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ots
▪ 1960-70년대 ‘박물관의 민주화’ 흐름에 따라 시작된 개방형 수장고는 공동체의 참여와 소통 등을 강조하며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 2021년 완공된 최초의 건물형 수장고, 네덜란드 디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은 약 151,000개가 넘는 소장품을 전시 중이다.
▪ 디포는 여러 공공문화 시설 보유를 포함해 개방형 수장고가 고려해야 할 필수 키워드인 보존(caring), 전시(display), 대중의 접근성(accessibility)을 충분히 충족시킨다.
지난해 12월 예술 및 건축계의 화두는 서울시 서리풀 개방형 수장고 국제 지명 설계 공모였다. 수장고 위치는 강남 서초동 한복판. 국군정보사령부가 안양으로 이전함에 따라 생긴 빈 부지를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울시가 제시한 새로운 프로젝트다. 서울시는 총 세 개 박물관(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공예박물관)에 있던 수장품들을 이곳으로 한데 모으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웠다. 서울을 대표할 또 하나의 랜드마크를 세우고자 하는 목표와 함께였다.
공모전에는 네덜란드의 MVRDV, 덴마크의 3XN, 영국의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를 비롯하여 유현준 건축사사무소, 매스스터디스, OCA 등 국내외 유수 건축가 일곱 팀이 참여했다. 12월 1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공개 프레젠테이션으로 진행된 공모 결과, 스위스의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의 작업이 최종 당선되었다. 자크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 뫼롱은 영국의 테이트 모던과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등을 설계한 스타 건축가로, 한국에서는 송은문화재단을 통해 그들의 설계 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다.
심사위원단은 주변 대지와 어우러지는 단순하고 우아한 기하학적 형태가 돋보이며, 방문객들이 상부로 이동하면서 분류 및 전시되는 수장품의 특성을 잘 감상할 수 있는 내부구조라고 평가했다. 반투명 입면 시스템을 통한 에너지 생산이라는 지속 가능한 디자인과 1층의 공공정원 및 상부 카페 등 새로운 시민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점 또한 호평받았다.
해당 공모전은 미공개 소장품의 개방, 도시 랜드마크 건설, 그리고 공공문화공간 조성이라는 복합적인 목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프로젝트다. 이렇듯 다소 생소한 개방형 수장고라는 공간을 강남에 세우겠단 계획은 지난 10월 오세훈 서울시장의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장 이후 구체화되었다. 당시 오 시장은 세계 최초의 개방형 수장고로 잘 알려진 로테르담의 디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Depot Boijmans Van Beuningen)을 방문했는데, 이를 벤치마킹하여 서울시 내에 개방형 수장고 건립을 검토하게 된 것이다.
서리풀 수장고는 다가오는 2028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이를 기다리며 서리풀 계획의 영감이 된 로테르담의 디포를 통해 개방형 수장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박물관이 관리와 수집을 넘어 시민들과 함께 문화자원의 가치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변모한 첫 사례다.
감추지 않아 더 아름다운
개방형 수장고는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박물관 및 미술관 소장품을 대중에게 전시하는 방식이자 이를 위해 건립된 공간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보이는 수장고(visible storage), 열린 수장고(open storage), 또는 미술관형 수장고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유한 모든 소장품과 그 복원 및 보존 과정을 100% 공개한다는 특징이 있다. 개방형 수장고는 1960-70년대부터 시작된 박물관의 민주화(democracy of museum)에서 시작된 흐름으로, 현재 국제적으로 활발히 확산되는 추세다.
