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흐르는 풍경 속에 눈을 들다

 

“여행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행은 더 재미있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재미없어졌다.” 

– 레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19세기에 등장한 기차를 포함해 자동차, 비행기, 전철 등 다양한 탈것의 발명은 편리함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 이전 시대의 육로 여행자가 그 여정 속에 주변환경과 맺던 밀접한 관계는 점차 박탈된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탈것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다. 더이상 이동 시간 동안 직접 걷거나 길을 찾는 등 몸이 위치한 지역과 관련된 신체적, 정신적 노동이 없고,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 언덕, 건물은 탑승객이 시각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전에 재빨리 사라져버린다. 차내에서는 창밖 풍경을 쫓기보다 다른 할 일을 하거나 상관없는 잡념을 떠올리는 것이 차라리 생산적이고 편하다. 그렇게 “두 장소를 잇는 땅과의 공간적, 감각적 관계”는 사라졌고, 이제 두 장소를 갈라놓는 것은 공간이 아닌 시간이다.

 

오늘날 장소 사이의 거리는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한 층 더 추상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어디론가 이동하면서 습관적으로 화면 스크롤을 내려 전부 확인할 수도 없을 수많은 정보를 눈과 귀에 담고, 상공에서도 영화를 본다. 몇 시간이고 네모난 화면에 시선을 꽂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면, 우리가 움직이는 중이라기보다 우리 몸이 탈것에 의해 운반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떻게 이 마음 불편한 수동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여기, 우리가 어디론가 이동하는 순간에도 더 많이, 더 분명히 존재하길 바라며 기획된 국내외 예술 프로젝트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특별한 도로 위의 시간 : 생각버스 프로젝트(Thinking Bus Project) 

생각버스 프로젝트(이하 생각버스)는 서울시 전역을 종횡무진 움직이는 버스를 소재로 무가지(無價紙)를 격월 발행해왔다. 이혜림 디렉터와 이예연 디자이너의 개인 프로젝트로 시작된 생각버스는 매일 서울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버스를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 공간을 각각의 연속적인 풍경으로 바라보는 한편, 버스를 낯선 이들의 사연을 실어나르는 낭만적인 장소로 믿는다. 그리고 버스에 얽힌 소소한 이야기들을 지면에 실어, 독자가 자신에게 익숙한 행로도 여행지를 방문하듯 생경한 마음으로 가보게끔 돕는다. 첫 번째 시즌이었던 2012년에서 2014년 사이에는 창간호 472번 버스를 시작으로 7011, 110AB 등 총 10편을, 2015년과 2017년에는 각각 시즌 2, 3으로 2편씩 발행했다.

<시간여행>

시즌별로 조금씩 구성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생각버스는 공통적으로 각 호마다 하나의 버스 노선을 선정하고 해당 경로 혹은 특정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는다. 예컨대 402번 버스의 경우 ‘공공미술’을 주제여서 구간별로 마주칠 수 있는 조형물을 지도로 소개했고, ‘152번 X 시간여행’ 호에서는 서울 내 역사적 고건물과 최신식 건물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도표를 실었다. 또 늦봄에 발행된 ‘260번 X 벚꽃엔딩’ 호에서는 주요 벚꽃 구경지를 안내하는 지도가, 여름에 출시된 ‘7016번 X 더위사냥’호에서는 매 정류장 근처의 더위 피할 곳을 알려주는 보드게임판이 돋보인다. 때때로 해시태그를 이용해 승객들의 에피소드 혹은 버스 이용 팁을 모으는 등 독자 참여 창구도 열어놓기도 했다.

생각버스는 인쇄된 무가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버스 번호의 의미, 좌석 위치에 따른 심리, 대중교통 이용 현황 등 버스와 관련된 인포그래픽을 담은 소책자 <버스생각(2013)>과 7개의 버스노선도를 활용한 여행 방법을 제안하는 도서 <버스로 서울여행(2015, 지콜론북)> 등을 제작했다. 심지어 버스에 관련된 노래를 작곡하고 관련된 곡들을 함께 수록한 음반 <나의 서울 그리고 나의 버스(2015)>를 내는 등 다양한 형태로 활동 범위를 넓혀왔다. 출발지와 도착지에서 타고 내리는 게 전부인 듯한 버스도 이렇듯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스마트폰 대신 반듯하게 접힌 생각버스 팸플릿을 펼치며 탑승하는 버스는 불편한 동시에 확실히 기억에 남는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생각버스 무가지는 한때 서울시 버스 차내에도 비치되곤 하였으나, 현재는 서울 내 몇몇 독립서점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

