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EOULive] 서울이 문학이 될 때

서울이 문학이 될 때

에디터 이희조 사진 세바스티안 슈티제(Sebastian Schutyser)

문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실은 그리 낭만적인 일만은 아니다. 사진이나 언론으로는 담지 못하는, 그러나 담았어야 하는 문제적 모습이 바로 문학의 주된 땔감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서 1980년대까지, 한국 근대사의 대표 문인 다섯이 불러낸 다섯 가지 서울을 문학의 눈으로 좇아 보았다.

이상(1910-1937)

이상은 서양화를 그리고 건축기사로 일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1931년 시 <이상한 가역 반응>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섰다. 대표작으로 <오감도>, <거울>, 「날개」, 「봉별기」 등이 있다. 기생 금홍과의 드라마틱한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날개」 (1936)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다소 해괴하지만 지식인 특유의 날 선 목소리가 인상적인 도입부를 지나치면, 펼쳐지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으로부터 소외된 ‘나’의 일상이다. 기혼인 나는 아내와 구실이 뒤바뀌어 윗방에 격리된 채 사육 받는 듯한 삶을 살고, 아내는 날마다 내객을 들인다. 아내가 일하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생존을 보장받고 얼마간 용돈도 쥐여진다. 내객은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고, 아내는 나에게 돈을 놓고 간다. 이유가 무엇인가? 일종의 쾌감이 아닌가. 이불 속에서 연구하나 답을 얻지 못한 나는 돈을 들고 경성 거리로 나서지만, 돈을 쓰는 능력조차 잃어버린 나는 괜한 병을 얻고 올 뿐 “결코 안주의 곳은 아니구나” 깨닫는다. 그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아내에게 돈을 쥐여주며 쾌감을 알았다며 어깨춤을 추지만, 후에 병을 얻은 자신에게 주던 감기약이 실은 수면제였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거리로 뛰쳐나간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 나는 또 회탁(灰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독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비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곁 티룸에 앉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오고 설사 왔다가도 곧 돌아가니까 좋다고 생각했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백화점 옥상에 올라와서야 시각을 얻는다. 비로소 타인들과 자신, 삶을 본다. 그러나 회탁, 잿빛이며 탁하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외래 자본으로 세워졌으며 자본주의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는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내려다본 인간군상인 동시에, 그간 눈 돌렸던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어디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작가 이상에게 가장 많이 따라붙는 말은 두 가지, 천재 그리고 난해함이다. 동시대 대중과 문인들에게서는 물론 현대까지도 그의 작품은 다 해석되지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동시에 여전히 현대적이라는 찬사 역시 거머쥔다. 서울 태생인 이상의 출생연도 1910년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해로, 그는 평생 그 시대를 살았고 말년 1년 정도를 제외하곤 경성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상의 작품이 난해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대 서울이 그만큼 설명하기 힘든 공간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얼핏 정돈되고 화려하지만 들여다보면 다양한 요소가 기괴하리만치 섞여 있던 혼돈의 서울, 아니 경성. 이에 대한 이상의 언어는 사실 무엇보다 적확했던 게 아닐까?

「날개」 속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미쓰코시 백화점) | 중구 명동 소공로 63

서울 속 ‘이상’
– 이상의 집 |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
– 이상의 거리 | 중구 명동길 49

박태원(1910-1986)

서울 태생. 호는 구보. 일본 유학 후 1933년부터 이태준, 김기림, 이상 등과 구인회(九人會)라는 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좌익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으며,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1934)

집을 나와 천변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네— 하고 대답 못 했던 것을 뉘우쳐 본다.

작가끼리 동시대 친우였기 때문일까, 상황은 앞서 「날개」와 비슷하다. 겉보기에 전혀 다른 얘기 같지만, 무능한 지식인이 거리에 나와 답을 구한다는 점에서 핵심은 같다. 소설은 동경 유학까지 다녀오고도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우려, 그리고 혼인에 대한 채근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서는 구보 씨의 모습에서부터 시작된다. 간혹 팔자 좋게 산책하는 소설로도 알려진 모양인데, 그의 산책은 목적이 뚜렷하다. 수첩을 휴대하면서까지 일상을 관찰하고 확인하는 것. 왜였을까?