그렇다면 박물관을 민주화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한정된 (상설) 전시 공간을 통해 소개할 수 있는 소장품 수에는 한계가 있어서 각 박물관에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한 작품들이 많다. 이를 두고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박물관(MOA)의 관장 마이클 에멘스(Michael M. Amens)는 “미적 역사적 가치가 있어 전시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훌륭한 소장품만이 전시된다”고 지적했다. 소장품의 중요도를 판단하고 대중에게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철저히 관련 전문 인력의 선택에 달렸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그는 박물관이 모든 소장품을 전시한다면 대중이 인류의 문화적 성취에 대해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짜 훌륭한 소장품이 무엇인지 관람객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소장품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과 자율성을 증진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참여와 소통, 그리고 불평등 및 차별 해소라는 박물관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더 나아가 수장고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전시물이자 문화공간으로 기능하며, 관람객들을 압도하며 끌어들이는 색다른 공간으로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개방형 수장고는 문화유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확대하는 동시에 각 박물관이 소장품을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방법이기도 하다.
개방형 수장고의 원형, 디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
개방형 수장고의 형식을 띠는 전시 공간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런던 국립자연사박물관(the Natural History Museum)의 다윈센터와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의 회화 보존 처리 연구실은 소장품의 보존 처리 및 연구 과정을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V&A)은 거대한 물량의 도자기들을 진열한 형식의 도자 전시실을 공개했다.
전시를 연출하는 방식을 넘어 건물 전체가 수장고로 기능한 첫 사례는 2021년 완공된 디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Depot Boijmans Van Beuningen, 이하 디포)이다. 세계 최초의 개방형 수장고인 디포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위치해 있으며, 151,000개가 넘는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지상 7층에 달하는 이 거대한 냄비 모양의 건물 설계는 네덜란드 건축 사무소 MVRDV(위니 마스, 야콥 판레이스, 나탈리 더프리스)가 맡았다. 이들은 암스테르담의 밸리(Valley), 중국 톈진의 빈하이 도서관, 2000년 하노버 엑스포 네덜란드 기념관을 설계했으며, 서울역에서 청파동으로 이어지는 서울로 7017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건축그룹이다.
디포를 채운 소장품들은 원래 보이만스 판뵈닝언 미술관 지하에 소장되어 있었다. 1999년 일어난 대홍수를 겪은 뒤, 미술관 측은 아래층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던 중요 소장품들의 보관 및 안전도가 상당히 취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판화와 드로잉 컬렉션이 수해 위험에 완전히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던 것이다. 또한 지속해서 소장품 수가 증가함에 따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많은 양의 소장품을 관리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디포 탄생의 출발점이었다.
디포의 관장, 샤럴 엑스(Sjarel Ex)는 인터뷰에서 디포가 18세기 분더카머(Wunderkammer)의 형식과 런던에 위치한 존 손 경(Sir John Soane)의 하우스 박물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분더카머는 16-17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호기심의 방, 진귀한 물건으로 가득 찬 방을 뜻하는 단어로, 특정 취향의 물건들을 수집 및 분류해 놓은 비밀스러운 방을 가리킨다. 또한 하우스 박물관은 존 손 경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예술품들을 모아둔 공간으로, 생전에 그가 집 및 사무실로 썼던 건물 자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개방한 케이스다.
두 사례는 분명한 공통점을 지닌다. 분더카머와 하우스 박물관은 한 공간 안에 가능한 많은 작품이 조밀하게 들어찬 전시 형태다. 관람객의 동선을 고려하며 여유로운 전시 방식을 지향하는 현대 박물관과는 달리, 방대한 양의 소장품 규모를 물리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소장품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넘어 관람객은 공간 자체의 거대함, 그리고 그 공간을 지배한 물리적인 실제성(authenticity)에 감동받게 된다. 두 공간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수집과 분류뿐만 아니라 소장품이 모인 하나의 공간을 체험하는 것 또한 디포의 중요한 포인트임을 엿보게 한다.
따라서 디포, 나아가 개방형 수장고는 수장고적 기능과 공공시설 및 랜드마크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따라서 내부 공간은 소장품 관리 및 전시의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설계여야 하며, 외부적으로는 건물을 둘러싼 외부와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디자인이 필요한 것이다.
