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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2월 런던에서 시작된 레터스 라이브(Letters Live)는 편지를 낭독하며 다양한 음악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복합예술 공연이다.
▪ 행사에서 소개될 편지들은 배우를 비롯한 유명인사들인 낭독자의 개인적 선호도를 반영하여 정해진다.
▪ 10여 년간 낭독된 여러 편지 중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읽은 솔 르윗(Sol LeWitt)의 <두(Do)>가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 남자가 편지 한 통을 쥐고 등장한다. 별다른 무대 장식 따위 없는, 조금은 밋밋한 무대 위에는 마이크 하나만이 단출하게 놓여있다. 그 앞에 선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숨죽인 관객들 사이로, 오래전 누군가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가 흩어진다. 길어봤자 6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고, 우레와 같은 탄성과 박수가 쏟아진다.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관객은 조금 전 자신을 관통하고 지나갔던 오래된 문장에 젖어 든다. 낭독자가 내려간 무대 위에는 부드러운 선율의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시적인 공연의 이름은 바로 레터스 라이브(Letters Live)다. 제목 그대로 여러 통의 길고 짧은 편지들을 라이브로 읽어주는 공연으로, 2013년 12월 런던에서 첫 시작을 알린 뒤 10년 넘게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독백 극을 연상시키는 낭독과 다양한 음악 퍼포먼스가 합쳐진 이 복합예술공연은 편지에 관한 두 권의 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편지 쓰기의 역사를 훑어보며 그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인 사이먼 가필드(Simon Garfield)의 <투 더 레터(To the Letter)>와 직접 수집한 오래된 서신들을 소개하는 숀 어셔(Shaun Usher)의 <레터스 오브 노트(Letters of Note)>가 이 공연의 영감이 되었다.
어셔는 동일한 이름의 온라인 공간을 열어 편지가 가진 문학적 의미와 힘을 대중들에게 공유하고자 했는데, 이 웹사이트가 바로 레터스 라이브의 시초와 같다. 두 사람은 좀 더 효율적으로 두 책을 홍보하겠다는 의도와 함께, 발생한 수익금을 필요한 곳에 기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라이브 환경에서 편지를 읽는 행사를 기획했다.
공연의 낭독자들은 대개 배우 등 유명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미디어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 행사가 확장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는데, 연극적 특성이 짙은 편지 낭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공연자를 섭외하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일석이조의 선택이었다.
그동안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 주드 로(Jude Law), 올리비아 콜먼(Olivia Colman), 톰 히들스턴(Tom Hiddleston) 등이 낭독자로 쇼를 빛냈으며, 위인이나 유명인에서부터 평범한 일반인까지 다양한 삶의 조각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소개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인 퀸 마더(Queen Mother),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체 게바라(Che Guevara)와 같은 역사적 아이콘부터 열세 살의 평범한 소녀 혹은 고대 로마인 등 영감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편지들이 가득했다. 수익금은 영국 문해력 재단인 리터러시 트러스트(National Literacy Trust) 등 주로 글쓰기와 관련된 다양한 자선단체 및 기금에 기부된다.
기획자 제이미 빙(Jamie Byng)에 따르면 행사에서 소개될 편지들은 낭독자의 개인적 선호도를 반영하여 정해진다고 한다. 가령 DBC 피에르로 잘 알려진 호주 출신 작가인 피터 워런 핀레이(Peter Warren Finlay)는 미국의 시인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의 열렬한 팬이었던 덕에 부코스키의 편지를 직접 읽게 되었다. 또한 영화 <간디>에서 마하트마 간디 역을 맡았던 배우 벤 킹슬리(Ben Kingsley)는 1939년 간디가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했다. 32년 만에 다시 한번 간디라는 인물을 재연하게 되어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특별하고 애틋한 공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구조와 비교적 짧은 낭독 시간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일순간 공연에 완전히 몰입되어 열광한다. 어쩌면 서로 다른 독백의 집합체라고 할 수도 있을 이 편지 낭독회가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며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수형의 쓰기(書)에서 복수형의 듣기(聽)로
<투 더 레터>의 저자 사이먼 가필드는 편지가 우리에게 더 큰 삶을 허락해 준다고 표현했다. 더 다채롭고 풍성하고 확장된 삶을 소유하도록 말이다. 컴버배치의 말을 빌리자면 편지란 다른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삶과 시대, 그리고 인간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편지는 한 사람의 (혹은 두 사람 이상의) 삶의 증거이자 인간적인 감정이 세밀하게 기록된 역사다. 창작되거나 각색된 것이 아닌 진짜라는 점에서 우리 옆의 수많은 창작물보다 한층 더 깊은 울림을 가진다. 사랑, 거절, 항의, 슬픔 등이 고스란히 배인 날것의 실화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강력한 파동을 불러온다. 그 때문에 편지는 가장 인간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레터스 라이브에서 소개되는 서신들은 대부분 손으로 쓴 편지다. 사실상 죽어가는 문화인 손 편지는 각 사람이 가진 고유의 필체를 드러내며, 기계와는 달리 느린 육체의 직접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낭독 또한 묵독과 속독을 선호하는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과거의 문화로, 결코 효율적인 독서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눈과 입과 귀를 한꺼번에 사용하며 몸의 감각을 깨우는 낭독은 글의 내용을 마음에 깊게 아로새길 수 있다. 결국 과거의 편지를 낭독하는 일은 손으로 쓰기와 소리 내 읽기라는 행위에 담긴 시간과 정성을 켜켜이 쌓아 음미하는 일인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속도와 효율성이 중요해진 시대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손으로 쓴 글을 읽는 일, 차분히 앉아서 온전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데만 힘을 쏟는 경험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레터스 라이브가 제공하는 편지와 낭독의 결합은 커다란 시너지를 발산하며 느리지만 견고하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연극에 가까운 낭독, 마치 오래전 죽은 편지의 화자가 눈앞에 현신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이야기 전달 방식은 관객의 깊은 몰입과 감정의 요동을 유발한다.