구보는, 차장대(車掌臺) 가까운 한구석에 가 서서, 자기는 대체, 이 동대문행 차를 어디까지 타고 가야 할 것인가를, 대체, 어느 곳에 행복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1930년대 경성의 사람과 세상을 관찰하는 구보 씨의 시선은 삐딱하다. 스스로 산책을 나왔다는 자의성, 그리고 본인은 그 삐딱함에 대해 별다른 자각이 없다는 점에서 유별스럽다. 화신상회에서 마주친 단란한 중산층 가정의 눈빛에서 자랑의 기색을 읽고 업신여기고픈 충동을 느끼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지인을 오랜만에 만나 그의 취향인 가루삐스(칼피스)를 외설적이고 저속하다며 속으로 욕하는 모습 등이 그렇다. 또한, 그러면서도 구보는 고독하다. 구태여 집을 나서는 발걸음부터 가벼워 보이진 않고, 어머니 때문이라고 둘러대지만 스스로도 무척 외로운 듯 끊임없이 여성에 관심 갖는다. 전차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두고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생각에 잠긴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 그러나 오히려 고독은 그곳에 있었다. 구보가 한옆에 끼어 앉을 수도 없게시리, 사람들은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도, 그들의 누구에게서도 인간 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도 결국 고독을 해소하진 못한다. 구보가 계속해서 확인하려 한 일상, 즉 생활(生活)이 고독의 원인이자 삐딱하게 보이는 대상 자체였기 때문이다. 지인이든 타인이든 모두 자신의 일상을 위해 바쁘고, 구보는 그 일상이 과연 영위할만한 것인지 회의를 거두지 못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활이 없으며 그들의 일상과 섞일 리 만무하다. 그가 직업 없이 겉돌며 산책을 나오고, 그래도 고독하고, 발견하는 풍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유다.

내일, 내일부터, 나,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의미심장한 것은 구보의 선택이다. 구보는 그러한 일상을 계속해서 배척하거나 혹은 융화되기로 하는, 엄밀히 말해 그 어느 쪽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내일부터 집에 있겠으며 어머니의 욕망을 존중하겠다는 그의 표현은 일상에 녹아드는 듯하지만, 집에서 하려는 것은 구직활동이 아니라 글쓰기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비로소 욕망의 도시를 이해한 구보 씨가 그 뒤로 쓴 작품이 궁금해진다.

김승옥(1941-)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45년 귀국해 전라남도 순천에서 자랐다. 1964년 발표한 「무진기행」은 오늘날까지 회자될 정도로 사랑받는 그의 대표작.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자행된 군부정권의 살육과 언론의 침묵에 대한 염증으로 절필했다.

「서울, 1964년 겨울」 (1965)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1964년 겨울, 서울의 어느 선술집. 세 남자가 만난다. 부잣집 자제인 대학원생 안, 구청 병사계 직원 김(화자인 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가난뱅이임에 분명한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 아저씨. 일면식도 없고, 서로에 대해 별로 알고픈 마음도 없다. 이름도 거론되지 않는 호칭처럼.

“평화 시장 앞에서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좀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보자 더욱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화신백화점 6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먼저 말을 주고받는 것은 김과 안이다. 그러나 그렇고 그런 자기소개를 마치자 서로 말이 끊긴다. 무엇이든 할 말을 고민하던 둘은 이내 순순히 의미 찾기를 포기한다. 김은 군참새 안주에서 파리를 사랑하냐는 물음을 떠올리고, 날면서도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에 사랑한다고 자답한다. 이에 질세라 안은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냐고 묻고, 김은 호흡에 따라 오르내리는 여자의 아랫배를 사랑한다고 답한다. 안이 동의하며 데모를 예로 든다. 4·19혁명으로 수립한 제2공화국을 5·16군사정변으로 뒤엎어 다시 독재 정부가 들어선 지 3년을 맞은 서울이었다.

황금 만능주의와 천민 자본주의가 만연했던 사회에서 개인은 기계의 부품처럼 오직 기호로써만 존재를 인정받았다. 평화 시장에서 몇 번째 가로등이 불이 꺼져 있는지, 불이 켜진 화신백화점 창은 몇 개인지 같은 쓸데없는 사실에 편집증처럼 집착하고 놀이처럼 소비하는 김과 안의 대화는, 실은 그 자신들의 처지와 다름없다.

