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3 Dots

▪ 올해로 21회를 맞은 유럽 야간 박물관 축제(La Nuit européenne des musées)는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박물관을 무료로 개방해 젊은이와 지역 시민들에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밤을 선사한다.

▪ 프로그램은 단순한 전시에 머무르지 않고 DJ 공연과 무용, 향과 촉각을 활용한 퍼포먼스까지 어우러지며 고요한 박물관을 감각적 실험과 창작의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 특히 이 축제는 문화의 민주화와 문화민주주의를 동시에 실천하며 박물관을 사회적 대화와 일상이 공존하는 공공예술 공간으로 확장한다.


 

“소비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현대세계의 일상성(Critique de la vie quotidienne)』에서 “현대 소비사회는 개인을 일상으로부터 소외시킨다”라고 진단했다. 생산과 창조가 일어나는 장소이자 삶의 풍요로움이 깃든 일상이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단순한 소비의 생활양식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일상은 창작의 세계에서 관람의 세계로, 생산의 영역에서 소비의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문화예술도 다르지 않다. 일상에서 자유롭게 재생산되던 문화는 하나의 시장으로 변모해 하위문화와 고급문화를 구분하고 일상과 예술의 공간을 분리해 왔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조각난 문화를 뒤섞는 ‘일상의 재구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2025년 5월 17일 밤, 르페브르의 전망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사건이 펼쳐졌다. 고급문화의 중심이었던 프랑스 전역의 약 1,300개 박물관과 유럽 내 3,000개가 넘는 문화 공간이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무료로, 누구에게나, 모두가 잠든 새벽까지. 이제 낮의 일상을 상실한 시민에게 밤의 예술을 선사한 유럽의 도전을 살펴보자.

제21회 유럽 야간 박물관 축제(La Nuit européenne des musées) 포스터 © Nuit européenne des musées
파리 클리뉘 중세 박물관(Musée de Cluny – musée national du Moyen Âge) © Jean-Marie Heidinger, Musée de Cluny – musée national du Moyen Âge

일상에서 예술이 펼쳐질 때

지난 5월, 제21회 유럽 야간 박물관 축제(La Nuit européenne des musées)가 개최되었다. 이 축제는 유네스코(UNESCO),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국제박물관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ICOM) 등 주요 국제기구의 후원 아래 프랑스 문화부 주관으로 진행되었으며, 프랑스 전역 1,300여 곳을 포함한 유럽 3,000개 이상의 박물관·미술관이 동시에 참여한 대규모 문화행사였다.

 

2005년 시작된 유럽 야간 박물관 축제는 해마다 더 많은 박물관과 관람객을 끌어모아 왔다. 행사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의 박물관이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연장 운영되며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된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열린 ‘유럽 박물관의 밤’은 특히 젊은 관람객을 매혹시켰고 축제의 콘텐츠는 점차 더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프로그램으로 진화했다.

 

‘유럽 박물관의 밤’ 행사에 참여한 국립 선사 박물관장 겸 수석 큐레이터 나탈리 푸르망(Nathalie Fourmont)은 “유럽 박물관의 밤이라는 콘셉트 자체가 사람들을 가장 강하게 끌어들이는 요소”라고 설명했다. 밤에 박물관을 관람하는 경험 자체가 마법 같은 순간이며 상설 소장품의 빈틈을 채우는 독창적 공연이 새로운 일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유럽 전역의 박물관이 참여한 이번 축제는 전통적 대도시에 의존하지 않는 네트워크형 행사로,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문화적 불균형을 완화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무엇보다 지역의 소규모 박물관들도 축제라는 공동의 프레임 안에서 대중적 가시성을 확보하고, 지역 주민에게 자신들의 존재와 가치를 알릴 기회를 얻었다.

공감각적 종합예술이 펼쳐지는 박물관

시민들은 박물관에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를 만나며 진정한 교감의 순간을 경험했다. 대표적으로 몽마르트 박물관(Musée de Montmartre)은 라디오 노바(Radio Nova)와 협력해 저녁 10시까지 르누아르 정원에서 DJ 공연을 선보였다. 이 공연은 달리다(Dalida),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샤를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 그레코(Greco), 물루드지(Mouloudji) 등 몽마르트르를 대표하는 가수들을 기리는 음악으로 구성되어 파리가 지닌 예술적 정체성을 다시금 환기했다.

 

같은 시간, 포르트 도레 궁(Palais de la Porte Dorée)에서는 마이트르 마드제(Maître Madj)와 티투스 & 리타(Titus & Ritta)가 DJ 세션을 진행하며 색다른 클럽 문화를 선보였다. 이날 밤, 유럽의 박물관은 엄격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벗어나 새로운 경관을 지닌 실험적 공연장으로 변모했다.

