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일상의 안전을 추구하는 공공디자인. 우리나라에 공공디자인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유치한 대규모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한 준비가 경기장 안팎에서 한창이었다.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 서울이란 도시의 기능과 효율을 높이고 시민 의식을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 계속됐다.
신호등, 가로등, 가로수 등 거리 환경과 공공 공간에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 적용됐다. 서울의 교통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올림픽대로를 건설하고 횡단보도를 접한 차도와 보행로의 경계를 낮췄다. 장애인을 위한 점자 안내판과 점자 보도블록을 설치하고 건물 출입구의 휠체어 통행을 위한 경사로와 리프트, 장애인 주차장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조치도 마련됐다.
이외에도 공공 화장실 정비와 이용문화 개선 운동이 이어졌다. 대중교통 시설 개선과 질서 있는 이용을 위한 한 줄 서기 운동, 공기 질 개선을 위해 주요 난방 공급원이었던 연탄(석탄)과 석유를 천연가스로 대체하는 등 여러 노력이 뒤따랐다. 올림픽 경기장과 선수촌 아파트를 중심으로 외국인을 배려한 안내 사인과 픽토그램이 도입되기도 했다.
우리의 오늘을 진단하다
지난 10월 진행된 <공공디자인 페스티벌 2022>는 디자인을 매개로 대한민국의 오늘을 점검하는 자리였다. 서울 문화역서울284와 성수동 문화공간 등 전국 80여 곳에서 개최되었는데, 축제 형식에 걸맞게 전시, 토론회 등 다양한 행사와 함께 창의적인 주요 공공디자인 사례를 선보였다. 전체 주제는 무한상상, ◌◌디자인(공공디자인)이다. 이번 행사는 그간 다양한 사회적 문제 해결에 앞서 온 공공디자인이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일상에서 공공디자인의 역할과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문화역서울284의 2개 층을 가득 채운 주제 전시의 이름은 <길몸삶터: 일상에서 누리는 널리 이로운 디자인>. 길(거리·장소), 몸(인류·자연·생태·기후·환경), 삶(일상·이웃), 터(도시·주거) 이 네 가지 키워드로 우리 일상의 면면을 분류했다. 전체 전시는 주제전 몸, 삶, 터와 특별전 길이 연결되도록 꾸몄다. 총 마흔다섯 팀과 기업 및 민간단체가 참여했는데, 전시 총감독을 맡은 안병학 홍익대 교수는 “키워드마다 지속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문화역서울284의 1층 중앙홀은 <서로서로 놀이터>로 채워졌다. 시소, 대형 튜브와 쿠션으로 채워진 체험형 공간으로 관람객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보이는 3등 대합실에는 <두루두루 시장>이 길 위에 들어섰다. 말 그대로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생산자와 전시장을 찾은 소비자를 위한 장터다. 팬시 용품부터 서적, 먹거리 등 다양한 상품이 등장했다. 여러 업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성을 콘셉트로 삼는 상품과 이야기들이 매주 새롭게 업데이트됐다.
전시 동선은 주제전 삶으로 이어졌다. 민간 기업체들이 작가들과 협업해 공공디자인에 흥미와 상상력을 더한 작품과 만날 수 있었다. 눈에 띈 작품으로는 <지구를 위한 더 나은 선택지(紙)>가 있었는데, 재단하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자투리 종이를 모아 건축용 타일 등 새로운 쓰임을 만든 Bakepaper 등을 모은 두성종이의 작품이다.
부인 대합실 중앙을 차지한 마르쉐@의 <마이크로코스모스: 공생의 생태계>도 시선을 끌었다. 농부, 제빵사, 수공예가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사람 냄새나는 시장의 축소판으로, 일상을 단면을 보여준다. 대형 검은 원판 위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프린트된 종이 인형이 촘촘히 자리했다. 모두가 무대의 주인공이고 조연이다. 프로필 옆의 QR 코드로 들어가 보면 그들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마르쉐@가 그동안 추구해온 소비자와 직접 만나 대화하고 장을 보며 서로 연결되는 사회를 만든다는 콘셉트를 잘 드러냈다.
