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에서 제품을 산다는 것은 제품 그 자체만을 구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품 브랜드 구매를 통해 그 브랜드의 가치를 소비한다. 고객의 지갑을 열고 닫는 브랜드의 가치는 브랜드가 추구해 온 신념과 그간 쌓아온 이미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기에 각 브랜드들은 개별 상품의 품질뿐 아니라 브랜드의 총체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제품력과 달리 브랜드 이미지는 단시간에 구축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브랜드들은 어떻게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을까? 또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들의 브랜드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브랜드들의 동향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예술이라고 답하는 듯하다. 예술은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명확히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기성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복제할 수 있는 시대 속에서 브랜드들의 예술 마케팅은 브랜드의 대체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드러낸다.
#1 GUCCI GAOK
구찌의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는 밀라노의 몬테 나폴레옹점, 뉴욕의 뉴욕 5번가점, 서울의 청담점처럼 매장이 위치한 주소지의 명칭을 따 이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생긴 구찌의 두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인 구찌 가옥에는 주소지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 대신 스토어 이름에 한국의 전통 주택인 가옥을 붙여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구찌가 융합될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태원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또한 구찌가 추구하고자 하는 브랜드의 이미지와 연관된다. 구찌가 추구하는 젠더리스 룩을 플래그십 스토어에 주력 배치함으로써 이태원의 개방적인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스토어 내부의 원형 계단 또한 이태원의 클럽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지리적 강점까지 부각시켰다.
구찌 가옥의 인테리어 또한 여타 브랜드들의 플래그십 스토어와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브랜드 전시를 목적으로 하기에 브랜드의 역사와 로고를 테마로 삼는다. 그러나 구찌 가옥은 한국인 조각가 박승모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외관을 幻(환:헛것)을 주제로 한 스테인리스 작품들로 꾸며 명암의 대비를 표현했다. 숲과 나무를 모티브로 한 박승모 작가의 작품은 명암의 대비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표현하고, 그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플래그십 스토어의 외관을 브랜드 전시를 위해 활용하기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환경의 가치를 보여주는 예술 작품으로 선택한 구찌의 전략은 성공적인 예술 마케팅 사례로 꼽힌다.
#2 Louvis Vuitton in B39
7월 7일 루이비통은 21FW 멘즈 컬렉션인 #LVMenFW21을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배경은 부천의 아트벙커B39, 모델은 루이비통의 글로벌 앰버서더인 BTS였다. 부천의 아트벙커B39는 하루에 200톤의 쓰레기를 처리하던 소각장이었지만 2014년 폐산업시설을 재생하는 산업에 선정된 뒤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소멸의 공간에서 창조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부천의 아트벙커B39에서 루이비통의 컬렉션이 공개된 것은 루이비통이 지향하는 가치인 지속가능성을 잘 담고 있다.
2021 SS 남성 컬렉션에서 처음 선보인 친환경 로고는 업사이클링에 대한 루이비통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올해 7월부터 판매하고 있는 2021 FW 컬렉션의 펠트 라인 제품들에도 해당 로고를 붙여 친환경 제품임을 강조했다. 펠트 라인 제품은 모두 오가닉 코튼, 재활용 폴리에스테르, 양모 소재의 자카드 등과 같은 친환경 소재를 활용했으며, 안감은 재고 소재를 재활용했다. 가방 스트랩과 손잡이에도 글로벌 친환경 인증인 LWG(Leather Working Group) 인증을 받은 가죽만을 사용했다.
