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교육·사회 전반에 대한 아티스트의 생각을 들어보는 인터뷰 프로젝트 <젊은 예술, 생각을 디자인하다>. 작가의 태도, 가치관, 창의성, 소통, 감성이 반영되는 작업이나 작품활동 이야기, 작가 개인의 생각을 따라가 보며, 문화예술이 우리 삶과 인간에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와 강점을 알아보고,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아티스트와 함께 예술의 미래를 그려봅니다.
서상혁
‘행화탕’ 프로듀서
1958년 완공돼 목욕탕으로서 61여 년의 역사를 가진 행화탕은 지난 2016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단, 재개발 예정으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함을 알고 시작한 행화탕 프로젝트.
서상혁 프로듀서는 “언젠가 철거될 운명이지만, 언젠가 곧 이라는 그 상황이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나는 행화탕을 아름다운 공간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일상의 떼를 벗고 예술로 목욕하는 행화탕. 그곳엔 어떠한 이야기가 숨겨 있을지 서상혁 프로듀서를 만나본다.
PART 1. 아티스트를 소개합니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포구 아현동에 위치한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인 행화탕을 운영하는 문화예술콘텐츠랩 ‘축제 행성’의 프로듀서 서상혁입니다.
Q. 행화탕의 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상혁 프로듀서의 성격이 궁금해졌어요. 본인의 성격은 어떤가요?
저는 제 삶의 관점을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해요. ‘지구에 소풍을 온 보헤미안’이라고요. 그러니까 지구에 있는 것들 모든 것들을 한 번 의심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판단을 보류하는 습성이 있어요. 사고를 다양하게 확장하는 부분도 있지만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감정적인 기호를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극단적인 예를 들면, ‘엄마 예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선뜻 대답을 못 하는 거죠. 어떤 기준으로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요. 어떻게 보면 융통성 있게 넘기지 못하는 성격인 거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잘 넘기지 못했어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어떤 질문에 대답한다는 게 너무 어렵고 잠정적 합의에 의한 어떤 내뱉음,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그 기준에 맞춰간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연애가 어려운가 봐요.
Q.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유년시절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데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여느 학생들과 비슷했던 것 같아요. 문화예술 분야에 영향을 받은 건 중학교 때였던 것 같아요. 제가 이모라고 부르던 같은 아파트에 살던 분이 계셨는데, 부부가 시인이었어요. 두 분이 가정집을 책방으로 만들어서 ‘열린 책방’ 같은 것을 운영하셨어요.
그때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독서 동아리 활동을 잠시 하게 됐어요. 그리고 짧은 기간이지만 작곡 공부도 했고요. 고향이 통영이라서 <오광대>가 유명한데 고등학교에 풍물패 ‘추임새’라는 동아리가 있었어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은 저를 괴짜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학교에서 제가 계량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기도 했거든요. 그때가 아마 계량 한복이 막 나왔을 시기였는데 저는 그게 좋더라고요.
계량 한복을 입고 다니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갑자기 산에 올라가기도 했고요. 좀 특이했죠. 대학이라는 개념도 잘 몰랐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입시 학원도 안 다녔고, 수능 준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서울에 올라와서 5수까지 하게 됐죠. 제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 하숙집을 찾아다녔어요. 대학가에 하숙집을 구했는데, 하숙집 선금을 못 받았어요. 그때 서울 사람들이 야박하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죠.
그 시점부터 방황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혼자 갤러리를 찾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보니까 디자인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미대 입시를 준비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재수를 하고 그다음 해에는 설치 쪽에도 관심을 가졌다가 그다음해에는 인문계로 관심을 가졌다가 중간에 계속 다양한 전공들에 관심을 가졌어요.
부모님에게 너무 죄송했죠. 제가 방황하고 계속 학교에 떨어지니까 부모님이랑 주변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했고, 3수를 할 때는 동생이 같이 수능을 보기도 했고요. 서울에서의 입시 준비 기간은 계속 모험을 하는 기분이었어요. 서울은 약간 끊임없이 부유하는 그런 상황에서 모험하는 탐험하는 느낌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PART 2. 아티스트의 작품활동과 관점을 살펴보다
Q. 축제를 처음 진행하게 된 건 언제였나요?
2004년에 대학에 입학하게 됐고, 영상학과에 진학했어요. 제가 5수를 해서 들어갔는데 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같은 학번으로 온 경우가 있더라고요. 영상학과에 진학한 사람들의 연령대가 다양했고, 조금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그리고 영상학과가 1998년도에 개설된 학과이다 보니까 로드맵이 일정하지 않은 느낌도 있었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점이 더 좋더라고요.