▶ 생각버스 프로젝트 더 알아보기

https://www.facebook.com/project.thinkingbus

https://blog.naver.com/thinkingbus

*이미지 출처 : 공식 블로그

2. 작은 극장이 된 기차 : 비벡테슬란드(Bewegtesland) 

 

독일어 비벡테슬란드(Bewegtesland)는 거칠게 번역하면 ‘움직이는 땅’이라는 뜻이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듀오 다텐슈트루델(Datenstrudel)이 감독한 동명의 프로젝트는 독일 튀링엔주 예나 파라디스(Jena Paradise) 역과 나움베르그(Naumberg) 역 사이 약 30km의 철도 구간을 기다란 무대로 바꾼 프로젝트다. 볼 것 없이 들판만 넓게 펼쳐진 이 야외 공간을 어떻게 했다는 것일까?

두 지점을 빠르게 연결해주는 최신 교통수단이 역으로 이동하는 여행자와 그가 통과하는 지역 간의 만남, 나아가 도시민과 지방민 간의 만남을 저지한다는 지적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두 작가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승객이 지역주민을, 빠름이 느림을, 도시가 전원을” 만날 가능성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2017년 8월 26, 27일 양일간 지역 주민이 배우가 되고 기차 승객이 관람객이 되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선보이기로 했다.

기차가 워낙 빠르니 이들의 ‘연극’은 기본적으로 짧을 수밖에 없는데, 길이에 따라 종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초 단위의 짧은 연극은 개별적인 엉뚱한 상황을 연이어 보여줌으로써 승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골자다. 가령 창밖의 덤불들이 갑자기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린다든지, 커다란 나무가 불에 활활 타기 시작한다든지, 가죽옷을 걸친 원시인 무리가 모여서 아우성을 치거나 누군가 상어 밥이 되고 있는 등, 승객 입장에서 ‘내가 뭘 본거지’ 싶은 장면을 연출하는 식이다. 승객들에게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각 상황의 진가를 따져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잔상은 상상력과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킨다.

반면 몇 분 동안 이어지는 길이가 긴 연극의 경우, 기차가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하나의 이야기 흐름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토끼와 고슴도치(Bunny and Hedgehog)’라고 불리는 속임수를 사용한다. 예컨대 이들의 연극 ‘기차와의 경주(Race against the train)’는 한 남자가 맨몸으로 기차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같은 차림새를 한 25명의 사람이 각자 구간별로 숨어있다가 각각 타이밍에 맞추어 동일한 주인공을 연기하는 식이다. 이 경우에도 기차의 속력 때문에 승객들에게는 25개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애니메이션처럼 보이고, 주인공의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은 외려 이 짧은 연극을 이해하는 데에 귀여운 힌트가 된다.

 

이 엉뚱한 프로젝트의 기획이 발표된 후, 흥미롭게도 300여 명 이상의 지역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팀워크가 중요한 프로젝트인 만큼 미리 다 함께 모여 주말마다 연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이 준비 기간을 일종의 놀이처럼 여겼고, 덤으로 이전에는 서로 잘 알지 못했던 이웃들이 자연스레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기계, 속력, 그리고 인력을 적절히 활용한 비벡테슬란드 프로젝트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그 과정이 기록된 다큐멘터리 영상으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비벡테슬란드(Bewegtesland) 프로젝트의 더 알아보기

http://www.bewegtesland.de

▶아티스트 듀오 다텐슈트루델(Datenstrudel)의 활동

http://www.datenstrudel.de

*이미지 출처 : 공식 홈페이지 및 영상 캡쳐

3. 허공에서 맞추는 퍼즐 : VISIBLE DISTANCE / SECOND SIGHT

 

“이 작품은 멈추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관람해주세요” 

“이 작품은 젠 어트리 길(the Gene Autry Trail)을 따라가다 발견할 수 있습니다(33°50’41.70”N 116°30’21.02”W)” 

 

