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ots
▪ 펀치드렁크는 객석과 무대 사이에 존재하는 제4의 벽을 깨고 관객이 공연장 곳곳을 누비며 관람하게 하는 영국의 대표적인 이머시브 시어터 극단이다.
▪ 공간이 공연의 주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펀치드렁크의 공연들은 기존의 일반적인 극장 공간을 벗어나, 오래된 무기고나 개조된 나이트클럽, 우편 분류 사무실 등 사용하지 않는 도시의 공간들을 무대로 활용한다.
▪ 충무로의 오래된 극장인 대한극장이 2024년 9월을 끝으로 문을 닫는다. 대한극장의 자리에 펀치드렁크의 대표작 “슬립노모어(Sleep no more)”가 들어올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최근 공연계에는 이머시브극이 트렌드를 넘어 또 하나의 주요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 영국의 권위 있는 공연어워드인 올리비에 시상식에서 최초로 8관왕에 오른 웨스트 엔드의 뮤지컬 <카바레(Cabaret)>의 새로운 프로덕션부터 국내에서도 공연한 바 있는 뮤지컬 <물랑루즈(Moulin Rouge! The Musical)>까지. 이머시브극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무대와 객석 사이에 놓인 제4의 벽을 낮추고 그 경계를 희미하게, 또는 모호하게 만들어 마치 관객이 극 안에 들어간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국내에서는 뮤지컬 <그레이트 코맷>이나 <위대한 개츠비>와 같은 해외 라이선스 이머시브극이 무대에 올랐고, <금란방>, <룰렛>, <흔해 빠진 일> 등과 같은 국내 창작 작품도 이머시브 극을 표방하며 새로운 경험에 목마른 관객에게 닿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이머시브적 요소들을 활용 중이다. 이렇듯 국내외에서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이머시브 공연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연을 꼽으라면 2011년에 시작해 여전히 뉴욕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펀치드렁크(punchdrunk)의 <슬립노모어(Sleep no more)>를 빼놓을 수 없다.
극장 문법 타파, 펀치드렁크의 이머시브 시어터
제 개인적인 사명은 관객에게 전에 없던 경험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마법의 시간, 그 순간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을까요?
– 펀치드렁크 설립자이자, 예술감독인 펠릭스 바렛(Felix Barrett)인터뷰 중에서 (Burn the Seats: Felix Barrett (Future of StoryTelling 2013))
영국 극단 펀치드렁크는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기존의 극장 문법을 벗어나 관객이 공연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대 장치를 만지거나 배우와 접촉하기도 하는 새로운 이머시브 공연을 만들어냈다.
펀치드렁크의 설립자이자 예술감독인 펠릭스 바렛(Felix Barrett)은 관객에게 그간 극장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전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일상을 살아가는 바깥 세계와는 다른 공연장 안의 평행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공연장 안에 있는 몇 시간 동안은 바깥의 현실을 잊은 채 낯선 다른 공간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낯선 공간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뚜렷한 기존의 극장으로는 부족했다. 일반적으로 공연장의 객석은 편안하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굳이 움직이거나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로 인해 관객은 객석에 앉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관객들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불편하게 한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것도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는 소품과 소도구를 만지고 열어볼 수 있다면, 마치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처럼 금세 공연 속 세계관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우리 공연 속 세계에서는 모든 서랍, 찬장 그리고 옷장은 열어볼 수 있고, 열어봐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죠.
