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를 전문가보다 애호가로 만드는
문화예술 직거래 플랫폼 4가지
문화와 예술은 생산자, 유통자, 소비자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다. 한데 최근 각 분야에서 생산자와 유통자 사이의 역할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제품을 파는 기업들이 판매 촉진과 우호적 관계 형성을 위해 소비자를 직접 찾아가는 것처럼, 문화예술 생산자도 내 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기꺼이 구매할 소비자를 찾아 나서고 있다.
하지만 신진 생산자들의 현실은 어떨까. 주류 미술계와 대기업 서점, 독점 기업들의 무력에 짓눌려 소비자와 접촉할 안정적인 경로를 찾지 못한 수가 허다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문화와 예술을 팔기 위해 직접 축제를 열고 소비자와 만나면서 이전에 없던 활기 넘치는 새로운 흐름과 장이 생겨났다. 소비자를 문화예술 전문가보다 문화예술 애호가로 만드는 축제-직거래 플랫폼 4가지를 소개한다.
A. 그림도시: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모여 있는 가상도시
B. 유니온 아트 페어: 작가 중심형 예술축제
C. 아시아프: 젊은 미술인들의 축제
D. 마르쉐@: 농부와 요리사, 수공예가와 함께 대화하는 도시
아트 페어의 목적은 판매다. 딜러나 수집가의 눈에 띄어 판매 실적을 두둑이 올리려는 화랑들이 모인 자리인지라 아무래도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이, 과정보다는 결과물이 중심이다. 그림도시는 이런 페어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작가 자체를 콘텐츠로 삼은 ‘아티스트 오픈스튜디오 마켓’을 지향한다. 작가와 예술 소비자가 작업 과정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림도시에는 작품만 걸린 큐브형 부스가 없다. 대신 작가의 작업실을 통째로 옮겨와 작가의 성향과 사고방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단순한 진열에 그치지 않고 작가별 컨셉과 스토리를 담은 매력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판매를 촉진하는 나름의 비주얼 머천다이징(Visual Merchandising) 전략인 셈이다. 결과물보다 창작 배경과 과정에 초점을 맞춰 관객과 작가가 개방된 상호작용을 나누고, 이렇게 하나의 장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도시는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 관광지요, 관객은 도시를 탐험하는 여행자다.
프로그램은 일러스트,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 37팀의 작업실이 그대로 옮겨진 <그림도시>, 독립출판 제작자∙출판사∙서점이 모인 <책도시>, 작품 원화를 전시한 <도시미술관>, 대담 및 아트∙출판 워크숍이 열리는 <도시학교>, F&B 및 휴식 공간인 <도시공원>의 5가지 ‘관광 구역’으로 구성했다. <그림도시>에 살고 있는 작가들은 작업 노트, 일지, 과정 등의 창작 활동이 전시된 작업실에서 이젤을 두고 그림을 그리며 관객을 맞이한다. 관객은 예술을 향유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결과물뿐 아니라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작품 구매 기준에 포함시키는 다차원적 경험을 누린다.
이 시대의 생산자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모두 바쁘다. 먼저 소비자를 찾아 나서고, 교류할 판도 만들어야 한다. 오도카니 기다리며 생산 활동에만 몰두하는 생산자는 없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화랑이 독점하던 예술 유통 구조에 반기를 든 현대예술 작가들이 아틀리에 밖으로 나와 소비자를 직접 찾아가는 획기적인 아트 페어를 만들었다. 유니온 아트페어는 작가들이 직접 기획, 전시, 홍보, 판매를 전담한 예술 직거래 장터이자 현대미술 축제다.
유니온 아트 페어는 메이저 화랑 등 주류 미술 시장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백여 명의 비주류 작가들이 등장한다. 덕분에 화랑의 선택권과 상업성을 의식하지 않은 실험적인 작품이 전시장 곳곳에 자유롭게 내걸려 창의적이고 현장감 넘치는 예술 직거래 플랫폼이 태어났다. 미디어 아트, 사운드 아트 등 다양한 장르 구색에 1~100만 원의 가격대로 벽을 낮춰 소비자의 작품 선택권도 넓혔다. 구매할 수 있는 작품을 대개 화랑이나 미디어로만 접했던 예술 소비자들은 신생 작가들의 참신한 예술을 소유할 흔치 않은 기회에 반색한다.
