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상권의 흥망성쇠 ② 가로수길
“강남 속의 강북, 가로수길”
반면, 1980년대 인사동이 대중화되면서 그곳의 문화예술인들은 새로운 터전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사동 근처의 메인은 청담동과 압구정 로데오거리로, 가로수길은 이국적 볼거리와 부자 동네에 대한 동경 등이 섞여 있는 서민형 시장 상권이었지만 인사동의 작은 화랑과 건축설계 사무소, 스튜디오, 영화기획사 등이 이전해 오면서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지역이 되었다.
가로수길
1990년대 가로수길에는 패션 관련 업종이 많이 등장했다. 1989년 신사동에 프랑스 파리의 패션 전문교육기관 에스모드가 서울분교를 오픈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에는 서울모드 패션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또 정욱준, 임선옥, 서상영, 곽현주 등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쇼룸을 오픈하면서 주변으로 작은 옷가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패션 소호거리가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가로수길의 대표 의류매장 규모는 10평 정도에 불과했다.
가로수길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00년대의 일이다. 금융위기 이후 압구정이 고급 문화와 대중성 그 어느 것도 품기 힘든 애매한 지역으로 전락했지만, 임대료는 끝없이 올랐다. 개인 규모의 임차인이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임대료가 오르면서 소규모 상인들은 압구정 인근이지만 임대료가 저렴한 가로수길에 가게를 내기 시작했다. 마침 인터넷과 블로그, SNS의 보편화로 특이한 상점과 아기자기한 골목을 찾아다니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서 가로수길의 인기는 급상승한다.
<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를 낸 당시 광고대행사 TBWA의 제작전문 임원 박웅현 ECD는 가로수길의 인기가 높아지는 현상을 ‘외국 문화의 겉모습만 따라하던 한국의 트렌드세터들이 드디어 속 내용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가로수길에는 외국에서 경험을 쌓은 셰프가 레스토랑을 오픈하는 등 가게를 통해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전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에 인기를 얻었던 강남과 압구정, 청담동 등이 자기과시적이 소비행태에 근간을 두었다면 가로수길에서는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문화가 주를 이루면서 한때 ‘강남 속의 강북’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가로수길은 조그마한 패션숍이나 화랑 관련 업종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갤러리와 아기자기한 공방, 볼거리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많았다. 압구정과 청담동에서 살짝 벗어나 이곳만의 독특함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평일 오전에는 패션관련 직종 사람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저녁에는 강남 인근에서 퇴근한 직장인들이 가로수길을 찾으면서 하루 종일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가로수길 플래그십 스토어
좋은 입지와 안정적인 유입인구에 더해 인터넷에 가로수길의 공방과 맛집이 소개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대기업 자본의 대형 매장이 가로수길로 들어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단독주택이나 꽃집, 치킨집 등 소규모 매장을 볼 수 있었지만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과 법인 건물이 가로수길로 들어오면서 주변의 임대료가 크게 높아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개인 사업자들은 가로수길 인근의 세로수길로 가게를 이전했다. 처음 인기를 얻을 때만 해도 공방과 갤러리, 패션 편집숍과 카페, 맛집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지만 지금은 대형 리테일의 플래그십 스토어나 초대형 편집숍을 제외한 가게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형 리테일이 가로수길을 집어 삼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플스토어의 입점
대형 매장의 화려한 플래그십 스토어 사이에서 개성을 잃어가던 가로수길은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바로 국내 최초의 애플스토어가 가로수길에 입점하면서부터다. 가로수길에 들어온 애플스토어 2.0은 지역에 맞춰 공간을 디자인하고 문화를 표현한다. 건물 외관부터 눈에 띄는데,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특징을 반영해 입구 양 옆에 4그루의 나무를 설치함으로써 건물 입구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가로수길 애플스토어
또, 광장을 모티프로 해 판매가 아닌 체험을 제공하는 문화공간의 느낌을 강조했다. 가로수길 애플스토어 매장 가장 안쪽에는 ‘포럼’이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는 유명인사들의 강연장소로 사용하기 위해서인데 실제로 미국에서는 애플스토어에서 영화감독이나 유명인사가 관객을 만나는 등 여러 문화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이런 전략은 애플스토어 자체가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명소가 되기 위해서다.
세계적으로 면적당 매출이 가장 높은 공간이라는 애플스토어는 유동 인구라는 입점 조건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이 많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나름의 문화가 있고 지역 매출이 높은 곳, IT 트렌드를 주도하고 애플이 타깃으로 하는 고객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이런 판단 아래 한국에서는 신사동 가로수길이 낙점된 것이다.
그 판단처럼 가로수길에는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재규어와 르노삼성, 화장품 브랜드인 아모레퍼시픽 등의 팝업스토어가 운영되고 있는 등 트렌드와 유행을 가늠할 수 있는 상권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애플스토어가 입점하면서 패션을 넘어 IT라는 새로운 키워드도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 가로수길은 과거와 현재의 문화 자원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그 선택에 따라 앞으로의 가로수길 모습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