– 펠릭스 바렛(Felix Barrett)인터뷰 중에서(Erik Piepenburg, The New York Times, Stage Is Set. Ready for Your Part?, (2011.03.16))
펀치드렁크의 작품은 관객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긴장하게 만들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일단 공연장에 들어서면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는 들여다볼 수도 없고 하얀 가면을 써야 한다. 그리고 별도의 인터미션 시간이나 지정된 좌석 없이 원하는 만큼 3시간가량 미로처럼 얽힌 공연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배우들 혹은 해프닝을 스스로 찾아다녀야 한다. 때로는 공간 곳곳에 놓인 가구나 종이 뭉치들이 극에 관한 힌트가 되기에 관객이 직접 뒤지거나 읽어 볼 수도 있다. 이렇듯 펀치드렁크의 공연장에는 무대와 객석 혹은 공연 공간과 관람 공간의 구분이 없다. 공연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갑자기 배우가 등장하고, 일순간 그 공간이 퍼포먼스 공간으로 변모한다. 극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개성적인 이머시브적 방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표작이 바로 뉴욕과 상하이에서 공연 중인 <슬립노모어(Sleep no more)>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알프레도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 그리고 실제 스코틀랜드에서 1697년 벌어졌던 마녀재판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2003년 런던 공연을 시작으로 미국 보스턴을 거쳐 뉴욕과 상하이에서 장기 공연 중인 펀치드렁크의 대표작이다. 관객들은 하얀 마스크를 쓰고 총 6층 규모의 공연장 곳곳을 누비며,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관람하거나 뒤쫓아 다니기도 하며 자신만의 드라마와 경험을 얻게 된다. 한 번의 공연에서 1시간짜리 공연이 세 차례 반복되지만, 관객들은 서로 다른 장면과 경험을 얻는다.
대사가 없는 넌버벌 공연으로 진행되고 어떤 캐릭터를 마주치는지, 어떤 장면을 목격하는지에 따라 극의 중반부를 볼 수도, 혹은 마지막 장면을 볼 수도 있으며 공연을 관람하는 내내 아예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장면들도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자신 나름의 드라마를 만들어 나간다. 자신이 목격한 장면의 파편들과 공연의 기본 설정들을 계속 조합하고 이를 통해 공연의 내용을 파악해야 하므로,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그래서 열광적인 팬들은 공연의 내용과 각 캐릭터의 성격과 이야기를 파악하기 위해 온라인에 위키를 개설해서 카테고리별로 정리를 해 놓기도 했다. 넓은 공간에 여러 캐릭터가 주∙조연에 관계없이 각자의 플롯 안에서 움직이고 관객은 자신이 있는 위치, 이동하는 동선에 따라 파편적인 몇몇 장면만을 목격하게 되므로 다양한 해석과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복잡한 동선 안에서 여러 캐릭터의 독립적인 플롯이 만든 혼란스러운 기승전결 가운데 전체적으로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가 통일성을 준다. 여기 더해 극의 진행에 긴장감과 스릴을 더하는 것은 바로 호텔이라는 공간이다. 뉴욕의 “매키트릭 호텔(Mckittrick hotel)”과 상하이의 “매키넌 호텔(McKinnon Hotel)”은 각 도시에서 슬립노모어가 열리는 배경이 된다. 뉴욕에 있는 매키트릭 호텔은 1939년 개업했지만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투숙객을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비밀에 감춰졌던 곳이다. 관객들은 이곳의 투숙객이 되어 3시간 가량의 시간 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공간의 분위기가 공연 공간에 발을 들인 관객에게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하며 1시간에서 길면 3시간이라는 관람 시간 동안 슬립노모어의 세계관 안에 충실히 머물게 만든다.
미스터리한 두 호텔의 역사 혹은 신화는 몰입감을 높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 공간을 도시의 무엇과는 다른 이질적인 공간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이러한 체험을 만들어 내기 위해 펀치드렁크가 만들어낸 장치 중 하나다. 오랫동안 나이트클럽으로 운영되던 첼시의 오래된 창고와 호텔이긴 하지만 그리 유서 깊은 공간은 아니었던 평범한 상하이의 호텔은 신비하고 베일에 가려진 도시 전설과 같은 장소가 되었다.