우연히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예술학부 학생회를 하다가 2005년에 대학로 문화축제라고 하는 써프(SUAF), Seoul University Avenue Festival을 만나게 된 거죠. 써프(SUAF)는 2002년 5월에 대학로에서 시작한 축제인데 전국의 여러 대학교 총학생회와 총장님들이 모여서 월드컵을 기념하면서 만든 축제였어요. 2002년과 2003년 1, 2회 때는 연합으로 진행이 됐는데 2004년, 그러니까 축제 3년째에 접어들면서 지속성이 떨어지게 됐어요.
아무래도 대학로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하다 보니까 거리가 먼 학교 학생들은 참여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속해 있던 예술학부 학생회가 축제를 진행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가 있었어요. 저는 축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래서 고민이 많았는데 축제를 한 달 정도 남겨두고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때 제가 했던 건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어요. 함께 진행할 멤버를 4명을 더 모았고, 한 달 동안 축제를 준비했어요.
저를 포함한 5명의 구성원이 다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학업 외의 대부분의 시간은 축제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과거에 어떤 식으로 진행했는지 찾아보는 작업을 했고, 선배들을 찾아가서 모임을 하기도 했어요. 예전에 진행했던 구조의 형태를 찾아서 답습하고 골격에 맞춰서 시스템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죠.
Q. 축제를 진행하려면 예산도 많이 들었을 텐데, 지원은 넉넉했나요?
2004년에는 서울시 예산을 지원받아서 했었는데 지원이 끊겼고 학교의 공간도 사용할 수 없게 됐어요. 그래서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준비 공간도 없어서 가정집에 모여서 했어요. 집을 사무실처럼 사용한 거죠. 혜화동 대학로 거리 6차선 중의 4차선 도로를 막고 축제를 하는데, 어떻게 통제를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축구부 친구들을 불러 모아서 거리 통제를 했어요.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더라고요. 한 번 쓴 경험하고 2006년도 그러니까 축제 5회째에 접어들 때부터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했어요. 자원봉사자를 백 명 정도 모집했는데 아마 천 명 정도 지원을 했었던 거로 기억해요. 서류만 2박 3일 동안 검토했을 정도니까요.
Q. 대학시절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면 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셨을 것 같아요. 축제를 진행하다보면 적지 않은 위기의 상황도 경험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아무래도 날씨와 관련된 경험들이 떠오르네요.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때 제가 맡은 것은 거리 문화 공연 분야 중 인디음악 관련 쪽이었어요. ‘youth live 음악 경연대회’를 제작하는 일, 인디 밴드 초청 공연을 해양 광장이라는 장소에서 진행하는 두 가지였죠. 광장에서 진행을 하다 보니까 비가 오면 힘든 부분들이 발생해요.
관객들은 비를 살짝 맞아도 괜찮지만, 밴드의 음향 장비는 한 번 고장 나면 93일간의 엑스포 기간 동안 무대를 설 수 없는 상황까지도 발생하게 되는거죠. 그런데 공연을 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급하게 천막을 치고 진행을 했지만, 천막 사이로 비가 떨어져서 진땀을 흘린 적이 있었죠.
Q. 그렇게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하세요?
바로 앞의 문제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여러 관점으로 생각을 해 봐요. 그리고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에요. 제 성향적인 면도 있겠지만 부단한 연습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렇게 감정적으로 소모를 해봤자 그게 해결 방안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Q. 대부분의 작업을 여러 팀으로 진행하시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축제랑 공연 분야의 일을 상대적으로 많이 경험했는데 대부분이 협업으로 이루어져요. 어떤 한 사람의 힘,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같이 역할을 나누고, 역할을 나누기 전에 어떤 공동의 미션을 공유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데 혼자 하면 쉴 수가 없잖아요. 팀으로 운영하는 행화탕 공간을 시작하게 된 것도 건강과 행복이라는 키워드로 시작했어요.
