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 위기가 인류의 생존과 결부된 문제로 인식되는 요즘이다. 지구 환경이 임계점을 넘어 인간을 위협하는 상태까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자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중심적인 가치관을 부추기는 데 일조한 측면이 있다. 미적으로 아름답고 색다른 디자인을 통해 인간이 접하는 최종 소비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최근 환경 위기를 의식한 듯 생태 보존을 위한 그린 디자인, 에코 디자인 등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한 쪽에서는 실제적인 효과 없이 세련된 취향을 환경 보호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태 중심적 가치관으로의 사고 전환을 내세우며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구현하고 있는 네리 옥스만(Neri Oxman)과 그의 연구팀이 주목받고 있다.
네리 옥스만은 건축가, 생물학자, 엔지니어, 디자이너 등 여러 직함을 가지고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며 미래를 그리는 생태적 디자인을 선보인다. 옥스만은 본래 의학을 공부했지만 외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전공을 건축으로 바꾸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연구소인 MIT 미디어 랩(MIT Media Lab)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된 이후에는 생물학, 컴퓨팅, 재료공학을 융합한 디자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현재는 독립 후 프로젝트를 지속해나가는 중이다.
옥스만은 MIT 미디어 랩에 재직할 당시 Mediated Matter(매개 물질)이라는 이름의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연과 기술을 결합하는 여러 작품을 제작했다. 자연의 작동 원리를 탐구하고, 변화의 프로세스를 디자인 오브제로 풀어내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 예를 들면 물질과 환경 사이에 놓인 오브제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디자인 모델을 제안하는 식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물질 생태학(Material Ecology)”이라 부른다. 물질 생태학은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과학적으로 개발된 소재와 디지털 제조 방식을 통해 유기적 물질을 디자인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를 통해 자연을 닮은 생성 프로세스를 개발하고 기술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옥스만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꼽히는 <아구아오하>는 전부 천연 소재만을 이용해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이다. 아구아오하는 스페인어로 물구멍이라는 뜻으로, 새우 껍질에서 발견되는 키틴, 레몬과 사과 껍질에 있는 펙틴, 그리고 우유 단백질에서 나오는 카세인을 재료로 사용했다. 특히 키틴은 지구에서 두 번째로 많은 생체 고분자로, 매년 1억 톤 정도의 양이 새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새우와 게, 전갈, 나비 같은 생물이 만들어내는 자연 성분으로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다. <아구아오하>는 자연에서 분해되도록 디자인되어 바다에 넣으면 해양 생명체에게 양분이 되고, 땅에 심으면 나무를 자라나게 한다.
옥스만은 2020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네리 옥스만: 물질 생태학(Neri Oxman: Material Ecology)》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전시회에서 재료공학과 3D 프린팅, 유기적 디자인을 융합해 자연을 닮은 오브제를 선보였다. 특히 이때 전시된 <실크 파빌리온>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실크 파빌리온>은 누에 6,500마리가 만들어낸 지름 3m의 돔 형태 건축물이다. 3D 프린트 기술로 건축물의 뼈대를 출력한 뒤, 누에를 풀어 고치를 짓게 만든 자연 친화적 건축물인 셈이다.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이유는 누에와 공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의류산업에 이용되는 누에들은 명주실을 뽑는 과정에서 삶아지기 때문에 모두 죽게 되는데, 옥스만 팀은 <실크 파빌리온>을 통해 누에와 같이 직조하고 같이 생존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낸다.
누에는 밀도가 높고 어두운 곳으로 이동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옥스만은 누에의 이러한 특성을 활용해 패널의 구멍 위치를 만들고, 표면의 빛과 열을 조절함으로써 이러한 구조물을 만들어냈다. 규모를 건축물 크기로 키운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6,500마리의 누에가 만들어낸 명주실은 6,500km에 달하고, 누에가 건강하게 변태해 나방으로 변한 후에는 150만 개의 알을 낳는다. 이는 구조물 250개를 더 만들 수도 있는 양이다.
자연과 공생한다는 디자인 원칙을 바탕으로 도전한 다른 기획으로는 입고만 있어도 치료가 되는 옷이 있다. 옥스만 팀은 우주의 행성 간 항해를 상상하면서 이 옷을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우리 행성과 그 너머에서 맞이할 우리 종족의 미래를 짐작해 보는 기회”라고 말한다. 인간의 장기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이 옷은 어둠 속에서는 스스로 빛을 내고, 햇빛을 받으면 당과 바이오 연료를 생산한다. 인간의 손상된 세포 조직을 회복하는 데도 쓰일 수 있다.
이들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옷을 제작하기 위해 합성생물학을 적용해 미생물 군집을 만들어내고 피부의 손상된 조직을 치료하도록 했다. 구체적으로는 바다와 담수호에 서식하는 시아노박테리아와 사람의 소화기관에 잔존하는 대장균을 배합해 만든 것인데, 하나는 빛을 당으로 전환하고 다른 하나는 당을 이용해 바이오 연료를 만들어내는 미생물이다. 자연에서는 상호작용하지 않는 두 미생물을 배합해 의류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도록 설계하고, 이를 통해 우리 몸과 몸에 서식하는 미생물 사이의 공생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인 아이리스 반 헤르펜(Iris van Herpen)과 협업해 만든 의류도 있다. 산호충류에서 추출한 물질로 3D 프린팅 하여 망토와 스커트를 만들었는데, 윤곽선은 딱딱하고 허리 부분은 유연하게 디자인되었다. 모델의 걸음걸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태가 변화하는 이 작품은 2013년 파리 패션위크에서 선보였을 때 큰 호응을 얻었다.
동료 교수 크레이그 카터(Craig Carter)와 공동 연구를 진행한 의자 프로젝트도 있다. 이들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불규칙한 표면 패턴을 디자인해 우리 몸의 모양에 적합할 뿐 아니라 세포 조직의 생리학적 특성에도 잘 맞는 의자를 만들어 냈다. 강도, 투명도, 색 등을 달리하면서 인체의 압력이 높은 부분을 고려해 디자인되었다. 자연이 그러하듯, 이 표면에서는 다른 재료나 부품이 추가되지 않고 연속적인 느낌으로 이어진다.
앞으로의 디자인은 자연과 공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건축과 예술, 자연이 결합해 만들어진 네리 옥스만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미생물과 우리의 몸,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공생하는 새로운 생태계를 접하게 된다. 옥스만은 “앞으로 우리가 디자인하는 모든 것들이 자연적 생태환경에 연결되고 적응하고 반응하기를 기대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경계를 초월하는 그의 생태적 디자인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