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는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1,000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버렸단 말야, 악센트 말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거리는 영화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는 “그저 그래요”라고 웃고 있었다.

이후 엄청난 비극을 겪은 아저씨가 합류한 3인 구도에서도 단절은 여전하다. 비극 앞에 여전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심화한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김과 안은 더 큰 비극을 막지 못하지만, 이는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던 만큼 새롭지 않고 어떤 울림도 없다. 씨팔것으로 치부할 뿐이다. 「서울, 1964년 겨울」 속 그들의 만남, 사교(라고 부를 수 있다면), 헤어짐, 어느 곳에도 의미는 없다. 그러나 소설이 꼬집고 싶었던 것은 그 없음이다. 압축적 근대화 속에 혁명과 독재는 번복되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맹목적인 성장과 자본주의 맹신은 되레 인간이란 무엇인가 물었다. 하지만 이에 귀 기울이기는 힘들었다. 가야 할 곳은 많으나 정작 이유를 잃은 서울의 겨울은 추웠으므로.

최인훈(1934-2018)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6·25 전쟁 중 월남했다. 대표작으로 1960년 발표한, 남북한 모두에 환멸을 느껴 중립국으로 떠나는 주인공을 그린 소설 『광장』이 있다. 지난 2018년 여름 별세했다.

「크리스마스 캐럴」 (1966)

때는 1966년. 당시 서울에는 야간 통행 금지가 있어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최인훈의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몰래 집을 빠져나와 서울의 밤거리를 산책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상의 「날개」를 패러디한 듯, ‘나’는 밤 12시 자정의 시계가 울리자마자 겨드랑이에서 가려운 신호를 보내오는 증상을 겪는다.

12시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여자와의 밤 밀회를 기다리는 심정이다. 겨드랑의 기척에 온 신경을 기울인다. 툭. 툭툭. 됐다. 나는 지그시 웃음을 참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머리맡에 비상소집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순서로 접어놓은 옷을 재빠르게 주워 입고 사르르 문을 열었다. (…) 나는 담을 가볍게 넘는다.

나는 그렇게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한국은행(현 화폐박물관)을 시작으로 중국대사관과 화교학교가 있는 명동에 이른다. 영화에서 본 서양 도시를 꼭 닮은 거리가 나온다.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울이다. 추잡할 줄로만 알았고, 그래서 궁금하지 않았던 세상은 어느새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겨드랑이의 통증도 밤거리를 거닐다 보니 어느새 사라졌다. 명동 성당 앞 성구(聖具) 가게에 다다른다. 진열창은 밤에도 불이 켜져 있고, 그 안에서 밤을 새우고 있는 성 데레사와 성 아그네스의 조각이 말을 걸어온다.

그때 아그네스가 창밖에 있는 나를 보았다. 그녀는 데레사에게 눈짓을 했다. 어머 기분 나빠. 하고 데레사가 말하였다. 별 거지 같은 새끼 다 보겠네. 하고 아그네스가 말하였다. 뭐 저런 게 다 있니 오늘 밤엔 재수 옴 붙었다 얘. 하고 데레사가 또 말하였다. 기분 나쁜 니그로다. 얘. 가브리엘을 부르자 얘. 하고 아그네스가 말했다. 나는 질려서 얼른 자리를 떴다. 혼이 났기 때문에 성당 앞을 지날 때도 곁눈질을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났다.

순경 말고는 돌아다닐 수 없는 서울의 밤은 크리스마스로 대표되는 서구 문물과 자본주의의 욕망이 민낯을 드러내는 곳이었다. 서울의 지식인들이 애써 못 본 체하고 있지만 이미 서울을 잡아먹고 있었던 그것. 그것은 바로 현대 도시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서울의 밤에 홀려버린다. 차가울 것만 같았던 한국은행의 돌벽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오물이라 여겼던 트럭들이 오징어처럼 다리미질해놓은 쥐의 시체, 서울역 광장의 공중변소를 사랑하게 된다. 현대 도시로써 서울의 역사적 변화가 시작되던 1966년, 최인훈은 나를 통해 그 변화의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재현한다.