공동 대표로 있는 주왕택 감독님이 어느 날 저에게 건강검진을 제안했어요. 그때 제가 계속 살이 찌고 있었어요. 그래서 건강검진을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에 내가 큰 병에 걸려서 죽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내가 만족하는 상태인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 건강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결론이 나더라고요.
건강이 존립해야 행복도 성립될 수 있잖아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합 같은 팀은 필요 때문에 만든 거잖아요. 이미 만들어진 기성 치수의 옷처럼요. 한 번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내 치수에 맞는, 내 생태계에 맞는 조직의 형태를 찾아가는 것도 인생에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Q. 협업의 중요성을 느낀 건가요?
제가 이전에는 프리랜서 독립 기획자로서 활동했어요. ‘축제행성’이나 ‘후즈살롱‘이나 개인 사업자니까 일종의 프리랜서인 거죠. 조직의 형체를 갖추기 전이니까요. 프리랜서가 좋은 건 자유롭다는 점이죠. 하지만, 문제는 대체 불가능해 질수록 그 일을 나만이 소화할 수 있다면 반대로 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일을 하다 보면 건강이 나빠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대체 불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대체 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야 쉴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 가능한 프리랜서가 되자니 일이 안 들어올 것 같은 불안감이 따르더라고요. 그 부분을 고민하게 됐죠. 대체 불가능성을 회사라는 어떤 조직의 형태에 옮기고 대체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어서 내가 그런 생태계에서 살면 괜찮지 않을까 상상을 하게 됐어요. 지금 같이하고 있는 파트너가 한 3년 전부터 동업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고요.
프로젝트 단위로는 함께 했지만,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고 끝나면 또 논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전이 응집되지 않는 거죠. 행복해지기 위한 조직의 형태는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전을 공유하고 성장시켜 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커뮤니케이션이 지속해야 되더라고요.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공간을 찾기 시작하게 된 거죠.
대체 불가능한 조직이면서 대체 가능한 생태계가 가능하냐고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엑스포 기간이었던 93일 동안 휴일이 이틀 있었어요. 정말 매일 공연을 해야 했죠. 그 당시 93일 중에 딱 이틀을 휴가를 냈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더라고요. 과연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요. 그런데 제가 없어도 파트너가 담당해주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가능성을 보게됐어요. 제가 24시간 365일 모든 걸 지켜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누군가 밤을 지킨다면 누군가는 낮을 맡아야 하는 것처럼요.
PART 3. 일상의 때를 벗고 예술로 목욕하는 행화탕
Q. 행화탕에 대한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는데, 행화탕의 기획 의도가 궁금합니다.
행화탕에 있어서도 왜 목욕탕을 공간으로 하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것은 저에게 ‘왜 한국인으로 태어났어요?‘라고 반문하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그냥 작업실 공간을 찾고 있었을 뿐인데 이 공간이 과거에 목욕탕이었던 것이죠.
과거에 어떠한 역사가 있었듯, 내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있고 한국인으로 태어 났다는 것처럼요. 그래서 어쩌면 삶이라는 것은 결국 주어진 상황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라고 생각해요.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신조. 그리고 목욕이라는 어떤 행위와 목욕탕이라는 공간에 대한 추억과 상상 등 여러 가지를 계속 빗대어서 생각하죠. 탕에 들어 와서 씻는 행위는 뭘까.
일상의 짐을 벗어두는 행위이지 않을까. 탈의실은 뭘까. 몸에 걸치고 있는 무언가를 벗는다는 것은 우리의 무거웠던 관습이나 일상의 짐을 벗는 행위이지 않을까. 그리고 목욕탕에는 엿보는 게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다양한 예술가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여기서 뭔가 하는 것들을 관찰하는 거죠.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발현하는 것들을 관찰하는 것.
이런 식으로 계속 빗대어서 계속 생각해보면 성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것들을 관찰하고 단순히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나에게 부여된 역할에 따라서 보는 시야가 달라지듯이 주체적 관찰자로서 공연에 대한 외부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프로덕션 내부를 관찰하기 위해서도 프로듀서로서 잘 하고 싶은 거예요.
Q. 장소 선정에 있어서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인생은 알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알고 살면 사실 못하겠죠. 모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계속 시도와 계속 불안감 속에서 선택 해 나가는 게 아닐까 생각 해요. 공간을 찾기로 하고 몇 가지에 중점을 두었어요. 일단 누구나 생각하듯 임차료가 저렴한 곳을 우선으로 찾았죠. 그다음은 교통이 편리한 위치였어요. 아무리 좋은 장소라도 교통편이 불편하면 누가 찾아오겠어요.