지속 가능한 대안적 미술 시장을 표방하는 페어답게 장소는 재생 건축된 복합문화상업 공간을 택했다. 페어의 핵심 요소인 작품 장터 외에도 공연과 라이브 페인팅, 렉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부대 행사로 축제의 성격을 강화했다. 축제의 A-Z를 작가들이 도맡기에, 협업과 공유는 유니온 아트 페어를 만드는 중요한 구심력이다. 페어가 성장하면서 최근에는 신진 작가뿐 아니라 국내 미술계에서 두터운 경력을 쌓은 중견, 원로, 소장 작가의 작품을 고루 제시해 한국 미술의 연대도 살펴볼 수 있다.
올해로 11회를 맞은 아시아프는 아시아 국적의 만 35세 이하 대학생∙청년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미술 축제다.
대학 미전이 사라지면서 졸업 전시 이외에는 관객을 만날 기회가 없던 미대생과 작가 지망생, 청년 작가들이 꼭 한 번씩 도전하는 등용문으로도 유명하다. 대학생들의 작품을 접하기 쉽지 않은 일반 소비자에게도 아시아프는 이들의 잠재력을 확인할 기회다. 회화, 조각, 영상, 사진 등 수천 점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소장할 수 있기에 수많은 예술 소비자들이 아시아프를 찾아온다.
아시아프의 시작은 젊은 미술인을 고무시키고 작가 지망생들의 길을 터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만 36세 이상의 숨은 중견 작가들도 발굴하는 <히든 아티스트>를 기획해 더 많은 예술 창작자가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마련했다. 가장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가 10명을 선정하는 <아시아프 프라이즈>, 참여 작가별 드로잉 3점을 모아 전시 및 판매하는 <드로잉 특별전-New Drawing>는 해마다 관객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도슨트가 된 작가가 작품을 직접 설명하는 <아티스트 도슨트 투어>는 소비자도 가장 정확한 작품을 설명 들을 수 있지만, 작가 또한 소비자의 작품 감상을 여과 없이 살필 수 있다.
아시아프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하지만, 작품이 판매된 수익을 모두 작가가 갖는 비영리의 대규모 아트 페어다. 물론 작품별로 가격 상한선이 있고 중견 작가들은 20%의 판매 수수료를 내야 하는 예외 사항이 있다. 하지만 여타 아트 페어와 달리 또래 청년 작가들의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한 작품을 작가와 소비자가 모두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시아프의 매력이다. ‘아시아프 세대의 탄생’이라는 워딩이 등장한 것은 아시아프가 갖는 예술 직거래 플랫폼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농부∙요리∙수공예가들이 제품을 팔기보단 대화를 나누러 모이는 도심 장터, 마르쉐@. 한 달에 두 번 모여 직접 기른 작물, 유기농 및 채식 가공품과 음식, 다양한 수공예품 등 우리가 먹고 쓰는 물건들을 가져와 파는 곳이다. 매월 둘째 일요일은 혜화동의 마로니에 공원에서, 넷째 토요일은 성수동의 언더스탠드에비뉴에서 열린다.
11시에 장이 열리면 2시에 물건이 동나는데도, 판매자들은 파장인 5시까지 자리를 지키며 시장을 찾아온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다. 감자 몇 알을 사더라도 감자를 어떻게 심었는지, 감자가 자라는 시골의 삶, 감자를 사는 손님이 도시에서 먹고 사는 이야기 등이 오간다. 돈을 주고 감자를 사도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르쉐@의 판매자가 건네는 음식 뒤에는 그의 신념과 성향이 놓여있고 소비자는 이것을 얻기 위해 마르쉐@에 찾아온다. 마르쉐@는 대형마트나 온라인 마트에서 장 보는 것이 익숙한 젊은 소비자들에게 있어 새로운 시장 문화이자 생산자와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이런 맥락으로, 마르쉐@가 장터와 함께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대화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요리사가 농부팀의 작물로 만든 특별한 음식을 손님이 먹고 즐기며 다 함께 대화하는 <씨앗밥상>, 농부의 밭을 찾아가 농을 경험하는 <농가행>, 슬로라이프∙도시농사 등 먹거리에 관한 온 세계 이야기를 나누는 <마르쉐@이야기>가 있다. 발효∙저장∙살림 등 다양한 주제의 워크숍을 열기도 하는데, 기장의 할머니가 제철에 보내는 기장 멸치로 안초비 워크숍을 열거나, 홍대의 카페와 연계해 향신료 워크숍을 여는 등 생산자와 소비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엮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