슬립노모어처럼 공간이 공연의 주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펀치드렁크 시어터의 공연들은 기존의 극장을 벗어나 오래된 무기고나 창고, 역 한편에 버려진 우편 분류사무실 등 도시의 오래된 공간을 무대로 활용한다. 그리고 무대미술과 조명, 사운드뿐만 아니라 공간에 부여한 새로운 가상의 역사를 통해 현실과 다른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 건물 외부는 이전과 다름없는, 그다지 눈길을 끌 만한 것 없는 평범하고 낡은 풍경이지만 건물에 들어가 가면을 쓰고 공연장에 입장하는 순간, 예상치 못한 미로와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공간의 재발견, 커뮤니티의 재탄생
오래된 공간의 재탄생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특히 도시의 낡고 버려진 공간을 공연장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역사 속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몇몇 페스티벌은 오래되고 낡은 공간의 역사와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1913년부터 계속된 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에서 펼쳐지는 오페라 페스티벌이나 1937년에 시작된 로마 카라칼라 욕장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각 도시를 대표하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이 외에도 고대의 반원 경기장을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마체라타(Macerata)의 오페라 페스티벌이나 고대 극장을 아파트와 공연장으로 활용 중인 로마의 마르셀루스 극장(Teatro di Marcello)처럼, 낡은 건물과 유적이 도시 곳곳에 자리한 만큼 이 공간들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거나 다른 용도로 활용하며 오래된 건물의 수명을 이어 나가는 사례가 많다.
독일의 경우 1926년 지어진 뒤셀도르프의 플라네타리움을 아름다운 돔 모양이 인상적인 콘서트홀로 변신시킨 사례가 있다.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이 공간은 초반에는 다목적홀로 전용되었지만, 이후 조명과 음향 개선을 통해 상주 단체인 뒤셀도르프 심포니(Düsseldorfer Symphoniker)의 클래식 공연 등 다양한 음악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 더해 함부르크의 엘프필하모니(Elbphilharmonie Hamburg)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스위스의 건축 사무소인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에서 설계한 이 콘서트홀은 1960년대 함부르크 항구에 지어진 저장 창고 건물을 기반으로 지어졌다. 오래된 저장 창고의 외관을 살려 만들어진 이 공연장은 유명한 클래식 공연장이자 함부르크의 대표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전통 클래식 공연이나 대형 공연을 위한 장소 외에도 소규모의 실험적인 공연을 위해 발굴된 공간들도 있다. 영국 런던 워털루역의 버려진 철도의 아치형 미로에 자리 잡은 더 볼트(The Vaults)는 이머시브 공연과 대안 예술을 위해 만들어졌다. 어둑한 입구를 지나면 나타나는 복잡하고 화려한 그라피티로 가득 찬 터널 곳곳에 자리 잡은 공연장에서는 스탠딩 코미디부터 뮤지컬, 이머시브 공연, 사운드 아트 등 다양한 공연과 설치미술이 펼쳐지기도 한다. 작년까지는 공연예술부터 코미디까지 다양한 독립예술 공연이 올라오는 볼트 페스티벌(Vault festival)이 열리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석유비축기지를 문화비축기지처럼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한 오래된 공간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공간 중 최근 흥미로운 콘텐츠로 주목받는 곳을 하나 꼽으라면 연남장이 있다. 연남장은 유리공장으로 사용되다 택시회사 사무동으로 쓰이던 공간을 로컬크리에이터 라운지로 변신시킨 곳이다. 일반적인 형태의 공연장이 아닌 가변적인 공간으로서, 참여형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최근 이곳에서는 <연남장 카바레>라는 흥미로운 공연 시리즈가 펼쳐졌다. 뮤지컬 <아이위시>와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그리고 1인극 <SONG FOR MEE>, <THE RIDE OF MY LIFE> 총 4개 공연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배우의 자전적 이야기와 관객 참여형 공연으로 구성됐다. 기존의 극장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에서 관객과 배우가 소통하고 즐기는 공연을 통해 기존의 공연장과는 다른 <연남장>만의 정형화되지 않은 매력을 분출한다. 이처럼 낡고 오래된 공간을 공연장으로 탈바꿈하는 사례는 특별하고 흥미롭지만 사실 그렇게나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펀치드렁크 시어터의 이 오래된 호텔들이 관객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간 안에서 꿈의 세계를 창조하는 장소교감적 공연
펀치드렁크가 특별한 이유 중에는 단일 공연을 위해 기존의 공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그들의 공간 활용 방식이 큰 몫을 차지한다. 앞선 다른 사례처럼 다양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열린 공간은 아니지만 도시의 낡고 오래된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이전 공간이 느껴지는 기시감을 주면서도 낯선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 펀치드렁크만의 매력이다.