현대백화점의 <Project 100: 종이의 여정>에서는 종이로 만든 쇼핑백과 와인 캐리어로 자원 순환과 공생의 생태계 만들기 사례를 소개했다. 백화점에서 소비되는 연간 약 8,700톤의 폐지를 모아 재생 용지로 활용하는 방법들이 전시됐다. 주제전 터는 2층에 마련됐다. 역 회의실의 <가가호호>는 우리의 주거 공간인 집이 사생활 보호와 사회적 상호 작용을 모두 만족시키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데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제시했다.
도시의 풍경을 바꾸다
지자체의 우수 공공디자인으로 꼽힌 서초구는 이번 페스티벌의 전국 80개 주제 거점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서초구의 공공디자인은 크게 두 가지 이슈에 주안점을 뒀다. 하나는 기후 변화, 다른 하나는 안전이다. 물론 그 바탕은 시민 모두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함이다.
먼저 기후변화 프로젝트는 <서초 기후 변화 대응 공공디자인>으로, 서초의 옛 이름인 서리풀 시리즈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갖춰가고 있다. 이 사업은 서리풀 원두막, 서리풀 이글루, 서리풀 온돌 의자로 구성된다. 서리풀 원두막은 뙤약볕 아래에서 교통 신호를 기다리는 시민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시설로 횡단보도 교통섬 등에 설치됐다. 서초구가 론칭한 이래 서울 각 지자체는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해 보편화되는 중이다. 서리풀 이글루는 버스정류장과 횡단보도 등에 설치한 온기 텐트다. 성인 12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규모로, 겨울철 버스나 교통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나마 칼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서리풀 온돌 의자는 겨울철에 버스를 기다리며 따뜻하게 기다릴 수 있도록 만든 발열 벤치다. 특히 서리풀 원두막과 서리풀 이글루는 세계 4대 국제환경상인 그린애플 어워즈에서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안전 프로젝트는 팬데믹 속에서 더 빛을 발했다. 서초구의 비대면 선별진료소는 국내 최초 첫선을 보인 후 비대면 선별진료소의 표본이자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진료의 모든 과정에 비접촉식, 도보 이동형 공간디자인을 적용해 의료진과 피검사자, 시민 모두의 안전을 확보했다. 다른 감염병에도 대응할 수 있는 상시 선별진료소로 만들어 안정성과 효율성, 지속가능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CNN, 르몽드 등 해외 언론에 잇따라 소개되며 K-방역의 대표 아이템이 되기도 했다.
전국 최초로 설치한 활주로형 횡단보도도 대표적 안전 아이템이다. 안전한 보행 환경을 만들기 위한 선진 교통안전시설이 배치되었는데, 횡단보도 양옆을 따라 매립한 LED 조명이 점등해 건널목임을 알려 준다. 야간뿐 아니라 미세먼지, 안개, 우천 등 기상변화로 인해 가시거리가 짧아졌을 때 운전자가 쉽게 보행자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스마트폰을 보며 걷는 스몸비족을 포함해 보행자의 안전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 우리 사회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일상을 이롭게 그리고 모두를 안전하게
전쟁, 팬데믹, 환경, 그로 인한 경제난 등 여러 위기가 불러온 불안이 여전히 지구 마을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오롯이 이러한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코로나19 가 직설적으로 보여주었다. 더 나은 미래와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간절함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시기이다. 우리 사회와 지역 커뮤니티 문제의 솔루션으로 공공디자인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이유이기도 하다.
모두의 안녕과 이로움을 지향하는 공공디자인이 아직 우리 생활에 곳곳에 녹아들지 못한 것을 여실히 확인하는 마음 아픈 가을이다. 공공 안전에 대한 인식이 우리 사회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큰 아쉬움으로 남는, 2022년 대한민국 가을의 끝자락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공디자인에 더 주목해야 하며, 공공디자인이 풀어야 할 과제와 할 일을 더 많이 남겨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