대중에게 많이 사랑받은 무대 중 하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낭독한 솔 르윗(Sol LeWitt)의 편지 <두(Do)>다. 솔 르윗은 미국의 미니멀리즘 및 개념미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포스트 미니멀리즘 조각의 거장으로 잘 알려진 에바 헤세(Eva Hesse)와 절친한 관계였다. 1965년 당시 헤세는 슬럼프에 빠져 주저하고 있었다. 르윗은 그런 헤세를 격려하기 위해 아주 강력하고 단호한 편지를 썼다. “너는 늘 그랬듯이, 매 순간을 싫어하고 있겠지. 그러지 않기를 바라! 제발 이제 그만 생각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상처받고, 쉬운 길을 택하려 하고, 몸부림치고, 허우적대고, 혼란스러워하고 … 그냥 좀 해!”
(You seem the same as always, and being you, hate every minute of it. Don’t! (…) Just stop thinking, worrying, looking over your shoulder wondering, doubting, fearing, hurting, hoping for some easy way out, struggling, grasping, confusing, itching, scratching, mumbling, bumbling, grumbling, humbling, stumbling, numbling, rumbling, gambling, tumbling, scumbling, scrambling, hitching, hatching, bitching, moaning, groaning, honing, boning, horse-shitting, hair-splitting, nit-picking, piss-trickling, nose sticking, ass-gouging, eyeball-poking, finger-pointing, alleyway-sneaking, long waiting, small stepping, evil-eyeing, back-scratching, searching, perching, besmirching, grinding, grinding, grinding away at yourself. Stop it and just DO!)
가차 없을 정도로 단호한 동시에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르윗의 우정은 컴버배치의 역동적인 낭독을 통해 공간을 가득 뒤덮었다. 숨도 쉬지 않고 몰아치듯 쏟아지는 컴버배치의 외침은 르윗의 말을 납작한 활자에서 3D처럼 생동하는 감정으로 바꿔버렸다. 이를 지켜본 관객들은 저마다 이유 모를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정체되어 있던 이는 용기를 얻었으며, 삶의 복잡함에 머뭇거리던 이에게는 단순함의 회복을 일깨웠다는 반응이다. 이는 헤세가 겪었던 자기 의심이 인간 모두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되살아난 르윗의 편지는 밑바닥을 찍고 있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며 감동을 선사했다.
이렇듯 시공을 넘나들며 만난 낯선 삶의 파편은 현재를 사는 개인의 삶과 절대 유리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언제나 연결된다. 그렇게 관객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삶에서 자신과 닮은 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지금 당장 필요했던 위로를 얻거나 광대가 아플 정도로 웃으며 현실의 스트레스를 잠깐 잊어버리기도 한다. 닮은 듯 다른 모양의 삶 위로 스스로를 투사하고 또 성찰하며, 자신에게 필요했던 말들을 건져 가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타인의 경험 속으로 젖어 드는 일은 무뎌진 우리의 감성을 재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도 모르게 화자와 동화되어 문장 한 줄마다 함께 즐거워하고, 분노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마음을 열고 오래전 살았던 누군가의 세계에 능동적으로 가닿게 만든다. 혼자 쓰기가 함께 읽기, 더 나아가 함께 듣기로 놀랍게 확장되는 것이다. 이처럼 레터스 라이브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쇼를 관람하는 관객은 사적인 말들이 보통의 언어로 아름답게 번져가는 현장의 참여자인 동시에 목격자이다.
2024년 첫 레터스 라이브는 지난 3월 6일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개최되었다. 여성 역사의 달인 3월, 그리고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여성 작가 및 독자들을 위한 기관인 우먼스 프라이즈 트러스트(Women’s Prize Trust)의 후원을 위한 모금 행사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또다시 찾은 로열 앨버트 홀에서 어떤 이의 목소리로 어떤 사연을 청취할 수 있을지 기대하며 발걸음을 모았다.
이처럼 레터스 라이브는 편지를 라이브(live)로 읽으며 공유함으로써 오래전의 이야기를 다시 살아 숨 쉬게(alive) 만든다. 잠들어 있던 삶의 조각들이 누군가의 입술을 타고 부활한다. 남 또는 어쩌면 내 이야기일 수도 있는, 그 낯설고도 익숙한 랑데부 속에서 타인과 연결되는 가슴 따뜻한 일. 레터스 라이브가 살려낸 것은 편지뿐만 아니라 홀로 쾌속 질주해야만 하는 세계 속에서 잊혔던 인간다움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