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드는거 아니니까. 좀 도와줘. ㅋㅋ”
얼마 전, 평소에는 연락이 뜸하던 대학 동창으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을 받았다. 은행권에 다니는 그 친구는 대뜸 자기네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어플리케이션 설치를 부탁했다. 한 사람당 200명씩 가입시키라는 할당이 내려왔는데, 주변 지인들을 찾아 부탁하다가 그리 자주 연락하지 않던 나에게까지 연락을 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간만에 연락이 닿았으니 얼굴이나 보고 점심이나 먹자며 만난 그 친구는 최근 금융권의 흐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핀테크 때문에 앞으로 모든 금융회사는 IT회사가 되려고 할 거야. 금융권만큼 데이터가 방대한 산업도 없거든. 다들 플랫폼이 되고 싶어하는데, 사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 이렇게 직원들 시켜서 사람 모은다고 플랫폼이 되나…”
왜 핀테크는 플랫폼이 되어가는가
2016년 출간된 ‘플랫폼 레볼루션(Platform Revolution)’의 저자들은 플랫폼이 등장할 수 있는 산업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를 꼽았다.
– 산업 내에서 정보의 중요도가 높은 정보 집약형 산업
– 규모 확장이 힘든 게이트키퍼를 보유한 산업
– 분산 정도가 심하여 실제 서비스를 이용하는 유저들의 시간, 노력 낭비가 심한 산업
– 생산자-사용자 간의 정보 비대칭이 심한 산업
실제로 금융산업은 사람들간의 거래를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축적되고 있고(정보 집약적 산업), 금융사마다 사용하는 시스템들이 달라 결제나 송금 등을 사용할때마다 각기 다른 시스템을 접속해야하는 불편함이 존재한다(심한 분산 정도). 때문에 저자들은 교육, 공공 서비스, 헬스케어와 같은 산업과 더불어 플랫폼의 영향을 받을 산업으로 금융 분야를 꼽았다. 그리고 친구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금융 분야의 핀테크는 플랫폼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간편성과 범용성이라는 허들. 그리고 한국의 핀테크 플레이어들
한국의 핀테크 시장은 여러 플레이어들에 의한 각축전으로 이미 심화된 경쟁 구도를 보이고 있다. ‘삼성페이’,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등이 다양한 서비스들이 이미 런칭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리테일과 밀접한 연관성을 띤다. 핀테크가 금융이라는 소(小)담론에서 벗어나 리테일 분야로 확장되는 이유는, 거래 수단을 장악함으로써 거대한 소비 시장은 물론 거의 대부분의 경제활동 인구를 잠재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리테일과 결합한 핀테크의 경우, 견고한 독점 결제수단으로 한 번 자리잡게 되면, 쉽게 고객 이탈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플랫폼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하나는 설치와 결제의 ‘간편성’이고, 둘째는 대부분의 사용 범위를 커버할 수 있는 ‘범용성’이다. 이 두 가지 허들을 넘지 못해 한국에서는 아직 ‘플랫폼’이라 불리울만한 시장 지배자가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조건인 간편성의 경우, 우리나라처럼 신용카드가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나라에서는 가로막는 장벽이 비교적 심한 편이었다. 카드사마다 표준화되지 않은 시스템을 제각기 사용하였기 때문에 안전하고 효율적인 거래 처리를 위해 PG사(Payment Gate, 전자지불 대행사)와 VAN사(Value Added Network, 데이터 통신사)들이 중간에 개입하게 되었고, 사용자는 인터넷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 ‘Active X’와 같은 번거로운 프로그램과 다수의 인증절차를 겪어야 하는 불편함을 겪어왔다. 최근에 들어서야 모바일 결제가 늘어나며 이러한 부분이 상당부분 해결되었지만, 범용성, 즉 절대다수의 사용자와 가맹점을 확보하는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일은 여전히 어느 플레이어에게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특히, 새로운 결제 시스템 도입을 위해 전용 POS나 시스템 설치가 필요할 경우, 판매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번거로움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과거에 NFC(Near Field Communication, 근거리 무선통신) 기술을 이용한 모바일 결제가 상용화되었 을때, 전용 단말기가 필요하다는 약점 때문에 널리 퍼지지 못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삼성페이는 기존의 신용카드 단말기를 통한 결제가 가능하도록 결제시 모바일 기기에서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기술을 개발하여 가맹점 확보의 진입장벽을 낮추었다. 또한 네이버페이는 자체 전자상거래 생태계 안의 거래 내에서 사용이 가능한 간편 결제 시스템을 만들고, 그 영향력을 점차 키워나가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독자적인 핀테크 영역을 넓혀나가는 방식을 취했다.