커피잔과 커피포트 사이에서 탄생한 디자인
디포를 설계한 건축가 위니 마스(Winy Maas)는 이 두 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디포의 위치가 도시 심장부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로테르담을 대표할 만한 랜드마크를 조성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 주변 환경 및 지역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며 연결될 수 있을지를 중점적으로 고민했다고 한다.
마스는 우연히 집어 든 한 찻잔과 커피포트의 표면이 주변을 반사하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건물 외벽을 총 1,664개의 유리 패널로 구성하여, 마치 거울처럼 주변 경관과 로테르담의 스카이라인을 반사하도록 만들었다. 외벽은 마치 작은 파노라마처럼 담긴 도시의 모습을 담아내며, 동시에 디포를 둘러싼 공원을 세 배 더 커 보이게 한다. 이 효과는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와도 맞닿아 있는데, 소장품들이 지하가 아닌 상층부에 모두 보관되어야 하기 때문에 마스는 위로 올라갈수록 바깥으로 넓게 휘어지는 곡선형으로 건물을 설계했다. 덕분에 디포는 더 많은 상층부 공간을 확보하고, 볼록 거울처럼 주변 공원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디포의 내부는 개방형 수장고가 고려해야 할 키워드 세 가지를 충분히 고려했다. 보존(caring), 전시(display), 그리고 대중의 접근성(accessibility), 이 모두를 만족시킨다. 디포의 메인 홀은 소장품이 출입하는 공간인 만큼 운반이 용이할 수 있도록 꼼꼼한 노력을 기울였다. 소장품이 손상되지 않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시공했으며, 소장품 입장 시 벌레 및 곰팡이 여부를 체크할 수 있는 격리 공간을 따로 만들었다. 오염이 된 경우 저산소 환경 노출 혹은 감마선 살균을 통해 처치가 가능하다. 또한 재료 및 크기에 따라 소장품을 분류하여 전시하였는데, 이는 각 재료의 성질에 맞게 온도, 조도, 습도 조절 및 후처치 등을 집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의자들만 진열된 쇼케이스, 테이블만 진열된 쇼케이스 등 비슷한 오브제들끼리 묶어 관리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였다.
분류된 소장품은 마리케 반 디에멘(Marieke van Diemen)이 디자인한 13개의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다. 관람객들은 중앙에 위치한 35m에 달하는 아트리움 계단을 통해 각 층을 오르내리며 진열장을 살펴볼 수 있다. 디포의 내부 구조는 판옵티콘을 닮아 중앙이 비어 있고, 어디서든 밑을 내려다보고 관찰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소장품이 담긴 진열장 또한 전부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다. 지하 보관 수장고, 숨겨진 보존 연구실같이 비밀스러운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곳, 모든 소장품이 관람객에게 전부 오픈 되어있다. 진정한 의미의 열린 박물관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포는 여러 공공문화 시설을 포함하고 있어서 시민들이 공간에 접근하기 쉽도록 이끈다. 디포의 3층에는 예술 및 회화 관련 공부를 할 수 있는 스터디 룸과 개인이 구매한 작품을 보관할 수 있는 보세창고가 있으며, 루프탑에는 레스토랑과 옥상정원이 존재한다. 폐장 시간 이후에도 시민들이 와서 시간을 보내며 휴식하거나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보이는 수장고(visible storage)지만 방문하기에 알맞은 수장고(visitable storage)도 되어야 한다는 점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설계가 돋보인다.
이와 유사한 개방형 수장고형 시도들은 국내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개방형 수장고 스타일의 전시 공간으로는 청주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수장고형 미술관인 청주관은 방문객들이 다양한 소장 오브제들과 그 보존 처리 과정을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 외에도 국립공주박물관, 파주 국립민속박물관, 서울공예박물관의 공예 아카이브실 등에서도 개방형 수장고가 어떤 공간인지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개방형 수장고는 잊혀진 소장품을 마주하는 공간과 더불어 시민들이 쉽게 향유할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박물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이것이 바로 개방형 수장고 건립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과 애정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2028년 서울에 세워질 서리풀 수장고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더욱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