대체 어떤 작품이 그 위치를 표시하려면 지구상 좌표까지 필요한 것일까? 이 문장들은 미국 시각예술작가 제니퍼 볼란드(Jennifer Bolande)의 작품 ‘VISIBLE DISTANCE / SECOND SIGHT’에 대한 공식 안내문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코첼라 밸리(The Coachella Valley)는 겉보기에 건조한 황무지일 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곳은 그룹 ‘DESERT X’가 관리하는 거대한 현대미술 전시장이기도 하다. 이들은 제도화된 현대미술판을 벗어나 사막에서 새로운 대지 미술을 실험했던 예술가 윌터 디 마리아(Walter de-Maria)의 정신을 기리며, 극단적인 기후를 가진 이곳에 걸맞은 장소 특정적 예술을 연 단위로 공모 및 전시한다. 보통 규모 있는 설치작업들이 전시되기 때문에 직접 방문해서 보는 것, 지나가면서 보는 것 등 관람 방식이 다르다. 주변에 랜드마크로 삼을 만한 이렇다 할 건축물이 없다 보니 정확한 작품 위치를 설명하려면 좌표가 필요한 게 이 ‘전시장’ 또 다른 특징이다. 제니퍼 볼란드의 작품은 작년 전시 ‘Desert X 2017’의 일부로서 두 달간 설치되었다가 현재는 제거되었다.

미국 여느 내륙 지방이 그렇듯, 그의 작품이 설치된 지역도 햇볕에 달구어진 고속도로만 지루하게 펼쳐져 어서 지나가야만 하는 지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바로 그 점에서 빛을 발한다. 작가는 도로를 따라 서 있는 거대한 직사각형 빌보드(옥외 대형 광고 구조물)에 산맥 사진을 입혔다. 달리는 차가 운전자의 시점을 계속 옮기기 때문에 작품은 가만히 서 있는 채로 일종의 애니메이션 효과를 획득한다. 그리고 특정 지점에 다다르면 빌보드의 사진과 그 주변부의 실제 산등성이 혹은 지평선이 정확히 맞추어져, 짧은 시간이나마 온전한 모습의 풍경을 이룬다.

 

여러 도로 표시판이 설치되어있는 황무지에서, 작가는 운전자들이 자주 눈여겨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는 것을 광고하기로 선택했다. 빌보드를 올려다봄으로써 운전자의 시선은 광고판 표면에 얹어진 산맥 사진에 초점을 맞추어 보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 혹은 욕구를 자극하는 광고문구를 읽는데에 익숙해져 있는 두 눈이, 비로소 그 빌보드 뒤에 숨겨져 있는 아름드리 풍경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 꼭 맞추어진 완벽한 장면들을 마주칠 때, 아마 관객은 자신이 지구상 어떤 점 위에 존재하고 어디를 향하여 속력을 내고 있는지 일순간 더 분명하게 확인하곤 했을 것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좌표 없이 말이다.

▶Desert X 더 알아보기

https://www.desertx.org/about-us

▶ <VISIBLE DISTANCE / SECOND SIGHT> 작품 알아보기

https://www.desertx.org/jennifer-bolande

*이미지 출처 : 공식 홈페이지

속력을 내느라 잊혀진 것들

 

운행 중인 버스, 기차, 자동차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들을 알아보았다. 이 작업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생각버스 프로젝트는 버스가 덜컹대며 달리는 동안 지나는 동네들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그곳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냈다. 비벡테슬란드 프로젝트는 늘 기차에 관해 승객의 입장으로만 존재하던 개인들을 철도가 놓인 지역의 거주민으로도 다시 역할을 부여했다. 광고판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산맥을 주목하게 만든 제니퍼 볼란드의 작품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주어진 아름다움을 놓치는 일상 경험을 상기시킨다.

 

세 작업 각각, 속력을 내느라 잊혀진 것들에 대한 재조명이다. 서론에서 레베카 솔닛의 말을 빌려 오늘날 두 장소를 가르는 것이 더 이상 공간이 아닌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를 다르게 이해해보면, 수송 기술의 발전이 또 하나의 시간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예전에는 이동 자체에 집중해야 했을 시간을 우리는 일종의 자유시간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만 몸을 움직여 수십, 수백여 킬로미터를 걷고 달리면서 자연스럽게 발휘되던 육체, 정신 활동이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그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상자에 갇혀 옮겨지는 객체가 되지 않고, 지표면에 그어진 도로에만 길들지 않고, 네모난 화면에 온 주의를 쏟지 않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