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문학주간을 맞이하여 문화·예술·교육·사회 전반에 대한 아티스트의 생각을 들어보는 인터뷰 프로젝트 <젊은 예술, 문학을 만나다>. 작가의 태도, 가치관, 창의성, 소통, 감성이 반영되는 작업이나 작품활동 이야기, 작가 개인의 생각을 따라가 보며, 문학이 우리 삶과 인간에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와 강점을 알아보고,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아티스트와 함께 예술과 문학의 미래를 그려봅니다.
유희경
시인
시와 희곡을 쓰면서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는 유희경 시인. ‘어떻게 하면 문학을 읽게 할 수 있을까’ 고민에서 출발, 낭독회를 진행하며 <2017 문학주간>을 맞아 ‘문학과 사회 -히든트랙 (세대, 페미니즘, 문학성, 시인들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들)을 진행합니다.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취향을 알고 있는 멋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한 권의 시집을 보기 전의 나와 보고 난 후 분명히 다름을 확신하기에 시에 가까이 가고 싶은 대중들이 편하게 시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그 것이 마땅히 해야할 일임을 실천하는 유희경 시인과의 인터뷰 지금 시작합니다.
PART 1. 아티스트를 소개합니다
Q. 문학주간2017 문학책방에 ‘위트 앤 시니컬(시집서점)’의 유희경 시인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시인 유희경입니다. 200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해서 지금까지 두 번의 시집을 냈습니다. 한 권은 ‘오늘 아침 단어’라는 시집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자리에 나무로 자라는 방법’이라는 시집입니다. 요즘은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고 걸로 더 유명한 것 같고, 또 한 쪽에서는 희곡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극 작가로 데뷔해서 많진 않지만, 이따금 희극을 연극으로 바꿔서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 유희경 시인의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시’를 쓰고, 시인이 되어야겠다 마음먹은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글쎄요, 고등학생 때부터 습작했었고 좋아하는 시인도 아주 분명하게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시를 써야겠다 생각했던 건 98년에 서울예술전문대학, 지금은 서울예술대학이죠.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서 그때부터 데뷔 전까지 계속 ‘시인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시를 써야겠다 마음먹은 건 우연하게 서점에서 샀던 시집 두 권이 큰 역할을 했는데요. 처음에 교과서로 시를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꼈고, 무엇을 사야 할 지 모르겠으나 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렇게 첫 번째로 읽었던 게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어요. 윤동주 시를 읽은 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독보적으로 시를 쉽게 쓰거든요. 은유적인 표현을 담으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난해하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시를 쓰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좋았고.
두 번째는 기형도 시인이었어요 그 당시에 이성복 시집을 사려고 갔다가 같은 표지에 속아서 기형도 시집을 샀는데. 당시 시기도 딱 맞았던 것 같아요.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었을 때 기형도가 가지고 있던 그 청춘의 어두움, 불가역성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저의 심정과 되게 잘 맞닿아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Q. 기형도 시집을 처음 접했을 그 시기, 어떤 부분이 공감이었나요?
그때 나이가 10대 후반, 20대 초반 이었어요. 지금 내 나이와 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이 그냥 뭔가 그림자 속에 파묻혀 있는 듯 어둡고, 웃고 떠들면서도 삶의 회의 같은 걸 느끼고, 그 모든 것들이 치기와 엄살로 포장되어 있던 나이. 그때는 그런 게 왠지 멋있어 보이잖아요.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고요.
시기에 맞는 두 권의 시집이 저를 시로 끌어당긴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그냥 욕망이었던 것 같아요. 왜 시인이 되고 싶었는지 고민하지 않고 그냥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열심히 시를 쓰지도 않으면서도 그랬었죠.
PART 2. 아티스트로서 시작점
Q. 수많은 고민 안에서 시인으로 등단하고, 시집서점도 맡아 운영하면서 꾸준히 작품활동도 하고 있어요.
계기가 있었죠. 거기에는 시집이 아니고 사람이 있었는데 대학 다닐 때 김소연 시인의 수업을 듣게 됐어요. 군대 갔다 와서 복학했는데 이미 제 동기들은 유명한 희곡 작가가 되었고, 나는 아직도 희곡을 써야 할지 시를 써야 할지 모르겠는 갈팡질팡 시간에 김소연 시인을 만났는데요.
