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가상이 실제를 넘어서는 과정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 증거는 크게 전 세계 기업의 시가총액 순위에서 드러나며, 작게는 SNS에 올릴 사진을 얻기 위해 현실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코로나라는 질병으로 인해 예상보다 한 걸음 더 빨리 우리 앞에 다가왔다. 이렇게 다가온 새로운 세상을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이고 질문을 던지는 분야가 있다. 바로 예술이다.
우리에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 같은 작품으로 잘 알려진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문학뿐 아니라 각종 자연과학이나 기술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실험정신은 색채론에서 엿볼 수 있다. 괴테는 색채론을 통해 뉴턴(Newton)의 색채론에 반박하면서 우리가 보는 색은 개별의 사물이 가진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사물과 나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지함을 이야기한다. 보이는 세상을 독립된 개체의 성질이 아닌,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각의 시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색채론이 당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외면받았지만, 예술가들에게 큰 통찰을 주고 환영받았다는 데 있다. 영국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는 실제로 괴테의 색채론을 읽고 자신의 작품세계에 반영했다. 그는 캔버스에 그린 세상을 단순히 배, 바다, 하늘, 사람처럼 개별적인 대상이 아니라, 빛을 맞아 반사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인식하고 그 모습을 그려냈다. 그렇게 터너는 고전을 닫고 근대 미술의 문을 연 사람 중 하나가 되었고, 후에 모네(Claude Monet)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 즉 철학과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때, 많은 경우 예술이 가장 먼저 그것을 받아들인다. 예술은 새로운 관점을 통해 달라질 세상을 상상하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존 세상과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우리로 하여금 전에 없던 세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한다. ‘본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세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시야를 우리에게 열어주었으며, 사진과 비디오 기술의 발달은 원본의 순수성에 대한 관점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가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탄생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 모든 변화의 앞선 지점에는 늘 예술이 있다.
애플(Apple)은 지난해 7월, 홈페이지를 통해 새로운 아트 증강현실 세션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애플이 발표한 3가지 세션은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거리에서 볼 수 있도록 한 [AR]T산책, AR 체험을 창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AR]T 연구소, 전 세계 모든 애플스토어에서 작가 닉 케이브(Nick Cave)의 작품 <Amass>를 체험하는 전시로 구성되었다.
이들 세션을 만들기 위해 애플은 뉴욕의 선도적인 현대미술관인 뉴 뮤지엄(New Museum)을 초청하고, 7명의 아티스트인 닉 케이브, 나탈리 뒤버그(Nathalie Djurberg), 한스 버그(Hans Berg), 차오 페이(Cao Fei), 존 지오르노(John Giorno), 카스텐 횔러(Carsten Höller),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를 선정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했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샌프란시스코의 예르바 부에나 가든(Yerba Buena Gardens) 혹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 내 그랜드 아미 플라자(Grand Army Plaza in Central Park) 등 공공장소들이 [AR]T산책의 전시공간이 되었다.
AR(Augmented Reality) 기술은 세계의 주요 공간에 작가들이 작품을 마음껏 전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작품의 크기, 무게, 설치 방식 등 어떤 것에도 제약이 없었다. 전시 작품은 가상이지만, 작품들은 실제의 공간에 전시되는 새로운 방식의 전시가, 현실과 가상의 중간 어디쯤에서 이루어졌다. AR은 가상현실로 불리는 VR(Virtual Reality)과 구분된다. VR은 완전한 가상의 공간에 사용자가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VR은 HMD(head mounted display)라고 불리는 장치를 쓰고 가상의 공간을 체험한다. 이와는 다르게 AR은 사용자의 현실 세계 위에서 작동한다. 사용자의 눈을 완전히 가리는 VR과 달리, AR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유지한 채 그 위에 가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VR은 관찰자가 가능한 가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감각을 통제한다. 이는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한 기획자의 명확한 의도와 계획이 존재하는 공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여태까지 예술을 접하기 위해 방문했던 미술관과 유사하다. 미술관에서의 예술 경험은 전시자의 기획안에서 만들어진다. 관찰자의 동선, 공간, 빛과 조명, 온도, 냄새 등 기획자가 의도하고 설계한 환경 안에 관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AR의 매력은 완전한 가상이 아닌, 현실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에 각각 한 발씩 딛고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점에 있다. VR은 우리가 직접 가지 못하는 가상의 미술관 속으로 들어가게 하지만, AR은 바로 현실의 내가 서 있는 공간을 미술관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앞서 소개한 애플의 사례가 미술관이 아닌 특정한 장소에 가상의 작품을 얹어 새로운 전시 공간으로 만들었다면, 다음에 소개할 프로젝트는 관람객 스스로가 자신의 관람 환경을 결정하고 즐기도록 만든다.