루이비통은 2025년까지 모든 제품을 친환경 방식으로 제작하는 일과 2030년까지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률을 0%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는 프랑스의 생수 브랜드 에비앙과 협업해 신진 디자이너들의 지속가능한 디자인 참여를 독려하는 액티베이트 무브먼트 컬렉션 및 공모전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속가능성과 환경에 대해 고찰하는 루이비통이 새로운 컬렉션을 공개하는 장소로 부천 아트벙커B39를 택한 것은 루이비통이 지향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쓰레기를 처리하던 공간 또한 예술 공간이 될 수 있으며, 공간이 어디까지 재활용될 수 있는지를 실험한 아트벙커B39는 소재의 재활용 가능성과 친환경을 추구하는 루이비통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게 루이비통의 컬렉션은 패션-예술-환경의 조화를 성공시킨 대체 불가능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3 Aesop – Othertopias
이솝은 지난 7월 새롭게 선보인 세 가지 향수 미라세티(Miraceti), 카르스트(Karst), 에레미아(Erémia)를 아더토피아 컬렉션(Othertopia Collection)이란 이름으로 공개했다. 아더토피아는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곳, 현실도 비현실도 아닌 곳, 이곳도 저곳도 아닌 곳을 뜻한다. 향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사라지고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이 돋보이는 이솝의 이번 컬렉션에는 세계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예술적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공간과 향기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르라보의 시티 익스클루시브 컬렉션과 유사해 보이지만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르라보는 특정한 도시를 상징하지만, 이솝은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을 상징하지 않는다. 고객들로 하여금 향을 통해 공간을 그리게 만들어 준다. 같은 향을 맡았더라도 개인의 상황과 감정에 따라 각자의 공간이 다르게 그려진다. 이솝은 우리가 공간을 그려볼 수 있게 만드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이솝은 고객들이 향수를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게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이 향수를 통해 그려 본 공간을 소개하는 전시도 선보였다. 각 향수의 모티브가 된 문학 작품을 공개했는데 미라세티의 모티브가 된 허먼 멜빌의 <모비딕>, 카르스트를 만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에레미아에 영감을 준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 그것이다. 이 세 이야기는 모두 현실과 비현실, 현재와 과거, 육지와 바다와 같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솝은 이탈리아의 미디어 아티스트 Davide Quayola(다비데 콰욜라)와의 협업을 통해 이 문학 작품들을 형상화한 디지털 영상을 전시했다. 새로운 향을 통해 아더토피아를 그려 보도록 안내하고, 자신들이 그린 아더토피아의 영상도 선보이는 이솝의 전시는 아더토피아 컬렉션이 지향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선보였다. 문학을 통해 향을 탄생시키고, 탄생한 향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그려낸 이솝의 기획은 브랜드의 제품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4 불가리 컬러 전시 숨 프로젝트
불가리의 컬러 전시회가 세계 최초로 국내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전시에서는 1930년부터 2021년까지 불가리가 구현해 낸 대표작 컬러들을 소개한다. 또한 불가리 주얼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컬러 젬스톤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름이 컬러 전시회인 만큼 이번 전시에서는 불가리 컬러를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 LG OLED와 협업을 진행했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불가리의 컬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컬러 전시는 젬스톤의 컬러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젬스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소개하기 위해 숨 프로젝트(Suum Project)에서 엄선한 7인의 한국 작가들(김종원, 노상균, 이세현, 이수경, 오순경, 최정화, 빠키)의 작품들과 불가리의 제품들을 함께 선보였다. 레드, 블루, 그린, 멀티 컬러로 이렇게 네 개로 나뉜 전시 공간에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레드 룸에는 루비로 장식된 작품과 흰색과 붉은색의 대비를 미디어아트로 표현한 김종원 작가의 작품이 있으며, 블루 룸에는 파란색 별자리와 사파이어의 조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린 룸에서는 불가리의 모태적 공간인 로마의 상징적 건축물 콜로세움의 원형 구조물에 에메랄드를 배치하고 전설 속의 동물들을 등장시켰다. 멀티 컬러 룸에는 빠키 작가의 조형물과 OLED를 통해 표현한 다채로운 컬러가 등장했다.
불가리는 이번 전시에서 불가리 제품의 아름다움을 한국 작가들의 예술 작품들과 미디어 기술을 활용해 표현했다. 브랜드의 역사와 지향해 온 가치를 소개할 뿐 아니라, 불가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컬러를 미디어아트, 조형물 등과 같은 예술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했다. 개별 제품의 매출 상승을 위한 기획이 아닌, 브랜드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인 예술 작품들을 통해 표현하고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불가리는 현대 예술과 주얼리를 접목한 예술적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5 Jaeger-LeCoultre 의 ‘Sound maker’ 전시
예거 르쿨트르는 한국에서 최초로 시계 전문 브랜드로서의 단독 전시를 진행했다. Sound Maker라는 전시 타이틀에 걸맞게 전시의 콘셉트는 르쿨트르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차임 시계의 본고장, 스위스 발레드주의 자연의 소리이다.