“시가 욕망이나 어떤 테크닉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았죠. ‘진정성’ 이 단어는 쓰기 싫은데, 이 단어 외에는 그때의 심정을 표현할 수가 없어요. 시를 왜 써야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 시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나만의 발화는 어떤 것인가를 흔들어 깨워 준 사람이 김소연 시인이었어요.
Q. 김소연 시인의 어떤 점이 시인으로서 자아를 깨워주었나요?
엄청 쌀쌀맞게 대하셨는데 저를 대하는 그 거리와 태도가 궁금했어요. 그 전에 시를 공부할 때 만났던 시인들은 대체로 따뜻한 포즈로 학생들을 대했거든요. 근데 완전 다른 사람을 만난 거죠. 도대체 시인이 뭐길래라는 생각도 들었고 시만 생각하면서 쓰는 사람인 것 같고, 호기심도 있었고, 따라잡아 보고 싶었던 마음도 좀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점점 커지다 보니까 제 관심사가 진짜 시의 부분으로 돌입했다고 생각해요.
어느 지점에 갔을 때는 ‘아! 내가 꼭 시인이 안 돼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냥 시 쓰는 것 자체가 마냥 즐거웠어요. 어떤 타이틀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때쯤에 모든 걸 내려놨었는데요. 이상하게도 그때 등단을 했어요. 마지막으로 신춘문예에 투고하던 날이 뚜렷하게 아주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데, 정말 돼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이었어요.
누구나 각자가 기억에 남는 등단의 시기가 있을 거예요. 누군가는 열망이 뜨거울 때 등단을 했던 사람이 있을 거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고 한데 저는 후자이고 왠지 그렇게 되어야 등단할 것 같아요. 제가 경험 한 부분에서 드는 생각이에요.
Q. 어떻게 보면 유희경 시인이 계속 시를 쓸 수있게 도움을 주신 분이네요.
김소연 시인은 지금 거의 저한테는 가족 같은 분이에요. 당시에는 일부러 그러셨던 것 같기도 해요. 지금 추측하는데, 가끔 이야기하시는걸 들어보면 일부러 그러셨던 것 같아요. 제가 너무 들이대고 너무 달라붙으려고 하고 너무 뜨거우니까 그걸 좀 식혀주려고 하셨던 게 아닐까? 지금은 감사하게도 제자가 아니라 친구, 동료로 대해주셔서 그 부분이 너무 좋아요.
Q. 문학 장르 중에서도 ‘시’는 어떤 매력이 있었나요?
시와 희곡 작업을 하는데 둘의 성격이 조금 달라요. 글을 쓸 때, 시는 괴로운데 희곡은 재미있어요, 그래서 희곡을 쓸때, 제가 희곡을 잘 쓰는지 못쓰는지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즐거우니까. 근데 시는 계속 고민을 하게 되죠. 이게 정확한가?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인가? 내 이름을 걸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시를 쓸 때는 너무 괴롭지만 고칠 때 즐거워요. 고칠 때는 그 막 아드레날린이 분비 되거든요 좀 이상하죠, 제가 써 놓은 것들을 무시하고 배제하고 고쳐나가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더 커요. 그래서 다른 장르에 대한 욕망이 적은 편이에요.
Q. ‘시’는 단어 하나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그 부분 때문에 어렵다고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요즘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시는 함축이 아니라 사적이고 내밀한 장르인 것 같아요. 시는 정말 대화하듯이 독서하지 않으면 읽어낼 수 없는 장르에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겠어 할 수 없어요.
‘나는 슬프다’라는 문구를 시에 적었을 때, 그 문장을 받아들이는 건 A부터 Z까지 다 다르거든요. 그래서 그 같은 문장이 A가 되기도 하지만 A는 B가 되기도 하고, 다시 C가 되기도 하고, Z가 되기도 하고, 다시 C이기도 하거든요 얼마나 많은 경험과 생각을 했는지, 어떤 사물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해 봤느냐에 따라서 시는 다각형의 물체처럼 다 다른 각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같은 모습이어도 보는 부분은 각기 다 다른 거죠. 간단한 예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마주할 때, 갑자기 얼굴의 뾰루지가 보일 수도 있는 거고, 당시 상태에 따라 내가 심적으로 받아들이는 내 얼굴의 모습, 다른 사람이 내 얼굴을 받아들일 때 모습 다 다르죠. 같은 사람이지만 동일하다고 얘기할 수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함축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시를 쓰는 거고 그것 때문에 글을 쓰는 거거든요. 글을 잘 쓰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시를 잘 쓴다는 것과 별개의 문제인거죠.