중국, ‘알리페이’가 성공할 수 있던 배경
반면, 최근 ‘핀테크의 선진국’이라 불리울만큼 높은 모바일 결제 사용률을 보이고 있는 중국의 경우 신용카드 보급률이 낮았기 때문에 이러한 핀테크 혁명이 꽃피웠다는 분석도 있다. 마치, 급격한 경제성장 속에 자전거 시대에서 오토바이 시대를 건너뛰고 자동차 시대로 진입한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중국의 결제 패러다임은 현금에서 바로 모바일로 넘어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알리바바’를 등에 업은 ‘알리페이’가 있다. 알리페이는 핀테크 혁명을 위한 두 가지 선결 조건인 간편성과 범용성 모두를 갖춘 결제 시스템이라 평가 받는다.
알리페이는 알리바바의 전자상거래 서비스인 ‘타오바오’의 결제 부가서비스로 2003년 처음 등장했다. 즉, 처음부터 리테일과 결합된 결제시스템으로 별도의 회원 모집 없이 타오바오의 유저들을 그대로 흡수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앞서 밝힌 것과 같이 한국처럼 신용카드 문화가 널리 퍼지지 않은 풍토에 뿌리 내렸기 때문에 모바일로의 전환이 용이하였고, 그 결과 ‘간편한’ 결제 서비스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알리페이는 스마트폰 확산의 태동기인 2008년, 처음으로 모바일 결제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알리페이를 통한 결제는 QR코드나 바코드 스캔 방식을 통해 구매자가 판매자의 QR코드를 직접 스캔하여 이루어지므로 한국의 PG나 VAN과 같은 시스템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또한 오프라인 판매자 역시 알리페이 앱을 통해 서비스 제공사의 QR코드를 스캔하여 가맹점 신청을 할 수 있어, 쉽게 가맹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전용 단말기 설치나 전용 네트워크 등 별도 시스템이 전혀 없는 이러한 간편성 때문에, 2016년 말 현재 알리페이의 오프라인 가맹점은 전 세계적으로 100만 개를 돌파하였으며, 이 숫자는 꾸준히 계속 증가하고 있다. 결국 절차에서의 ‘간편성’은 많은 이들을 플랫폼 안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 ‘범용성’을 달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알리페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의 회원 수는 10억 명에 이르렀으며, MAU(Monthly Active User, 월간 순 이용자) 역시 무려 5억 명 가까운 수준을 보이고 있어, ‘알리페이’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No.1 결제 수단으로서 핀테크 혁명을 주도하고 있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알리페이’의 이러한 돌풍은 가히 ‘파괴적’이라 할 만큼 금융과 리테일 산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현재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알라바바, 리테일과 핀테크를 넘어서, 플랫폼 기업으로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2016년, 뉴 리테일(New Retail), 신제조(New Manufacturing), 신금융(New Finance), 신기술(New Technology), 신에너지(New energy) 등 5가지 분야에 혁신을 주도하겠다는 ‘5신(新) 전략’을 발표했다.
온라인, 오프라인 매장과 물류를 통합하여 새로운 유통 기업이 되겠다라는 비전은 물론, 금융과 기술, 에너지를 결합하여 지속 가능하고 시장 지배적인 플랫폼이 되겠다는 의지까지 보여주었다. 이러한 마윈 회장의 미래 비전에는 ‘알리페이’로 대표되는 결제 시스템과 빅데이터가 필수적이다. ‘결제 데이터’는 구매 이력, 프로모션 사용 여부, 고객 정보, 판매 채널 등 고객 접점에서 생성되는 많은 데이터를 선물해준다. 타오바오 생태계에 이미 들어온 수 억 명의 중국 소비자들은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구매 데이터를 생성하며, 이를 통해 소비 트렌드의 변화에 대한 인사이트를 도출해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알리바바는 상품과 서비스에 콘텐츠를 결합하는 ‘트랜스 리테일(Trans Retail)을 연구하고 있다. 축적된 빅데이터와 미디어 콘텐츠, 리테일의 결합을 통해, 어떻게 상품을 노출하는 것이 인지도와 클릭률, 그리고 매출을 개선시키는데 효과적인지 고민하여 플랫폼 내의 판매자들에게 제공한다. 이를 위해 알리바바는 TV 프로그램과 동영상을 방영하는 미디어 플랫폼 ‘유쿠’의 지분을 매입하고, ‘차이나비전’ 미디어그룹을 인수하여 ‘알리바바 픽처스’를 설립하였다.