그 후 겨드랑이 통증 때문이 아니고서라도 나는 산책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서울의 밤을 혼자 알 수 있다는 느낌은 그를 매혹한다. 서울 밤의 독재자 나는 누구에게도 이 쾌감을 양보하고 싶지 않다. 드물게 통행이 허용되는 크리스마스 밤, 거리에 몰려나온 시민들을 보자 나의 겨드랑이는 다시 시름 소리를 낸다.

이렇듯 서울 사람들이 갖고 싶었던 것에는 서울의 밤도 있었다. 그리고 약 36년의 통행 금지를 끝으로 사람들에게 마침내 밤이 허락되던 1982년, 사람들은 자정이 넘은 새벽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김광섭(1905-1977)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교사를 하며 시인 및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첫 시집 『동경』을 내고 활동하던 중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심어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3년여간 수감되었다.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 집에서 착상하여 1969년 발표한 작품이다.

<성북동 비둘기> (1969)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때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쫒기는 새가 되었다.

박완서(1931-2011)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주목받았다. 대표작으로 『엄마의 말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이 있으며 2010년 8월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마지막으로 2011년 별세했다.

「낙토의 아이들」 (1978)

강남이 논밭이던 시절을 눈으로 기억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지금, 박완서의 「낙토의 아이들」을 다시 읽으면 그녀가 예견한 미래가 소름 끼칠 정도로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가상의 공간 무릉동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지질학자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나’를 화자로 한다. 내가 대학 시간 강의로 겨우 모은 돈으로 좁은 아파트를 마련하는 동안, 가정주부인 나의 아내는 부동산 투기라는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다.

“부동산학?”
“네, 아주 전도유망한 학문이라나 봐요. 신흥대학에만 그 과가 있었는데 내년부턴 그 과를 신설할 대학이 여럿 생긴다나 봐요. 탁 사장한테 강의 맡아달라는 교섭이 지금부터 쇄도한다니까요.”
“웃기고 있네.”

처음엔 아내와 그녀의 동업자가 하는 일에 코웃음 치던 나였지만 아내의 투자로 생각지도 못했던 부를 쥐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점점 역전된다. 일생을 다 바쳐도 벌까 말까 한 돈을 아내가 단번에 벌어오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번 돈에 결코 도취하거나 만족하는 법이 없는 탁월한 사업가인 아내는 나로 하여금 철저한 한탄과 열등감을 느끼게 한다.

박완서가 가상으로 설정한 무릉동은 1972-78년 사이 강남 개발로 황무지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한 한 동네를 상징한다. 변두리로 묘사된 한강변 동네가 어떻게 고급아파트 단지로 변화하는지, 그 과정에서 부동산 중개업자와 투기꾼, 그리고 복부인으로 대표되는 여성들의 역할은 어떠했는지, 결국 부동산이 어떻게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되었는지, 박완서는 이 작품을 통해 강남 부동산 투기의 역사를 아주 간결하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무릉동이야말로 낙토였다. 이곳의 땅은 시시하게 벼 포기나 감자 알맹이 따위를 번식시키진 않았다. 직접 황금을 번식시켰다. 그 황금은 그 땅을 땀 흘려 파는(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파는(賣) 사람의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최근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SKY 캐슬>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데 목숨을 거는 명문가 사모님들의 처절한 욕망을 그려내는 <SKY 캐슬>의 이야기는, 시대의 변주만 있을 뿐 「낙토의 아이들」의 공식을 되풀이하고 있어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변기에 앉아 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발가벗긴 나무들을 바라볼 적마다 정서의 불모지대를 보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었다. (…) 그런 유의 회의에 사로잡히면 내 아이들이야말로 낙엽을 한꺼번에 떨구는 부자연을 강요당하고 있는 이런 나목 같은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로서의 가책과 사랑으로 가슴이 저렸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불편은 변기에 앉았는 동안만 나의 것이었다.
아파트의 생활양식이란 게 티끌만한 불편도 허용 안 하는 것처럼, 내 생활의 안일은 내 마음의 불편을 더운물이 눈 녹이듯 흔적도 없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