제가 어떤 시를 썼는데, 누군가는 그 시를 슬픈 연애시로 누군가는 혁명시로 받아들이더라고요. 저는 답을 내릴 자격이 없어요. 그걸 받아들이는건 독자가 교감을 통해 얻는거니까요. 누군가의 정체성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것 처럼요.
Q. 같은 ‘시’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해석하고 저마다 느낌이 다른거네요?
그럴 수 있다고 봐요. 내가 지금 어떤 것을 고민하고 있느냐에 따라 타인의 위치가 다르게 느껴지는 거죠. 내가 얼마 전에 어떤 경험을 하고 A라는 시를 썼는데, 누군가는 그 시를 아주 슬픈 연애시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혁명시로 받아들이더라고요. 저는 그 사이에서 답을 내릴 자격이 없어요. 저라고 얘기했지만 시인이죠.
시인은 자기가 쓴 시에 대해서 답을 내릴 자격이 없어요. 비록 어떤 관점을 가지고 시를 썼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고, 독자가 시와 대화를 통해서 얻음으로써 교감을 이루기 때문에 마치 누군가의 정체성에 대해 가타부타 얘기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거죠. 시를 쓴 사람은 시의 주인이 아니거든요. 저한테는 그 부분도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Q. 대중들이 ‘시’를 즐기고, 그 힘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먼저 시가 단박에 진입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우리가 학창시절이 접한 시는 교육이라는 목적과 문제풀이를 위해 시를 해석하는 방식이에요. 왜 우리가 흔히 우스갯소리로 ‘내 시가 시험문제에 나오면, 나도 틀린다’ 그러잖아요.
저는 시를 알고 싶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 우리가 테니스를 잘 치고 싶고, 수영을 잘하고 싶다면 일정의 훈련 기간을 갖고 나야 뭔가를 취득하죠. 예를 들면 식스팩을 얻는다거나 빠르고 유연한 수영 실력을 갖게 된다거나, 며칠 밤 철야를 해도 문제없는 체력을 갖는 것 같은 거요.
시를 읽을 줄 알게 되면 놀라운 정신세계를 가질 수 있고, 삶의 다른 즐거움이 생긴다고 확신하거든요. 그냥 무작정 시집 한 번 펼쳐보고, “이건 나한테 맞지 않아” 하고 던져버리면 그 세계를 영영 얻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세계를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그걸 알게 되면 어떤 노력을 하게 되냐 하면요. 시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지고 마치 테니스를 배우기 위해서 토끼 뜀을 뛰고, 수영을 잘하기 위해서 호흡법을 배우는 것처럼 어떤 다른 삶의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거든요.
Q. 시집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은 대중이 시를 즐기고 새로운 삶을 느낄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플랫폼이기도 한 것 같아요.
‘위트 앤 시니컬’을 연 것도 사실 시에 가까이 가고 싶은 분들께 나만의 시집,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시집을 권해드리고 싶어서였거든요. 앞서 말한 훈련에 일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죠. 예를 들면 저는 어떤 시집이 너무 난해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를 처음 읽어 보신 분들이 이 시집이 너무 좋다고 가져가세요.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그 사람한테는 다른 가능성이 열리는 거거든요. 그 시집만 읽어 낸다면.
서윤후 시인이 한 얘기를 제가 자주 인용하는데요. 낭독회 도중에 질문을 했어요. ‘시를 왜 읽어야 한다고 생각 하세요?’ 모든 시인은 모두 그 답을 주저해요. 서윤후 시인 역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뭐라고 딱히 정답을 낼 수 없는데, 한 권의 시집을 보기 전의 나와 보고 난 후의 나는 분명히 다르다. 아주 조그마한 것이 바뀌었을지언정 분명히 다르다. 다른 세계가 끝에 있는데 주저할 이유가 나한테는 없다”라고 얘길 하더라고요.
이 이야기에 완전히 동의해요. 제가 더 나아졌는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는지는 스스로 알 수 없지만,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보기 전의 저와 보고 난 후의 저는 완전 다른 사람이거든요. 조연호 시인의 ‘저녁의 기원’을 읽기 전에 저와 읽고 난 후의 저는 달라졌어요. 비록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각도만 다르게 했더라도요. 나아진다고 말할 수 없지만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하죠.