이들의 공연에서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공간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이 마치 미로처럼 헤매고 탐구해 나가는 디딤판이자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는 벌판이다. 그렇기에 큰 공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나 공연장보다 오래되거나 버려진 공간을 활용하는 이유에는 넓은 공간을 합리적인 비용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한 현실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펀치드렁크의 작업 방식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이러한 공간을 유독 자주 활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펠릭스 바렛은 새로운 공연을 만들 때마다 공연이 펼쳐질 공간이 가진 개성과 흔적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영감은 공연의 무드와 움직임, 이야기 등에 녹아든다. 펀치드렁크의 대부분의 공연이 넌버벌이며, 배우들의 무용과 움직임이 공연의 중심이 되기에 동선과 움직임을 그 공간에 맞추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슬립노모어의 상하이 공연에서 중국 설화를 스토리에 녹이기도 했던 것처럼, 때로는 그 공간 또는 지역의 역사를 은근하게 녹여 낸 이야기가 공연에 담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의 개성과 흔적을 재해석함으로써 관객에게 낯선 경험을 선사하는 일이다. 펀치드렁크는 자신들의 이러한 공간 해석 방식을 장소 특정적 공연(Site-specific)보다는 장소 교감적(Site-specific) 공연이라고 명명한다.
펀치드렁크가 추구하는 장소와 교감하는 공연은 그 공간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작은 벽의 틈새, 난간 등 공간이 가진 흔적을 통해 예술가가 새로운 영감을 받아 공간에 낯선 세계를 반영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 공간의 특징과 이야기를 반영하면서도 전혀 다르고 낯선 느낌을 준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장소 교감적인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을 재해석하면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펀치드렁크 시어터 레퍼토리에서 전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슬립노모어의 경우도 창고 형태의 나이트클럽을 뉴욕의 공연장으로 삼으면서 암전과 변형의 용이한 공간적 특성을 적극 활용했다. 물론 맨덜리 바라는 외부 세계와 공연장을 연결하는 중간 공간을 통해 기존 나이트클럽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가지고 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1930년대 지어졌다고 하는 “매키트릭 호텔”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냈으며 이곳에 있던 기존의 나이트클럽이나 창고와는 다른,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들여 왔다는 사실이다.
슬립노모어뿐만 아니라 마스크와 이머시브를 강조하는 특유의 방식을 처음 시도한 2000년 <보이체크(Woyzeck)> 때부터 펀치드렁크는 영국의 오래되고 버려진 한 군 막사를 무대로 삼았다. 이후 2013년 펀치드렁크의 영국 공연 중 첫 대형 공연이자 내셔널 시어터와 함께했던 <익사한 남자: 헐리우드의 우화(The Drowned Man: A Hollywood Fable)> 또한 런던 패딩턴역 인근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우편분류사무실을 4층 규모의 템플 픽처스(Temple Pictures)라고 하는 가상의 헐리우드 영화사로 바꾸어 놓았다.