마침 파트너 형은 집이 인천이었고, 저는 수색 근처에 살고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국제 기류도 살짝 염두에 두자는 생각도 했죠. 그래서 공항 철도 노선 주변 지역으로 좁혀졌어요. 그러다 보니까 재개발 지역이더라고요. 사람들은 이 공간이 재개발 예정지면 한 2년 정도 운영을 하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2년만 하고 없어지는 것이라면 왜 거기서 활동을 하냐고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삶도 고작 100년밖에 안 되는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 열심히 사느냐고 묻는 거랑 같다고 생각해요. 일 분이 됐든 일 초가 됐든 의미가 있다면 그걸 찾기 위해서 삶을 충실히 살아나가고 그것 자체가 삶이라고 생각해요. 매일 걱정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전환하는 거죠. 그러면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어요.
Q. 창작과 유통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하기가 쉽지 않은데, 행화탕의 경우에는 어떤가요?
작년 한 해는 제가 프로듀서로서 공연 쪽 기획 제작하는 일들을 잠깐 쉬었어요. 그때 가졌던 고민이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창작과 유통 두 가지 분야를 균형감 있게 가지 않으면 계속 지속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지원금을 통해서 창작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창작 콘텐츠가 유통을 통해서 다시 또 제공되고 재창작 되면 어떨까. 그걸 원천 삼아서 다시 또 새로운 창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생적인 구조를 발견하고 싶은데 사실 그게 쉽지가 않죠. 사실 2016년에는 이 공간을 예술 공간으로만 그냥 가끔 여닫는 정도로 생각했다가 2017년에 복합문화예술공간이라는 단어를 쓰게 됐어요. 문화라는 것은 생활양식 전반을 지칭하는데 여기에 커피와 맥주를 생각했죠. 현대인들의 만남에서 빠지지 않는 두 가지이기도 하고요.
역사적으로 보면 1953년 한국 전쟁 이후에 정부가 정책적으로 위생을 강조하게 되면서 공공의 기능을 하는 대중목욕탕들이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퍼지기 시작해요. 사랑방 역할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그 이전인 1904년도 종로구 선인 동에서 한옥을 개조해서 다방과 함께 목욕 영업을 했다는 문헌이 있는데, 거기 보면 재밌는 게 다방과 같이 했다고 기록돼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를 하는 부분, 아까 그 사랑방의 부분과 상통 하는 부분이 있죠.
행화의 뜻이 살구꽃이에요. 향토적인 정서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행화커피, 행화맥주, 행화건축, 행화다큐 이렇게 확장되는데 각자 1:1 콜라보 방식이에요. 행화 커피는 밸런스 포인트랑, 행화 맥주는 홉모리브루잉과 협업하는데 행화탕 공간에서 각자의 브랜드가 아닌 ‘행화’라는 브랜드로 집적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거죠. 그렇게 전체도 살고, 개인도 살고.
Q. 행화탕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얻고 갔으면 좋겠는지 궁금합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일상의 공간에서의 짐을 잠깐 벗어 던졌으면 좋겠어요. 온전히 하루 24시간 중에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생각 외로 많지가 않아요. 나에 대해서 온전히 생각해봤으면 해요. 목욕탕에 가보면 거울과 물이 있죠. 제 의견을 반영하는 오브제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나에 대한 발견도 있고 상대방도 어떤 단면이 아니라 입체라는 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대중탕이라고 하잖아요. 혼자가 아닌 것처럼요. 사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한 개인의 발견으로부터 시작해서 상대방에 대한 발견과 서로 등도 밀어줄 수 있는, 어떤 협업을 할 수 있는 것. 결국, 관계 맺음이죠.
협업과 사회관계. 그래서 만남이 이뤄졌으면 좋겠고 만남 이전에 상대방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현대인들이 여유를 가지려면 바쁜 일상의 속도를 잊어야 해요. 여기는 195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보니까 시간이 주는 느낌이 있어요. 시간이 멈춰있는 듯 착각이 드는 거죠. 그런 지점에서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그런 여유를 가지면서 상대방과의 대화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고요.