PART 3. 사회구성원으로서 아티스트의 생각
Q. 시를 쓰고, 서점을 운영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최근 유희경 시인 개인적인 고민이 궁금해요.
음.. 알면 알수록 이 사회를 좀 더 들여다 보게 되면서, 여태까지는 학생의 태도로 보았다면 지금은 대단히 실리적인, 경제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게 되는데요. 어느 쪽에서 봐도 이 사회의 구조가 지나치게 자본주의에 함몰되어 있어요. 그게 저의 요즘 제일 큰 고민이에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돈이 아니고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뚜렷하게 보이는데 거기에 갈 수 있는 수단이 돈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히 절망하고 있어요. 그게 너무 천박한 사실이라는 것, 이걸 누가 통제하거나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에 대단히 절망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까 더 깊은 관심이 가요. 이 사회가 어떻게 하다가 이 모양이 되었나. 어떻게 보면 장사꾼 다 되었죠.
우리가 몽상할 여유, 몽상하는 방법에 대한 고찰을 소중하게 여겼다면 말도 안 되는 사회 차별, 폭압, 더러운 댓글을 보지 않아도 됐어요. 이 사회가 SNS에 올리는 간단한 질문과 몇 글자 대답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게 문학이고, 그래서 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우리 사회에 문학이 필요한 이유와 연결된 고민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문학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너무 돈만 본 거에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된 거에요. 우리가 몽상할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다고 봐요. 몽상할 여유, 몽상하는 방법에 대한 고찰, 몽상한 후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이런 게 있었으면 이번 여름이 이렇게 덥지 않았어요.
저는 장담해요. 여름이 이렇게 덥지 않았고요. 우리가 SNS에서 여성 혐오에 대해서 싸우지 않아도 됐고요. 적어도 타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더러운 댓글 같은 거 보지 않아도 됐고요. 말도 안 되는 사회 차별과 폭압에 대한 수긍과 납득 혹은 이 악물고 참아내는 견딤 같은 건 없어도 됐다고 저는 생각해요.
물론 제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니까 더 그렇겠지만, 어쨌든 이 사회에서 나사가 몇 개 빠졌는데 그 게 고민인 것 같아요. 우리 삶에 대한 고민, 인간에 대한 고민, 내 옆, 내 곁에 대한 고민과 그 과정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고 너무 간단하게 처리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모든 생각을 SNS 트위터 140자로 끝내려고 하잖아요. 너무 간단하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남들이 올리는 이미지로 다 이해하려고 하고, 좋아요 천 개 달리면 내가 인정받은 것 같고, 내가 막 동의받고 이해받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요. 80% 아니 30%만 동의했어도 저도 좋아요 눌렀을 것 같아요. 근데 그게 같은 경제효과를 일으키잖아요. 거기서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이 사회가 그렇게 간단한 질문과 간단한 행위로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방법 중에 제가 알고 있는 한 가장 분명한 방법은 문학 이거든요 그래서 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2017문학주간에서 문학책방으로 사람들이 일상에서 문학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에 동참하셨어요.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형식이 아닌 것 같아요. 야속하게도 낭독회도 문학을 다르게 즐길 방법이라기 보다는 책을 읽게 만드는 방법인 것 같아요. 문학주간도 마찬가지고 이 인터뷰도 그렇고 우리 낭독회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하면 읽게 만들 것인가’에서 시작된거죠. 이렇게 하면 시를 더 읽고 이렇게 하면 문학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어라고 제안하는 거죠. 문학은 읽어야지 존재할 수 있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어요.
낭독회도 좀 더 편하게 읽게 만들기 위해 ‘다른 각도로 읽어 보는 것’이라고 보시면 돼요. 책을 읽었을 때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소리를 내고 들어서 조금이라도 더 이해가 된다면 사람들이 읽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갖고 스스로 찾아서 읽어 볼 거거든요. 그랬음 좋겠다고 시작했던 게 낭독회였어요.