 

부르델 박물관(Musée Bourdelle)에서는 프랑스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Antoine Bourdelle)의 조각 작품과 대화하는 무용 공연 〈살갗이 벗겨진(Écorchés vifs, entre danse et sculpture)〉이 펼쳐졌다. 이 작품은 조각의 조형미를 무용의 육체성과 표현력으로 재해석한 융복합 공연이었다. 한편 뤽상부르 박물관(Musée du Luxembourg)은 ‘모두 가볍게(Tous Léger!)’라는 제목 아래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를 기리는 공연을 선보였으며 신사실주의 작품을 함께 소개해 예술이 조형적 혁신과 일상생활의 표현을 어떻게 융합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질감과 후각을 강조한 전시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갈리에라 박물관(Palais Galliera)은 움직이는 패션 #3(La Mode en mouvement #3)이라는 제목으로 밤 11시까지 야간 개장을 실시했고, 발자크의 집(Maison de Balzac)에서는 배우 크리스틴 쿨레리에(Christine Coullet)가 오후 7시 30분과 9시에 〈발자크 초상화의 향기 스프레이(Parfum de femmes. Effet waouh. Un pschitt de portraits balzaciens)〉라는 감각적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는 후각을 통해 발자크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을 만나는 실험적 시도였다.

뤽상부르 박물관에서 진행된 <모두 가볍게(Tous Léger!)> 포스터 © Musée du Luxembourg
발자크의 집에서 열린 < 〈발자크 초상화의 향기 스프레이> 포스터 © Maison de Balzac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교육

밤의 박물관은 시민을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창조의 주체로 초대했다. 음악박물관(Musée de la Musique)은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공간을 개방하고 지역 대학생들의 즉흥 연주 콘서트를 선보였다. 관람객은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 프랭크 자파(Frank Zappa), 피에르 앙리(Pierre Henry) 등이 사용했던 악기를 감상하며 16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음악사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카르나발레 박물관(Musée Carnavalet)은 2025년 5월 17일이 국제 반(反)호모포비아·트랜스포비아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and Biphobia)과 겹친다는 점에 주목해 특별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퀴어 투어 프랑스(Queer Tours France)와 협력한 르 파리 퀴어(Le Paris Queer) 투어는 파리의 일상 속에 숨겨진 LGBTQIA+의 역사를 조명하며 박물관이 지향해야 할 포용성과 사회적 책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또한 카르나발레 박물관은 〈파리와 그 환경: 16세기부터 현재까지 자연과 함께 또는 없이 살기(Paris et son environnement : vivre avec ou sans la nature du XVIe siècle à nos jours)〉 프로그램을 세 차례(오후 6시 30분, 8시 30분, 9시 30분) 운영하며, 현대 도시 환경 문제에 대한 문화적 대응을 모색했다.

 

유럽 박물관의 밤(European Night of Museums)에서 가장 인상적인 프로그램 중 하나는 2013년 프랑스 문화부와 교육부가 시작한 The Class, the Artwork!였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오랜 시간 준비한 공연이 밤의 박물관 곳곳에서 펼쳐졌고, 다음 세대의 창작자이자 해석자들이 파리의 밤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채웠다.

파리 음악박물관(Musée de la Musique) 내부 이미지 © Musée de la Musique
카르나발레 박물관(Musée Carnavalet) 외부 전경 © Cyrille Weiner, Musée Carnavalet

다시 예술을 넘어 일상으로

유럽 야간 박물관 축제는 예술 공간의 물리적 시간을 확장했다. 조도를 낮추고 동선을 재구성해 낮과는 전혀 다른 감각적 경험을 제공했으며 음악·무용·시각예술·문학·과학이 어우러지는 종합문화예술제로 기능했다. 특히 LGBTQIA+ 투어와 포용 프로그램은 박물관이 단순한 학문적 기관을 넘어 사회적 대화와 정체성 인정의 장이 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현대 문화정책은 문화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culture)와 문화민주주의(cultural democracy)라는 두 축 위에서 전개되어 왔다.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이후 프랑스 문화정책의 핵심 기조였던 ‘문화의 민주화’는 고급문화를 더 많은 사람에게 보급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이번 축제가 보여준 관람 시간의 확장 역시 생계 노동으로 낮 시간 예술 향유가 어려웠던 시민들에게 새로운 접근성을 제공한 민주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문화민주주의’는 다양한 문화적 표현과 정체성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방향을 지향한다. 유럽 야간 박물관 축제는 주류문화와 하위문화의 위계를 해체하고 각 공동체가 스스로의 문화를 정의하고 향유할 권리를 가시화했다.

 

오랫동안 근대적 문화 제도는 예술 장르를 분리하고 위계를 재생산해 왔다. 그러나 이번 축제는 박물관이라는 고급문화의 거점을 시민에게 개방하고, 주변화되었던 목소리를 중심으로 끌어올리며 그 위계에 균열을 냈다.

 

이제 박물관은 더 이상 ‘보존과 전시’에 머무르지 않는다. 민주성(démocratique)과 포용성(inclusivité)을 기반으로 한 시민 참여는 박물관을 더 넓은 공공공간으로 확장한다. 축제는 단 하루였지만 그 감각은 일상 속에 남아 작은 균열을 축적한다. 우리의 다음 과제는 분명하다. 예술이 열어 보인 가능성을 발판 삼아 예술의 일상화라는 전환으로 나아가는 일이다.