PART 4. 프로듀서 서상혁을 이야기하다
Q. 본인이 생각하는 ‘기획’이란 무엇인가요?
기획은 지구에 소풍 온 우주의 보헤미안으로서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하나의 좋은 플랫폼이라고 생각해요.
Q. 일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요?
전시 일을 하면서 전시와 세상에 대해서도 알고 탐구하고요. 우리는 때로 내가 하고 싶은 어떤 가치가 있으면 자본이 조금 덜하더라도 그 이상 나를 충족 시킨다고 판단되면 뛰어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 가치를 많이 추구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선입견과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100명 중에서 99명한테 안 좋은 사람도 한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타이밍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고, 직접 겪어봐야 아는 부분이 있는 거죠. 물론 그들의 의견은 참고가 될 수 있겠지만요. 그래서 절대적이지 않는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끊임없이 가운데 있으려고 노력해요.
나이가 80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말랑말랑해지고 싶어요. 생각이 경화되지 않고요. 그게 제가 세상을 탐구하는 방식이에요. 연기자가 연기라는 플랫폼을 가지고 일정기간 동안 그 캐릭터가 되어서 살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잖아요.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표현하죠. 마치 그것처럼 기획할 때에도 한 프로젝트를 할 때 거기 그 세계에 있는 어떤 캐릭터처럼 살아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Q. 인간의 삶에 왜 문화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목욕탕에 빗대어서 이야기하자면, 대중목욕탕은 혼자 씻는 탕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탕은 벗어서 혼자 내밀하게 본인의 어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는 내밀한 공간이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있어요. 그래서 출발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나의 욕망을 명확하게 하고 확장해나갈 때 이타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단순히 어떤 누군가를 위해서 조건 없는 헌신과 희생을 하다가 지치게 되면 주변에 있는 사람도 너무 힘들어져요.
그래서 결국 지속 가능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한 개인에게 동기가 부여되고 그게 재밌을 때 그걸 지속할 수 있고 지속하는 가운데 의미를 발견하는 기회들이 많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문화 예술이 됐든 뭐가 됐든 저는 예술이든 문화든 직업과 분야를 떠나서 모든 것은 인간 대 인간, 존재 대 존재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PART 5. 공식질문
”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아티스트의 역할은?”
Q.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요?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사실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조급해할 필요가 없어요. 10대든 20대든 그때 발견하면 너무 빠른 거라고 생각해요. 30대인 저도 지금 뭘 하고 싶은지 계속 찾고 있거든요. 40대는 40대에 하고 싶은 것들을 또 찾아야 하고요. 매 순간 끊임없이 어떤 상황이 됐을 때 찾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뭘 하고 싶은지 찾아서 실행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인생은 50보의 삶과 100보의 삶이 달라요. 50보를 걸어간 삶은 결국 50보의 지구만 바라보고 가는 거고, 100보를 걸어가면 100보를 걸어간 자기의 지구를 살다가 가는 거라서 결국은 부단히 걷고 부단히 돌아다니고 부단히 자기가 한 만큼 이 삶을 호흡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술 관련 일을 할 때 동시대의 예술은 무엇일까 해서 대부분 결론이 안 나는 질문이에요.
그런데 저는 동시대 예술이라는 건 결국 동시대라는 것은 자기다운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자기다운 것을 하는 게 거기서 행복이 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걸 하기 위해서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가 긍정적인 관점인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죠. 긍정하는 힘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러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자기의 응원이 될 수 있죠.
Q. 기획자로서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세요?
축제나 콘서트나 이런 거 관객들이 감동하는 것을 보면 몸은 힘들어도 감동을 받으니까 그걸로 피로가 씻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일단 제가 행복한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관객도 중요해요. 하지만, 관객을 행복하게 해주는 내적 동기, 그 출발점이 어디서부터 오느냐가 중요한 거죠.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턴 사원 주교의 묘비에 적혀있는 문구를 좋아해요.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이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중년의 나이에는 우리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황혼의 나이가 되어 병석에 누었을 때 생각해보니 꿈을 이룬 적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를 먼저 변화시켰다면 앞선 꿈을 이루었을 것이었다고.’ 저도 같은 생각이거든요. 변화의 시작은 자기 자신부터 출발한다는 것. 제가 행복해야 대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