문학을 향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조금 더 나아질 거예요. 천만이 문학을 읽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지만, 천만이 문학을 읽었을 때 분명히 더 나아질 거라 확신해요. 천만이 책을 사는 시대가 아니라 책을 읽는 시대가 됐으면 해요. 문학주간도 그런 노력의 목적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고, 그 방식이 맞든 돌아가는 길이든 지나가는 길이든 계속 시민들이 조금 더 가깝게 예술을 느낄 수 있게 논의하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사람들을 좀 더 호기심을 느끼게 만들어주는게 중요한 거죠.
모두가 시를 쓰고, 모두가 시집을 읽을 필요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시인 한 명만 있으면 되죠. 시 뿐만 아니라, 영화도 볼 줄 알고, 그림도 볼 줄 알고, 음악도 들을 줄 아는 자기 만의 취향을 딱 가지고 있는 사람이 멋있거든요.
Q. 우리는 왜 시를 읽어야 할까요? 시를 읽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전에 박준 시인이 그런 얘기한 적이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시집을 읽는 풍경을 상상을 해봐라 그것도 지옥인 것 같다” 시가 필요한 타이밍이 있겠죠 그때 누군가는 시를 쓰는 거고요 누군가는 시를 읽는 거예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시인 중에서도 물론 인간적으로 별로인 사람들도 있죠. 그런 부분에서 ‘우리가 왜 도대체 시를 왜 읽어야 해?’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인 중에 멋진 사람들이 많아요.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꽤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시뿐만 아니라 영화도 볼 줄 알고 그림도 볼 줄 알고 음악도 들을 줄 아는 자기만의 취향을 딱 가지고 있는 사람은 멋있어요.
시도 그런 거예요. 굳이 모든 시집을 다 읽을 필요 없어요. 수많은 시인 중 한 사람 정도만 알고 있으면 돼요. 알고 있고 읽어 봤고 좋아하는 시인이 있으면 돼요. 어디 가서 ‘저, 시 좋아합니다.’ 이런게 아니라 ‘저는 누구누구 시인 좋아하는데 어떤 시집을 재미있게 봤어요’ 혹은 ‘어떤 시집을 읽었는데 어떻더라고요’ 얘기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나의 생각, 색깔, 취향을 대신 보여주는 거죠.
PART 4. 공식질문
Q. 시를 쓰고,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는 이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책임감’이에요. 행복해서 매일매일 출근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걸 해내면 같이 일하는 사람과 더 많은 사람이 즐거움을 느끼니까요. 그게 저에게 책임감이자 일의 의미인 것 같아요.
제가 이 일을 시작하면서 일찍 출근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좀 더 늦게 출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늦게 가면 혼난다는 생각에 쫓기고, 혹은 아무도 뭐라고 하진 않지만 혼자 자책하게 되고.
위트 앤 시니컬 일을 시작하니까 아, 이런 게 책임감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행복해서 일찍 출근하는 게 아니라, 나를 혼내는 사람, 눈치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내가 가급적 일찍 출근하게끔 만드는 거에요. 콧노래를 부르면서 ‘내일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지’ 이런게 아니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 그리고 그 걸 해내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거나 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저한테 책임감이고 일의 의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슬픈 것 중 하나가 트위터에서 유행하는 ‘저 오늘 퇴사했어요. 축하해 주세요’인데.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구나 동시에 이 사회가 정말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있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시 쓰기 싫어 죽겠는데요. 시 마감 때도 아, ‘시 쓰기 너무 싫어’하면서도 시를 쓰는데요. 제가 싫은 건 시 쓰는 일이 아니라 시가 안 되는 나 자신이 싫거든요. 시 쓰는 건 너무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찾았고 가끔은 좋기도 한, 그게 지금 제가 하는 일이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그걸 찾았으면 좋겠어요.
Q.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 문학을 하는 시인으로서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가르치거나 비윤리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리고 적어도 시인으로서 ‘시’를 갖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나의 만족을 위해 글을 쓰지 않고 싶어요
저는 선생님이란 말을 제일 듣기 싫어해요. 시를 쓴다고 예술을 한다고 더 우월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좀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그런 저한테 마이크와 스피커가 주어진 것뿐이죠. 제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들어주는 사람이 500명이든 1000명이든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르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비윤리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내 행위와 내 발언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적으로 봤을 때 그리고 시라는 것 가지고 기획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걸로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이걸로 더 많은 사람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이 시집이 더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시를 갖고 시집을 파는 서점 주인으로서는 그 부분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시인으로서는 그러지 않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