이번 전시에서 르쿨트르는 스위스 모던 아티스트인 지문(Zimoun)과 협업을 통해 전시 공간에 Sound Sculpture (사운드 스컬프쳐)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르쿨트르의 간결하고 정확한 워치 사운드와 지문의 작품인 사운드 스컬프처의 의도된 부정확성이 조화를 이루며 공간을 채웠다. 아티스트 지문은 사운드 스컬프쳐가 시계의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어 제품의 소리와 공간을 융합하여 공간에 울려펴지는 새로운 소리를 탐색하여 소리의 본질과 미학을 탐색하는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시 작품에 사용한 르쿨트르의 와이어와 금속 디스크는 모두 사람이 손으로 만들어 각각의 차이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은 반복될 수 없는 소리라는 점에서 자연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 르쿨트르는 지문의 작품을 통해 르쿨트르의 제품이 가진 고유성과 개성을 감각적으로 드러냈다.
르쿨트르의 제품들과 소리의 결합은 브랜드와 예술이 어디까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적 시도이다.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 등장하는 8D 영상 설치 작품은 르쿨트르의 제품들에 담겨 있는 기계적 소리와 자연의 소리와의 결합을 보여준다. 스위스 발레드주의 호수를 비롯한 자연의 소리에서 영감을 받은 해당 영상은 자연에서 온 소리와 시계 소리의 유사점을 발견하게 만든다. 자연이 동일한 소리를 반복할 수 없듯, 시계 또한 같은 제품의 시계일지라도 부품의 차이 때문에 같은 소리가 반복될 수 없다. 르쿨트르는 지문의 예술 작품을 통해 브랜드의 대체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6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
2018년 론칭한 남성복 브랜드 PAF(Post Archive Faction)는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대표적인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힌다. 이들의 옷은 당장 입을 수 있는 기성품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파프의 임동준 대표는 이런 예술적 시도를 인정받아 LVMH 프라이즈의 세미파이널 리스트에도 올라간 바 있다. 패션과 예술을 구분 짓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시대에 파프는 경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허물기 위해 지난 3월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아라리오 갤러리전에서 열린 Post Archive Faction Final Cut 전시에는 파프와 한국 현대 작가 8명(김병호, 권오상, 김인배, 이지현, 노상호, 돈선필, 심래정, 장종완)이 참여했다.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회에는 패턴을 개념화한 제품부터 조각까지 다양한 전시 작품이 등장했다. 독일에서 조형 예술을 전공한 파프의 아트 디렉터인 에리카 콕스(Erica Cox)는 옷의 패턴을 확장하여 만든 오브제를 선보이기도 했다.
옷과 조형물을 교차시켜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파프의 전시는 꽤나 실험적인 도전이었다. 실제로 판매되고 있는 파프의 옷들은 가격표까지 붙은 상태로 공간에 전시되어 무엇이 예술 작품이고 무엇이 판매하는 옷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런 전시의 의도에 대해 파프의 임동준 대표는 이 공간에서 옷과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파프는 예술과 패션이 다른 것인지를 묻는다. 가구, 인테리어, 시계, 건축 모두가 예술이 될 수 있는 현시대에, 예술의 구역을 엄밀히 특정 짓는 것 자체에 대해 문제 삼는 파프의 시도는 모든 옷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술과 예술이 끊임없이 확장되며 제품과 작품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파프의 전시회는 브랜드의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브랜드 소비, 이미지로의 전환
브랜드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과시적 소비와 직결되는 시대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자신만의 가치와 신념을 드러내놓고 표현하기 더욱 어려워진 현시대에 브랜드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프라이탁과 파타고니아의 제품을 소비하는 이들은 환경 보호라는 가치에 깊이 동감하고 있음을, 러쉬의 제품을 애용하는 이들은 동물 실험에 반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자신을 브랜딩하라는 시대적 명령 아래에서 소비자는 선호하는 브랜드 이미지를 이용해 스스로를 브랜드화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소비하는 기업의 브랜드가 개인의 이미지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다층적이고 복잡한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브랜드 소비 심리를 모두 과시 욕구로 환원하여 분석하는 것은 게으르고 지루한 설명일 것이다. 현시대의 대중들은 제품력뿐 아니라 가치와 신념 그리고 이미지를 통해 소비한다.
브랜드의 예술 마케팅은 이러한 맥락 아래에서 탄생했다. 브랜드의 이미지와 추구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술 작품과 전시를 통해 대중은 자신과 결이 비슷한 브랜드를 선택하게 된다. 공장의 대량 생산 속에서 탄생한 제품들일지라도, 그것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자유이자 권리이다. 그렇기에 제품 속에서 예술을 발견하는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