AR∙VR 전문업체 어큐트 아트(Acute Art)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AR의 세계에서 누구나 예술작품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난 3월 세계적인 아트토이 예술가 카우스(Kaws)의 작품을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에는 영국의 현대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분더카머(Wunderkammer)>를 발표했다. 호기심의 방을 의미하는 <분더카머>는 과거 유럽의 귀족과 학자가 자연물에서부터 예술 작품까지 온갖 진기한 것들을 모아 진열한 컬렉션(박물관의 전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행은 간단하다. 어큐트 아트 앱을 받은 뒤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에 원하는 장소를 지정하면, 그의 작품이 화면 속 공간에 나타난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은 태양, 구름, 무지개, 돌과 같은 자연물이 주를 이룬다. 거실 한가운데에 태양을 띄울 수 있고, 안방 침대 위 구름에서는 비가 내리며, 식탁 위에는 바다오리가 몸을 턴다. 이 모든 건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작가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전시의 성격을 띤다. 이전의 관람 방식을 떠나 관람객이 스스로 작품을 배치하고 원하는 방법으로 체험하도록 했다. 이는 전시의 공간과 경험에 관한 새로운 방식을 보여줄 뿐 아니라, AR을 통해 변화할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엿보게 만든다.
AR은 이제 곧 한 단계 더 큰 진보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에서 나타날 예정이다. 바로 AR을 위한 안경, AR 글라스다. 앞서 설명한 VR이 완전한 가상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VR 헤드셋이 필수였다면, AR은 AR 글라스가 필연적이다. 결정적으로 두 기술의 차이점은 눈앞에 위치하는 디스플레이의 투명함에 있다. 겨우 몇 밀리미터 두께의 얇고 투명한 유리 넘어 보이는 현실의 세상과, 유리에 비친 가상의 세상이 만나는 그곳에 앞으로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최근 글라스 발표 루머가 돌았던 애플부터 이미 이전에 한번 제품을 선보였던 구글(Google) 외에도 MS, 페이스북(Facebook) 같은 IT 기업뿐 아니라 삼성과 LG 등 국내 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두 AR 글라스 출시를 앞두고 있다. 사실상 AR 글라스는 가상기술을 기반으로 한 다음 하드웨어 전쟁의 격전지라고 볼 수 있다.
AR은 앞으로 예술뿐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다양하게 적용될 예정이다. 개별 모니터 위의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유리창 넘어 도로 위에 직접 교통안내 정보가 화살표와 함께 뜰 것이다. 건축 현장에서는 착공 전에 기획된 건축물의 모습과 내부의 디테일을 볼 수 있으며, 가상의 도면은 건축물을 만드는 과정 가운데 더욱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지도와 안내사인, 광고와 정보제공 등 삶의 전반에서 AR은 우리에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것이다.
지난 역사 속 새로운 세상과 관점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예술가가 늘 그 앞에 서서 우리에게 다가올 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졌듯, 현대의 예술은 다가올 가상의 세계를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에 걸쳐있는 것은 전시공간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