또한 O2O의 영역을 개척하여 알리페이의 사용영역을 높이는 것에도 집중하고 있다. ‘아마존’이 미국의 식료품 체인 ‘Whole Foods’를 인수하고, 무인 상점 ‘Amazon Go’를 런칭한 것처럼, 알리바바 역시 무인 편의점 ‘타오 카페’를 런칭하여 알리페이와 O2O의 연계성을 높였다. 또한, ‘인타임백화점’을 인수하여 옴니채널의 실험대이자 허브로 이용할 계획인데, 온-오프라인을 결합한 알리바바의 확장된 생태계는, 알리페이를 통해 더욱더 공고히 결속되고 있다.
이러한 거대 리테일 기업의 플랫폼화와 결제 방식의 독점은 북미, 유럽 등 다른 선진국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아마존 역시 ‘아마존페이’를 통해 아마존의 플랫폼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바일 결제 수단을 이미 확보해두었다. 이 유통 공룡은 최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100개국을 대상으로 일정기간 동안 무료 배송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아마존이 소비자들에게 내세운 조건은 단 세 가지 – 90불 이상 구매할 것, 아마존이 직접 판매하는 제품일 것, 그리고 거주 국가로 배송 가능한 품목일 것 – 뿐이며 그 외에 다른 조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90불 이상이라면 심지어 생수를 구매해도 무료 배송이 가능했던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클 수 있었던 이 이벤트에서 아마존이 노린 것은 무엇일까? 공식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목적은 세계 각국 소비 트렌드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아마존은 이 기간 동안 각 나라 소비자들이 어떤 품목을 아마존을 통해 주문하고, 배송지는 어디이며, 어떤 데모그라피를 가진 사람이 구매하는지에 대한 빅데이터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다음은 무엇일까? 전 세계 소비자들이 이 거대한 아마존의 플랫폼 생태계에 편입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아마존을 메인 채널로 이용하는 고객들을 늘리고, 주요 고객들이 많이 분포하는 지역에 물류 허브 구축을 고민하고, 유력한 로컬 O2O 채널을 확보하고, 그리고 ‘아마존페이’를 통해 쉽게 결제하는 것. 이런 것까지 계산에 넣어둔 영리한 이벤트가 틀림 없었을 것이다.
알리바바, 아마존과 같은 꿈을 꾸고 있지 않을까?
아마존에 이어 알리바바 역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알리바바는 2015년, ‘폭스콘’, ‘소프트뱅크’와 함께 인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스냅딜’에 투자했다. 중국에 이어 제 2의 인구 대국이자 향후 전자상거래 성장성이 무궁무진한 인도 시장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남아 유수의 온라인 쇼핑몰 ‘라자다’ 역시 알리바바에게 지분 투자를 받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메이저 이커머스 업체인 ‘토코피디아’ 역시 알리바바의 영향권 안에 존재한다. 이를 미루어볼 때, 알리페이가 알리바바 생태계 안의 모든 결제를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자리잡는 날이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다. 글로벌 수준의 범용성을 갖춘 지불 수단이 된다면, 그 뒤로는 좋든 싫든 모두가 플랫폼 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대동소이한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난립하고 있고, 시장을 통합할만한 결제 플랫폼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간편함과 방대함을 무기로 알리바바와 같은 기업이 진출하여 시장을 재편하지 않으라는 보장은 없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소비자는 두 번 생각하지 않는다.”
할인 쿠폰을 받기 위해 앱을 다운 받고 회원가입을 해야한다면 많은 수의 소비자들은 그냥 그 할인을 포기해 버린다. 또한 많은 수의 우리나라 2-30대들은 여전히 대학교 학생증(체크카드 기능이 포함된)을 발급해준 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삼고 있다. ‘현상을 유지하려는 힘’은 그래서 강하다. 처음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것은 쉽지만, 이미 장악된 시장에 진입하기에는 어렵다는 뜻이다.
방대한 소비 시장 곳곳에 연결되어 있는 ‘결제 시장’을 휘어 잡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많은 도전자들이 포기하게 된 이유다. 아직 우리나라 시장은 소비자와 판매자 모두 현재의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에 큰 불만이 없다. 모바일 결제가 편리하겠지만 새로운 시스템을 설치하여야 한다면 사람들은 고민할 것이고, 이 장벽을 뛰어넘게 하는 강력한 유인책이 필요하다. 초기 시장에 진입해 어느 정도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국내의 리테일러들과 신용카드 회사들이 아직까지 비교적 도전 받고 있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글로벌 소싱 파워를 갖추고, 전 세계 수 많은 가맹점을 갖춘 알리바바나 아마존이 진출할 경우, 시장은 새로이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번 아마존의 무료 배송 프로모션이 보여주었듯,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침투한다면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방향을 바꿔 스스로 플랫폼 안으로 걸어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플랫폼에 예속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플랫폼이 될 것인가. 시장은 더욱더 양극화되고, 선택지는 많지 않은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