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업한다. 기차 내부에서 혹은 열차를 기다리며 시계탑 계단에 앉아 먹기 딱 맞으며, 최고의 인기 메뉴는 한식 도시락과 태국 면 요리라고 한다.
D. 신상이 좋아하는 서울역
기차역이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새로운 버전의 스마트폰이 출시될 때이다. 서울, 용산, 대전역 등 전국 주요 KTX역에는 삼성과 LG의 신형 스마트폰 체험 부스가 경쟁적으로 설치된다. 애플은 최신 아이폰으로 촬영한 이미지를 서울역 벽면에 광고하고 있다. 가로 8.5m 세로 3m의 와이드컬러(라이트박스) 7개를 연달아 사용하는 등 총 8개의 대형 광고물을 설치하여 물량공세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대기업들만 기차역을 마케팅과 판매처로 이용하는 건 아니다. IBK기업은행과 코레일이 손을 잡고 서울역 2층 맞이방에 ‘중소기업 명품마루’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2013년 첫 선을 보인 명품마루는 중소기업에게 홍보와 판로 마련 등 실질적 지원을 위해 추진됐다. 패션, 생활용품, 화장품류, 식품류 등 전국의 우수 중소기업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현재 ‘중소기업 명품마루’는 서울역 외에도 대전역, 동대구역, 광주역에 매장을 운영 중이다. 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소품이나 기념품을 구매하기 좋은 곳이다.
마케팅의 귀재 글로벌 IT기업들이 앞다퉈 기차역에 대규모 행사장을 만들고 광고를 집중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차역의 높아진 위상과 생활의 중심지로서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