2023년 하반기에 막을 내린 펀치드렁크의 신작 <번트시티(The burnt city)>는 트로이전쟁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 비극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영국 런던 울리치의 한 무기고에서 공연했다. 공연의 배경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 이 공간은 현재 펀치드렁크의 첫 본부 사무실로 사용 중이기도 하다. 또한 번트시티와는 또 다른 신작 공연과 다양한 이머시브 공연 워크숍을 통해 지속적으로 오래되고 낡은 공간에 새로운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처럼 낡고 오래된 공간의 틈을 비집고 스며들어 새로운 공간으로 다시 재해석해내는 펀치드렁크는 기존 건물의 외관이나 도시 전체의 풍경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내부에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다음 세대를 위한 펀치드렁크 인리치먼트 스토어(Punchdrunk Enrichment Stores)
DIY 이야기 제작소를 표방하는 이 공간은 웸블리에서 지역 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3년 간의 레지던시 활동 끝에 만들어졌다. 상업적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였던 기존의 공연과 달리 이곳의 목적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접근 방식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상상력을 채워 나가게 하는 한편, 교사들에게 새로운 교육 커리큘럼 방향성을 제시한다. 지역 아티스트와 공연 종사자에게는 아이디어 교환 및 새로운 실습의 장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상점 공간과 소품 등을 전문가가 아닌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아티스트를 앞세워 그들의 아이디어를 반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이머시브 공연 관람 및 마스터클래스 참여뿐만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방문할 수 있는 장소. 이것이 펀치드렁크 인리치먼트 스토어가 지향하는 공간의 방향성이다.
6세에서 11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이 공연은 물건과 이야기를 수집하는 두 친구, 에니탄과 게드와 함께 배우와 어린이 관객이 에니탄의 할아버지가 만든 게임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어린 관객들과 에니탄은 게임을 위해 상점 곳곳에서 보물찾기처럼 단서를 좇는다. 그 과정에서 이민자였던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세대 간의 유대감, 기억, 슬픔 그리고 공동체 등 다양한 주제와 이야기를 살핀다. 다소 난해하고 강렬한 기존 펀치드렁크의 공연과 달리 게임을 통해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공동체와 사회에 관한 여러 주제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풀어내 기존 단체가 해오던 방식으로 공간 활용 및 콘텐츠 제작 방식을 유지하되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으며 새롭고 유쾌한 자극을 준다.
펀치드렁크 인리치먼트 스토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지역 예술가 양성 워크숍, 이머시브 러닝(Immersive learning) 등의 여러 지역 커뮤니티 및 교육 기반의 콘텐츠는 펀치드렁크의 정체성과 주요 콘텐츠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상업적 이익 창출을 넘어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 중이다. 이렇듯 펀치드렁크는 지속적인 새로운 아이디어의 교환과 인재 발굴을 통해 콘텐츠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영리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1958년 개관 이래, 충무로를 지키며 국내외 수많은 대작을 상영하며 한국 영화계에 자리 잡았던 대한극장이 66년간의 운영을 마치고 폐관을 결정했다. 2024년 9월 30일을 끝으로 영업을 종료하게 된 대한극장의 자리에 펀치드렁크의 슬립노모어 공연 극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머시브 공연에 대한 공연계의 뜨거운 관심과 색다른 경험과 체험에 열광하는 대중의 흐름을 본다면, 이머시브의 중심에 있는 펀치드렁크의 슬립노모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한편 한국 영화계의 입장에서 66년간 영화계의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함께 해 온 한국 영화의 상징적인 극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매우 씁쓸한 일이다. 최근 국내의 유서 깊은 극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는 일이 늘어나는 데다 대한극장은 한국 영화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충무로에 위치한 만큼 큰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슬립노모어와 같이 기존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머시브 공연이 대한극장과 같은 오랜 장소성과 역사를 가진 공간을 기념하고, 새로운 방식의 재해석을 통해 공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대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공간의 역사와 유산을 보존하고 그 장소성과 역사를 드러내는 방식들은 박물관이나 기념관의 건립을 통해 자주 시도되어 왔으며,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장소의 장소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술가의 상상력과 경험, 느낌에 의해 공간이 재구성되고 전혀 다른 낯선 세계로 녹아 들어 표현되는 사례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대한극장이 가진 역사와 그 안에 담긴 추억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펀치드렁크의 손을 거쳐 재해석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대한극장 공간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도시 공간의 낡은 공간을 활용하는 데에 있어 이전의 역사를 기념하고 추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문화예술계의 유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낡은 공간을 채우며 또 다른 장소성과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